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사회 변화에 따라 새로운 신앙 언어 필요
|
▲ 에드워드 스힐벡스의 신학적 견지는 개종을 주목적으로 했던 선교 방향을 하느님 나라의 선포로 바꿔 놓았고, 인간 해방을 위해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충분히 협력할 수 있게 했다. | 에드워드 스힐벡스는 신학의 방법론과 논리면에서 지대한 영향을 미친 20세기를 빛낸 신학자 중 한 사람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그가 인간 나자렛 예수를 성경을 통해 재발견하고 이를 교의신학의 기반으로 삼은 점은 신학에 중요한 업적이었을 뿐 아니라 영성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또한 경직돼 있던 교리(doctrine)를 중심으로 한 신학에 해석학을 적용하고, 인간이 주체적 존재로서 경험한 신앙체험과 하느님 계시와의 관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로 큰 업적을 남겼다.
그뿐만 아니라 독일의 사회학자 하버마스의 영향을 받아 인간 해방을 위한 구체적 실천 문제를 신학에 적용했다. 인간 고통과 소외 계층에 대한 그의 관심은 신학적 고찰과 실천을 연결시키고, 구조적 악을 말한 라틴 아메리카의 해방신학과 깊은 공감대를 이뤘다. 그의 진보주의적인 사고로 보수주의자들에게 의혹을 받고 고통을 받았으나, 그는 끝까지 형제애를 잃지 않았다. 이러한 일이 있었음에도 그는 회고록에서 교회에 속하고 도미니코회에 속한 것을 행복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스힐벡스는 성경 두 구절이 항상 자신을 지탱했다고 말했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1베드 3,15). '성령의 불을 끄지 마십시오. 예언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모든 것을 분별하여, 좋은 것은 간직하고 악한 것은 무엇이든 멀리하십시오'(1테살 5,19-21).
이를 통해서 우리는 스힐벡스가 얼마나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해 열려 있으려 노력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성령께서 자신의 신학 연구가 세상에 열린 연구가 되도록 했다고 말했다. 또한 희망적이고 자유롭고 건설적이게 했을 뿐 아니라, 동일한 근원이 교회를 비판하게 했다고 말했다. 인간에게 종교는 소중한 자산이지만, 인간을 조작하고 인간의 육신과 영혼을 고문하는 비인간적인 것이 될 수도 있기에 인간을 방어하기 위해서 비판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가 다룬 여러 주제 중에서 한국 상황에 도움이 될 두 가지 주제를 한국 실정에 맞게 설명하고자 한다. 구원의 보편성
스힐벡스는 '그리스도교만이 유일한 진리의 종교이며, 가장 우수한 종교인가?'라는 질문은 자신의 종교에서 생각하는 종교개념을 다른 종교와 비교해서 하는 질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런 질문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그리스도교가 어떻게 하면 자신의 정체성과 유일성을 유지하면서 타종교의 긍정적인 가치를 인정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다. 이에 그리스도교에서는 타종교와 새로운 관계 형성을 위한 근본적 신학 고찰을 필요로 한다. 그리스도교 정체성은 타종교의 긍정적인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타종교와 만남을 통해 더욱 두드러지게 인식된다. 그리스도교 정체성은 하느님과 관계를 나자렛 예수의 특수한 역사와 밀접한 관계로 본다.
예수의 하느님은 예수의 특수한 역사를 통해 구원의 보편성을 역사 속에서 구체화한다. 예수의 특수성은 '열림'을 상징하며 이 특수성 안에 '갇힘'을 상징하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교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타종교와 긍정적 관계를 맺도록 해주는 것이다. 예수의 하느님은 모든 인간을 구원하시는 분이고, 모든 인간의 해방이기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보편성을 가지며 이는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항상 열려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스힐벡스는 하느님 구원 행위를 종교 안에 한정시킬 수 없고, 구원 역사를 그리스도교 역사로 축소시킬 수 없다고 했다. 그에게 인간 역사 전체는 이미 하느님의 인도하심에 있고 인류 역사가 바로 구원의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을 '세상 밖에는 구원이 없다'라는 말로 바꿔서 이야기한다. '세상 밖에 구원이 없다'는 것은 하느님 구원 역사는 교회 역사 안에서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역사 안에서 인간 역사를 통해 이뤄진다는 말이다.
