평화신문은 103위 시성 25주년을 맞아 이번 호부터 '그림으로 보는 순교자 열전'을 연재한다. 죽정 고 탁희성(비오, 1915-1992) 화백의 유작 성화들을 '하느님의 종 124위'를 중심으로 소개하면서 신앙선조들의 믿음의 삶을 되새기고 시복시성을 기원하는 기획이다. 한국 순교자들의 삶과 교회사 관련 성화를 그리는 데에 혼신의 힘을 쏟았던 고인의 미공개 성화 작품들을 처음으로 대할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 윤지충(바오로, 1759-1791)이 모친 상을 당했을 때 유교식 제사 대신 천주교 예절로 장례를 치른 것을 안 종친들이 대노하고 있다.
전라도 진산의 양반집안 출신인 윤지충은 고종사촌 정약용(요한)을 통해 천주교 신앙을 알게 돼 1787년 이승훈(베드로)에게 세례를 받았다. 이후 그는 어머니와 아우 윤지헌(프란치스코), 이종사촌 권상연(야보고)에게 교리를 가르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게 했다.
1790년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조선교회에 제사 금지령을 내리자, 윤지충은 권상연과 함께 이 가르침을 따르고자 집안에 있던 신주를 불살랐다. 그리고 이듬해 모친 상을 당하자 권상연과 함께 어머니 유언대로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치러 종친들을 대노케 했다.
이 소문은 조정에까지 퍼져 조정에서는 진산 군수에게 '윤지충과 권상연을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피해 있던 윤지충과 권상연은 그해 10월 진산 관아에 자수했다.
천주교 신앙을 버리라는 말을 듣지 않자 진산 군수는 두 사람을 전주 감영으로 보냈다. 그곳에서 갖은 문초와 혹독한 고문에도 두 사람은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자, 마침내 조정은 이들을 처형토록 했다.
윤지충은 1791년 12월 8일 전주 남문 밖에서 권상연과 함께 참수형으로 순교했다. 그의 나이 32살이었다. 윤지충은 하느님의 종 124위 중 첫 번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