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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그릇으로 명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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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2. 1. 6.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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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그릇으로 명상하다

 

 

 

물은 가을물이 맑다.

사계절 중에서 가장 맑다.

개울가에 물을 길러 나갔다가

맑게 흐르는 물을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시작도 끝도 없이 흐르는 이 개울물에서 세월을 읽는다.


 

 

가을 물이 맑다고 했는데 사람은 어느 때 가장 맑을까?

산에서 사는 사람들은 가을에 귀가 밝다.

이 말이 무슨 소리인가 하면

가을 바람에 감성의 줄이 팽팽해져서

창밖에 곤충이 기어가는 소리까지도 다 잡힌다.

다람쥐가 겨우살이 준비를 하느라고 상수리나무에

부지런히 오르내리는 소리도 놓치지 않는다.

오관이 온통 귀가 된다.


 

 

 

대상과 하나가 될 때 사람은 맑아진다.

너와 나의 간격이 사라져 하나가 될 때 사람은 투명해진다.

 

이 가을 들어 나는 빈 그릇으로 명상을 하고 있다.

서쪽 창문 아래 조그만 항아리와 과반을 두고

벽에 기대어 이만치서 바라본다.

항아리는 언젠가 보원요 지헌님한테서 언어 온 것인데,

유약을 바르지 않고 구워낸 그릇이라

그 연한 갈색이 아주 천연스럽다.

창호에 비껴드는 햇살에 따라

빛의 변화가 있어 살아 숨쉬는 것 같다.


 

 


며칠 전에 항아리에 들꽃을 꽂아 보았더니

항아리가 싫어하는 내색을 보였다.

빈 항아리라야 무한한 충만감을 느낄 수 있다.

 

백자로 된 과반은 팔모 받침에 네모판으로 된 것인데

가로 한 자 두치, 세로 한 자의 크기, 과반치고는 크다.

이 역시 빈 채로가 더 듬직하고 아름답다.


 

 


텅 빈 항아리와 아무것도 올려 있지 않는

빈 과반을 바라보고 있으면 바라보는

내 마음도 어느새 텅 비게 된다.

무념무상(無念無想). 무엇인가를 채웠을 때보다

비웠을 때의 이 충만금을 진공묘유(空妙有)라고 하던가.

텅 빈 충만의 경지다.

빈 그릇에서 배운다.

 

《법정 스님의 홀로사는 즐거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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