이러한 신학적 견지는 타종교에서 개종을 주목적으로 했던 선교 방향을 하느님 나라의 선포로 바꿔 놓게 하고, 인간 해방을 위해 신앙인과 비신앙인이 충분히 협력할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 자체가 보편성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이를 각 상황에서 구체화할 때 보편화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고통받는 사람들과 연대하며 구체적으로 복음을 살 때 그리스도교가 보편화되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신학적 논지는 세계화 현상으로 여러 종교가 서로 만나고 섞이는 오늘날에 그리스도교 정체성과 유일성을 상대화하지 않으면서, 타종교와 협력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놓는다고 본다. 오늘날 무엇이 문제인가
「크리스천 경험의 실천 : 교회」에서 스힐벡스는 서구인들에게 왜 하느님이 문제가 되는지를 교회의 외부적, 내부적 요인으로 구분해 분석하는데, 이를 우리 실정에 맞춰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그는 외부 요소로서 사회구조의 변화와 현대인의 인격구조 변화를 연결시켜 보여주고 있다. 과거에는 인간의 삶이 거의 미리 계획된 것이었고 획일적이었다. 예를 들면 농부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은 대부분 아버지 뒤를 이어 농부로 살았다. 하지만 현대사회는 각자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선택, 사회구조 자체가 다양성과 상이성을 지향하는 사회로 변화됐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외부구조의 변화는 현대인의 인격구조 변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열려 있으며 다양성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인간 내면에 관한 문제, 즉 신앙 측면에서도 그러한 성향을 보인다. 현대 서구인들은 이렇게 변화된 사회에서 변화된 인격구조를 가지고 태어나서 자라기 때문에 과거처럼 교회에 소속된다는 것이 어렵다는 분석이다. 즉 과거에는 신자로 태어나서 신자로 죽었다. 그러나 이제는 각자가 신앙을 선택하는 사회가 되었기에 스스로 하느님 체험을 하지 못하면 신앙생활을 어렵게 생각한다는 것이다.
교회 내부 요소 중 하나로 그는 교회에서 사용하는 용어 문제를 다룬다. 현대인들에게 과거의 용어는 더 이상 의미를 전달해주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이 용어들을 너무나 당연하게 그대로 사용하고 있어 현대인에게 반응을 얻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문제를 그리스도교가 역사적 종교라는 인식이 부족해 야기된 문제로 본다. 예를 들어 '주님'이라는 용어는 가부장적 문화권에서는 문제가 되지 않았으나, 다양성과 평등성을 추구하는 서구 현대인에게는 억압을 상징하는 언어로 거부 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것이다. 그는 신앙은 맹신적인 것이 아닌 이성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성적이어야 근본주의로 흐르지 않을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을 고백하는 교회 전통적 교의를 글자 그대로 암기하는 식의 신앙이 아닌, 현대인에게 맞는 언어로 창출해야 한다.
새로운 신앙 언어 창출의 필요성은 세속화 현상으로 위기에 처한 서구교회 문제만은 아니다. 한국교회는 한국사회에서 사용하는 용어를 빌려 썼다. 언어는 문화와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으로 우리가 쓰는 대부분의 교회 용어는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은 용어임을 생각할 때 문제는 복잡해진다. 더욱이 오늘날 한국 전통문화는 여러 다른 외부의 문화 요소와 현대적 요소가 혼합돼 새로운 형태의 문화를 형성해가고 있기에 문제는 더욱 복잡해진다. 어떻게 현대인에게 걸맞은 언어를 창출할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질문 '너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에 대해 현대인들, 특히 사이버 공간과 친밀한 젊은층은 어떻게 답할 것인가.
이러한 문제는 문화와 신앙과 관계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은 구체적인 문화를 통해 신앙을 수용하고 형성하며 구체적으로 생활하고 실천하고 전달한다. 신앙은 인간 문화를 매개체로 할 수밖에 없는데 문제는 문화는 늘 변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언어 또한 고정적일 수 없다. 신앙의 새로운 언어 창출을 위해서는 교회전통에 대한 깊은 이해와 현대 상황의 세밀한 분석이 필요하다.
자신을 숨기시는 하느님
스힐벡스는 자신의 회고록 마지막 부분에 자신에게 의미를 준 성경구절을 엮어 하나의 시편을 만들었다. 이 시편을 보면 하느님을 찾아 떠나는 그의 여정이 얼마나 철저했던가를 볼 수 있다. 그에게 하느님은 자신을 계시하는 분이시지만 또한 자신을 숨기는 하느님이시기에(예레 23,23) 계속 그분을 찾아 나서야 함을 암시한다. 무엇보다도 그에게 하느님은 '보라, 내가 새 일을 하려 한다. 이미 드러나고 있는데 너희는 그것을 알지 못하느냐?'(이사 43,19)라고 물으시는 하느님이시다.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서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징표는 어떠한 것인가.
김미정 수녀(프랑스 성 안드레아 수녀원, 파리 예수회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