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同心草(동심초) 이야기와 듣기

가곡(歌曲)

by 巡禮者 2013. 6. 5.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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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옥 같은 우리가곡

 

설도 시 김성태 작곡

同心草(동심초) 이야기와 듣기

 

 

 

가사는 놀랍게도....

7세기 중국 당나라 시인인 설도(薛濤라는 여성

(기생이었다는.... 작품을 김안서가 번역?? )

신사임당 시로 전에는 알려 져왔는데..

그래 나도 고교때 그렇게 알고 있었던것 같다.

최근에 알았다...중국의 옛날시 라고...

 

 

 


 

 

동 심 초(同心草)

설도 시 김성태 작곡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

만날 날은 아득타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바람에 꽃이 지니 세월은 덧없어

만날 날은 뜬구름 기약이 없네

 

무어라 맘과 맘은 맺지 못하고

한갓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한갖되이 풀잎만 맺으려는고

 

설도의 춘망사(春望詞)

 

花開不同賞 꽃피어도 함께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相思處 묻노니, 그대는 어디 계신고

花開花落時 꽃 피고 꽃 질 때에

攬草結同心 풀을 따서 한 마음으로 맺어

將以遺知音

지음의 님에게 보내려 하네

 

 

春愁正斷絶 봄 시름 그렇게 끊어 버렸건만

春鳥復哀吟 봄 새가 다시 슬피 우네

風花日將老 꽃은 바람에 시들어가고

佳期猶渺渺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가네

不結同心人 마음과 마음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헛되이 풀잎만 맺었는고.

 

 

 

 

 

‘ 달빛 침침한 한 밤중에,

두 사람의 마음은 두 사람만이 안다’

那堪花滿枝 어찌 견디리 꽃 가득 핀 나뭇가지

翻作兩相思 괴로워라 사모하는 마음이여

玉箸垂朝鏡 눈물이 주르르 아침 거울에 떨어지네

春風知不知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동심초'는

사랑의 편지 (연서戀書)를 말하며

당대(唐代)성도(成都)의 기녀였던

설도의 춘망사 4수 중 세 번째 시이다.

 

 




안산 시립합창단



 
Ten 엄 정 행




 

 

바이올린 연주 우리 가곡 동심초는

이곡의 노랫말이 당대(唐代)의 명기(名妓)이며

여류시인(女流詩人)

;설도(薛濤)의 詩"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 많다.

 

[설도(薛濤)](대략 770~832)는 송나라 때의 이청조와 함께

중국 여류시단을 대표하는 인물로서 당시의 일류

문인들과의 교류가 많았는데,

백거이(白居易), 원진(元[禾眞]), 유우석(劉禹錫),

두목(杜牧) 등이 바로 그들이다.

 

이중 원진과의 정분은 각별했다고 한다.

설도를 얘기할때 [원진(元[禾眞])] (779 - 831, Yuan Zhen)은

좀 자세한 언급이 필요한 사람이다. 그는 설도보다 10여세 연하였다.

 

자는 미지(微之). 9세 때 시를 짓기 시작했고

15세 때 과거에 급제한 수재였다.

그는 백거이와 아주 절친한 관계였고 그와 더불어

알기 쉬운 새 시풍을 개척했는데,

사람들이 그들을 경박하고 속되다며 비방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권력 다툼에 기인해서 중앙에서 밀려나 동천(東川,

혹은 통주(通州))에 좌천되었다.

 


 

 

 

약 5년 후에 백거이도 '강주'라는 곳으로 귀양을 갔다.

809년 3월 설도와 원진이 처음 만난다.

 

당시 원진은 동천으로 좌천되어 와 있었는데

설도의 문명(文名)을 듣고

 

사모해서 방문하게 된다. 설도 역시 원진의

문학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다.

