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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이슬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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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1. 8. 8. 08: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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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 에세이] 이슬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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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잎에 송글송글 맺힌 이슬방울처럼 맑은 사람이고 싶다.

무엇을 보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삶이 달라진다. 
본다는 것은 눈에 스쳐가는 잔상 그 자체가 아니라 
우리 마음에까지 읽혀지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눈을 
스치고 지나가는 수많은 잔상들을 우리는 다 보지 못하고 살아간다.

어쩌면 취사선택하여 보고자 하는 것만 보고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자기 욕심에 빠져 살아가다보면 남들은 다 보는데 자신만 보지 못하기도 한다. 자기 눈에 들어 있는 들보때문이다.

한참을 바라보면 자신도 바라보는 대상과 하나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것들이 있다. 나에게 있어서 그들은 이슬이다. 그들의 삶은 길지 않아서 길어도 아침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지는 시간 까지만 바라보아도 이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다. 그러나 그들이 사라진 후에도 내 마음 속에 또 다른 맑은 이슬이 맺힌 것 같아 카타르시스의 기쁨이 충만하다.

▲ 거미줄은 먹는 것만 잡지 않는다.

이른 아침 풀섶을 걷다 보면 밤새 풀잎에 맺힌 이슬들로 인해 
신발과 바지가 젖곤 했다. 비온 뒤의 숲길도 그랬다. 
맑은 이슬방울 하나하나를 온전히 보지 못할 때까지 그들은 단지 
나의 산책길을 방해하는 존재였을 뿐이다. 그러나 그들 속에 들어 있는 
작은 또 하나의 우주를 발견하고부터는 산책길이 조심스러워졌다. 
가장 아름답게 맺힌 이슬방울을 떨어뜨리는 걸음걸이가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뭔가를 보았다는 것은 그의 삶이 달라졌다는 이야기와도 통해야 한다. 아무리 많은 것들을 보았어도 그 삶에 변화가 없다면 그는 진정으로 본 것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작은 이슬방울로 인해 숲길을 걸어가는 내 걸음이 달라지고, 그 작은 이슬방울들을 하나둘 바라보면서 그들이 만들어낸 작품들을 바라보는 나는 행복의 단편 한 조각을 찾은 사람 중 하나다.

▲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내어놓음으로 아름다움을 만들어 간다.

이슬의 종류도 다양한데 비이슬을 제외하고는 아주 조금씩 
이슬방울을 키워간다는 것이다. 풀잎 끝에 머물만한 크기를 넘어서는 순간 
그는 더 이상 이슬이 아니다. 아주 조금씩 자신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작은 이슬을 만들어간다. 식물들은 저마다 자기 안에 있는 물기를 
배출하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비가 온 뒤 혹은 장마철에 종종 만나는 이슬, 
그것은 하늘에서 온 것이 아니라 자기를 비움으로 만들어가는 
또다른 이슬방울인 것이다.

일맥현상이라는 재미없는 이름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그냥 맑은 이슬이라고 부르고 싶다. 자기를 위해서 축적하지 않고 필요 이상의 것, 넘쳐나는 것을 내어놓는 자연이기에 자연에는 비만이 없는 것이다.
▲ 밤새 내린 서리가 아침햇살에 녹으면서 만들어낸 이슬방울.

겨울이 시작되면 서리가 내리고 아침햇살에 서리가 녹아지면서 
이슬을 만든다. 겨울의 전주곡이다. 간혹 한겨울에도 안개가 자욱한 날이나 
강가에서는 눈꽃이 피었다가 햇살에 맑은 이슬을 만들기도 한다.

자기 안으로 모든 것을 빨아들인다면 이슬을 맺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냥 존재하게 함으로 인해 맑은 이슬을 만드는 것이니 소유하는 삶과 존재하는 삶이 어떻게 다른 것인지 맑은 이슬방울 속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다.
▲ 때론 퍼붙는 소나기로 만들어지는 이슬도 있다. 비이슬이라고 한다.

때론 퍼붓는 소나기 끝에 남겨진 이슬도 있다. 
비이슬이라고 하는데 급하게 만들어진 탓인지 보통 이슬과는 
그 결정체가 다르다. 아침이슬이나 일맥현상에 의해 만들어진 이슬을 보면 
이슬 뒷편의 잔상들이 선명하게 보인다. 그러나 비이슬의 경우는 
잔상이 맺히긴 하지만 그들보다 덜 선명하게 맺히고, 
이슬방울이 커서 작은 바람에도 ''후두둑!'' 흙으로 돌아가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로 인해 만물이 새 힘을 얻고 푸름을 더해가니 고마울 뿐이다. 그들의 삶 역시도 길지 않다. 그러나 짧은 삶일지라도 초목 안에 그들을 담음으로 인해 영원한 삶을 살아간다.

