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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내 삶의 전부를 주님께 맡기자/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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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5) 내 삶의 전부를 주님께 맡기자/배광하 신부

연중 제6주일 (루카 6, 17. 20~26) : 참행복
발행일 : 2007-02-11 [제2537호, 6면]

- 하느님께의 신뢰 -

저주와 불행

오늘날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가장 큰 불행이 무엇인지를 우리 시대보다 더 참혹한 시대를 살았던 구약의 예레미야 예언자와 신약의 바오로 사도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 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의 마음이 주님에게서 떠나있다.”(예레 17, 5)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1코린 15, 19)

하느님께 온전히 의탁하지 않고 세상 것이나 현세의 이익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찾는다면 그것이 저주의 삶이며 가장 큰 불행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생의 광야에서 주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때때로 말 못할 고통으로 인하여 참된 신앙의 문턱에 다다르지 못하는 아픔이 있습니다. 고통은 진실로 믿음의 걸림돌입니다. 인생의 이 같은 슬픔을 알았기에 옛 시인은 이렇게 탄식하였던 것입니다.

“저희의 햇수는 칠십 년 근력이 좋으면 팔십 년. 그 가운데 자랑거리라 해도 고생과 고통이며 어느새 지나쳐 버리니, 저희는 나는 듯 사라집니다.”(시편 90, 10)

그래서 자주 우리는 “왜?… 하필이면 내가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합니까?”, “왜?… 우리 가정에 이 같은 끔찍한 고통을 주십니까?”, “왜?… 우리 아이이어야 합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삶에서 아무 근심과 걱정거리가 없고 평화로울 때 보다는 여러 시련 가운데 있을 때, 그때에 비로소 주님께서 더 필요한 때이고, 그때에 더욱 주님께 의탁하며 기도해야할 때가 아니겠습니까?

진정 예레미야 예언자는 고통과 슬픔을 온 몸으로 살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때문에 그의 이름 앞에는 ‘고난의 예언자’, ‘통곡의 예언자’, ‘가슴이 찢어진 예언자’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가슴이 미어지고 마음은 터질 것 같은 슬픈 목마름을 살았음에도 끊임없이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에 또다시 의지하며 살았던 희망의 사람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저에게 날마다 치욕과 비웃음 거리만 되었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 8~9)

세상 것과 세상 사람이 아닌,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 그 말씀을 간직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행복하여라

일본인 작가 엔도 슈샤쿠는 ‘예수의 생애’라는 글의 서두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참된 예수님의 모습이나 얼굴은 그분과 더불어 산 자, 예수님과 그분의 인생을 가로지른 인간 이외에는 그 누구도 본 적이 없다. 예수님의 생애를 말하고 있는 성경마저도 그분의 외모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성경을 읽을 때, 우리들이 왠지 예수님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는 것은 성경을 쓴 사람들, 곧 예수님을 알았던 사람들이 평생토록 그분을 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평생 잊을 수 없고, 언제나 자신들의 가련하고 불안한 마음을 아시고 그 아픈 인생 여정에 동행하여 주셨던 예수님을 기억하고 글을 썼기에 우리들이 비록 예수님을 뵌 적은 없어도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의 얼굴이 머리에 그려진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잊을 수 없는 얼굴이며, 끝내 그분께만 희망을 두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오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가난한 사람들! 하느님의 나라가 너희 것이다.”(루카 6, 20)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행복의 참된 조건을 세상의 눈으로 볼 때 불행한 요소들인 ‘가난’, ‘굶주림’, ‘울음’, ‘미움 받음’ 등을 내세우신 까닭은 인생 저 밑바닥에 떨어져 본 사람만이 마지막 붙잡을 수 있는 생명의 끈이 하느님 밖에 없으며, 하느님과 자신과의 끈을 놓지 않기 때문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대로 부유하거나 배부른 사람들은 하느님이 아닌 세상의 여러 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래서 언제든 하느님 아닌 다른 것에 의지하고, 다른 것을 찾아다니기 때문에 불행하다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선택은 분명해졌습니다. 불행과 저주는 사람과 제 자신에게 의지하는 것, 현세에만 희망을 두는 삶이며, 행복과 희망과 구원은 오로지 하느님께만 내 삶의 전부를 내어 맡기는 삶입니다.

전자는 죽음이며, 후자는 생명입니다. 그 선택은 분명 내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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