 

설도는 자기가 직접 만든 아름다운 색종이에

백 여편의 시를 써서 그에게 주며

 

그의 마음을 위로해 주었고, 원진 역시

설도에게 향한 정을 시로써 화답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얼마 지나서 두 사람은 이별을 하게 되는데,

그때 둥근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간직하며 다시 만나

그것을 둥그렇게 만들 날을 기약했다. 원진은 옛날 은사였던

위하경(韋夏卿) 을 만났는데 그는 원진이

기생을 좋아하고 있다고 책망하면서

자기 질녀(姪女)가 그의 처가 되기를 바랬다.

 

후에 원진과 설도는 성도에서 만났는데,

그위(韋)씨녀가 원진을 사랑하여

그 벼루를 잡고 가는 것을 막았고 급기야 벼루를

시냇물에 빠뜨려 버리고 말았다.

 

설도는 자신의 한계를 느꼈고, 원씨 문중과

부딪칠 수 없음을 알았으며,

위씨가 원진을 따르려 하는 마음을 느끼게 되어

드디어 사랑이 깨어지는 아픔을 감수하게 되었다.

 

 

 

 

 

원진과 위씨는 결혼을 했고, 설도는 홀로 남아

외로운 난새(鸞새)가 되어 버렸다.

조금 다른 얘기에서는 원진이 설도를 만날 때

약 30세의 나이였는데 이미 처가 있었고,

설도를 만난 후 약 2년 후에 다른 여자를 첩으로 들였다고 한다.

 

그리고 다시 4년 후에 또 배(裴)씨 여자를 들였다.

이것은 아마도 그는 설도에 대해 단지 풍류끼를 발휘한 것이고

처음부터 설도와 함께 맺어질 생각이 없었을 것이라는 말이 된다.

 

사실 그렇지 않았다 해도, 두 사람은 설도의

조건 때문에 맺어지기 어려웠을 것이다.

우선 설도는 악기(樂妓)였고, 원진보다

10년 정도 연상이었을 뿐만 아니라,

천한 집안은 아니었지만 명문 출신은 아니었고,

설도의 나이는 이미 청춘을 벗어나고 있었다.

 

40세나 되어서야 마음을 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설도였다.

하지만 이미 그것은 떨어진 꽃의 심사(心思)였고,

그녀에게 오로지 정을 바칠 수 없는 원진은 흘러가는 바람이었다.

사람은 찾았으나 영원히 마음을 엮을 수 있는

' 동심인(同心人)'이 되지는 못한 것이었다.

 

설도는 비록 원진과 함께 할 수는 없었지만

죽을 때까지 그를 사랑했다.

설도는 성도(成都)의 완화계(浣花溪)라 불리는 시냇가에 살았다.

집이 창포(菖蒲) 꽃으로 가득했고,

설도는 대나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성도에는 현재 설도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망강루(望江樓)공원이 있는데

약 130 종 이상의 대나무가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성도의 종이의 폭이 너무 넓다고 생각해서

직접 종이를 만들어 사용했다. 곧 완화계의 맑은 물을 사용하고

연꽃즙을 집어넣고 해서 여러 색깔의 작고

아름다운 종이를 직접 만들었던 것이다.

 

그녀는 그것을 가지고 다니다가 거기에 시를 쓰곤 했다.

그래서 이 종이를 "설도전"(전 = 箋: 작은 종이의 뜻)

또는 "완화전"이라고 부른다.

 

그 후에 많은 문인들이 이 종이에 대해서 시를 썼다고 한다.

지금은 중국사회도 산업화로 인해 민간에서 종이를 만드는 기술이

거의 사라졌기에 중국에서는 '설도전'이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참고로 대만민속촌(台灣民俗村)에는 과거에

어떻게 종이를 만들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관이 있는데 그 관의 이름이 바로 '설도장(莊)'이다.

설도는 계속 시를 썼고, 후에,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도교의 사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약 450편의 시를 썼다고 전하는데

지금은 약 90수만 남아 있다.

하지만 이 숫자만으로도 당대(唐代)의

어떤 여류 시인의 글보다 많다.

 

 

 

 

 

중국 四川省 成都 望江樓공원에 있는 薛濤 묘.