▲ 아침햇살을 받은 이슬의 빛남은 찬란하다.

맑은 이슬의 절정은 아침햇살을 담고 빛내는 눈부심이다. 
작은 이슬방울마다 독립된 우주, 그 작은 우주마다 빛나는 
태양을 통해서 삼라만상이 새 아침을 맞이한다. 
꽃보다도 더 아름답게 빛나는 맑은 이슬을 보면 그 아름다움이 
영원했으면, 누구든지 보고자 할 때 볼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을 
갖기도 하지만 우리의 일상으로 들어오면 그 아름다움이 퇴색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 짧은 순간의 지혜를 배운다.
▲ 때론 하늘을 향한 뿌리에 이슬방울이 맺히기도 한다.

어느 겨울 날 한라산 자락의 숲속을 거닐다 뽑혀버린 나뭇가지의 
뿌리를 보았다. 쓰러진 나무를 세우고 싶은 소망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나 
그 작은 뿌리로는 가당치 않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뿌리에서 
새순을 내고 다시금 쓰러진 나무가 되는 꿈을 꿀 수는 있을 것이다. 
아주 오랜 세월이 걸리겠지. 그러나 불가능한 꿈은 아니겠지.

숲 속 작은 꽃들도 꿈을 꾼다.
그 꿈은 짧은 시간에 이뤄질 꿈이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의 삶을 훨씬 뛰어넘는 세월의 길이를 간직하고 있는 꿈들이 있다. 그 긴 여정의 꿈들을 짧은 삶 아둥바둥 살아가는 인간들이 짓밟아 버릴 때도 있다. 그래도 여전히 그들은 꿈을 꾼다. 그래서 자연은 희망이다.

▲ 저 맑은 이슬이 아침해살에 마르면 연꽃이 화들짝 피어날 것이다.

맑은 이슬이 사라지면 마음껏 꽃을 피워도 된다는 표식이 된다. 
비로소 꽃도 자기를 온전히 열고 맑은 하늘을 바라본다. 
그들에게 이슬은 하나의 사인일지도 모른다. 
내가 사라지면 이제 맘껏 꽃을 피워도 된다는 그런 사인말이다.

이슬은 자기의 삶에 연연하지 않는다.
이슬이 맑은 이유는 그래서이다. 만일 하루 이틀 사흘 그렇게 머물렀다면 맑은 이슬은 없었을 것이다. 오염된 찌꺼기들의 잔재가 이슬 속에 들어 있는 것을 상상해 보라.

언젠가 도심에서 소나기를 만나 프라터너스 나무 아래에서 비를 피했다. 잠시 뒤 하얀 와이셔츠에는 얼룩이 지기 시작했다. 도심의 먼지를 가득 이었던 프라터너스 이파리에서 씻겨나온 먼지들이 빗방울 속에 들어 있었던 것이다.

▲ 맑은 이슬방울에 수선화 한송이가 피어났다.

겨울비가 내렸다. 앙상한 나뭇가지에 비이슬이 맺히고, 
비이슬 안에는 수선화 한송이가 피어났다. 
나무는 곁에서 깊은 향기를 품고 피어나는 수선화를 흠모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나도 저렇게 예쁜 꽃 한송이 피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소망하고 
또 소망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그 소망을 이룬다. 
비이슬 덕분이다.

▲ 토란이파리에 송글송글 맺힌 물방울은 작은 보석알갱이들 같다.

맑은 이슬방울들을 보면서 나는 그리움 가득 담아 이슬연가를 부른다. 
이슬방울이 풀섶에 가득한 날, 그 아침을 숲에서 맞이할 수 있는 날들이 
또 있기를 기도한다. 매일매일 볼 수 있는 풍광이어서 그리 새롭게 
다가오지 않을 정도로 오랫동안 아침이슬을 맞이할 수 있는 곳에서 살아가고 싶다.

잊고 살아가는 것이 너무도 많다.
그 중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또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찾고자 하는 수많은 것들,
보고 싶어하는 수많은 것들 중에
맑은 이슬방울 같은 것도 하나쯤은 간직하고 살아가자.

잊어버려야 할 것들은 잊어버리자.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들은 잊지 말자.
맑은 아침이슬 같은 것들 하나쯤은 잊지 말자.
<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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