 

우리가 즐겨 부르는 동심초는 설도(薛濤)의 시

춘망사(春望詞=봄날의 (바램)

사수(四首) 중에 삼수이다.

風花日將老(풍화일장노) / 꽃은 바람에 시들어가고

佳期猶渺渺(가기유묘묘) /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가네

不結同心人(불결동심인) / 마음과 마음은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공결동심초) / 헛되이 풀잎만 맺었는고.

 

김성태씨가 1946년 설도 작, 김안서 역사 성악곡 "동심초"를

발표한 후에 이 노래는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다.

참고로, 간혹 성악가들의 음반 자켓에 "동심초"가

 

'신사임당 시, 김안서 역시, 김성태 곡'으로 기록되어있어

원작자가 잘못 알려져있는 경우가 있다.

원작자는 당나라 시대 여류 시인 설도이다.

 

 

 

 

 

 

春望詞四首 (一) 花開不同賞 (화개불동상) : 꽃 피어도 함께 즐길 이 없고

花落不同悲 (화락불동비) : 꽃 져도 함께 슬퍼할 이 없네

 

欲問想思處 (욕문상사처) : 묻노니 그대는 어디에 계신고

花開花落時 (화개화락시) : 때맞쳐 꽃들만 피고 지네 (二)

 

攬草結同心 (람초결동심) : 풀을 따서 한마음으로 맺어

將以遣知音 (장이유지음) : 지음의 님에게 보내려 하는데

 

春愁正斷絶 (춘수정단절) : 봄 시름은 속절없이 끊기고

春鳥復哀吟 (춘조복애음) : 봄 새들은 다시와 애달피 우네 (三)

 

風花日將老 (풍화일장로) : 꽃은 바람에 날로 시들어 가고

佳期猶渺渺 (기기유묘묘) : 만날 날은 아득히 멀어져 가네

 

不結同心人 (불결동심인) : 그대와는 한마음 맺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결동심초) : 부질없이 풀잎만 맺었는고 (四)

 

那堪花滿枝 (나감화만지) : 어찌 견디리 가지 가득 핀 저 꽃

煩作兩相思 (번작양상사) : 괴로워라 사모하는 마음이여

 

玉箸垂朝鏡 (옥저수조경) : 눈물이 주루룩 아침 거울에 떨어지네

春風知不知 (춘풍지불지) : 봄바람은 아는지 모르는지 동심초라는 의미가 무엇인가?

 

노랫말을 보면 "꽃잎은 하염없이 바람에 지고~"로 시작하고 있어

"아! 동심초 꽃잎이 바람에 지는구나"하고 생각하기가 쉽지만

사전에 보면 동심초라는 단어가 없다. 중국말 사전에도 동심초라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엄밀히 말하면 동심초라는 꽃이나 식물은 없다는 말이다.

그러면 동심초는 무엇이란 말인가? 동심초는 무슨 풀이름이 아니라

바로 연서(戀書), 곧 러브레터란다.

 

노랫말에 나오는 동심초를 (同心草) 이해하기 위해서는

동심쇄(同心鎖 tong xin suo)를 보면 금방 이해가 될겁니다.

 

중국의 산에 가면 쇠사슬에 자물쇠로 달아 놓은 것을 많이 보게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영원한 사랑을 바라는 마음으로 매다는 풍속이라고 한다.

그런데 왜 '풀 초(草)'가 들어가는가?

 

종이는 풀로 만드는 것이며 러브레터 접는 방식이 바로 돗자리 짜는

풀의 매듭방식에서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동심초(同心草), 동심인(同心人), 동심쇄(同心鎖)

전부 같은 배경에서 나오는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결합을 의미한다.

1946년 김소월의 스승인 안서 김억이 노랫말을 붙이고

김성태가 작곡한 '동심초'가 발표됐다.

노래는 '산장의 여인'으로 유명한 권혜경이 불렀다.

해방 공간을 울려퍼진 이 애틋한 사랑의 노래는 공전의 히트곡이 되었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졌다. 가곡풍의 이 노래는 이후

신영옥, 엄정행 등 성악가들이 불러 더욱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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