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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눈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27.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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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의 눈

발행일 : 2001-08-26 [제2264호]

각 방면에서 세계적인 공을 세운 분들에게 주는 세계적인 상이 노벨상인데, 한번도 받기 힘든 노벨상을 두 번이나 받은 분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퀴리 부인이다. 이 분은 그 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방사능 원소 두 가지를 발견한다. 그러나 그 같은 새로운 발견을 위해서 이분이 쏟았던 정성과 열정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 연구를 위해 이들 부부는 다 쓰러져 가는 오두막집에서 매일 매일의 힘든 연구로 8년이란 세월을 보낸다.

그 8년 동안의 세월은 한마디로 절망감과 실망으로 얼룩진 시간들이었다. 수많은 시행 착오, 실패와 실패를 거듭하던 어느 날 함께 연구에 몰두하던 남편마저도 아내에게 이야기를 한다. "불가능해 우리 기술로는 불가능해, 아마 100년 후쯤에 가능할거야"라고 포기를 종용 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퀴리 부인은 실망하지 않고 "만약 100년이 아니라200년이 걸려도 어쩔 수 없지만, 그러나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나는 계속 할 것이다"고 하면서 자신의 연구를 계속해 나간다.

어떻게 보면 미련스럽게까지 보이는 우직한 열정과 집착이 화학사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기게 된다.

오늘 복음은 구원의 문제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좁은 문은 흔히 고행과 회개의 생활을 의미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얼마나 노력해야 하는가 하는 것은 공동번역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라"로 번역한 단어가 '전투'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구원은 집주인이 한번 문을 닫아 버리면 열어 달라고 아무리 두드려도 소용없듯이 하느님이 심판을 내리고 나면 구원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다.

즉 모든 것이 정해진 때가 있듯이 구원을 위해서도 주어진 시간 안에 있는 힘을 다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늘나라에서는 지금은 꼴찌지만 첫째가 되고 지금은 첫째지만 꼴찌가 되는 반전이 있다. 물론 여기서 지금 첫째인 사람들은 유다인들과 부자들 그리고 권력자 등 소위 잘난 사람들을 뜻할 것이고 꼴찌는 이방인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과 죄인들 등 소위 못난 사람을 뜻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세속적인 기준이 하늘나라에서 그대로 적용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에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해 투쟁해야 된다는 것, 그리고 사회에서 밑바닥 인생을 살던 자들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힘있고 권력 있는 자들이 밑바닥 인생으로 처진다는 것은 흥미 있는 일이기는 해도 선뜻 이해가 잘 되는 부분은 아니다. 아마도 이것이 선뜻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 이유는 구원의 문제를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에 그 원인이 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있는 그대로 우리에게 보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어떤 관점을 가지느냐에 따라 똑같은 사건이나 사물도 다른 의미로 보여진다.

달리기를 예로 든다면 군대에서 벌로서 연병장을 도는 것과 운동 삼아 운동장을 뛰는 것은 달린다는 사실에서는 같지만 개인에게 주는 의미는 너무나 다르다.

때문에 어떤 사건이나 사물의 정확한 의미를 알기 위해서는 그 사건이나 사물에 맞는 관점이 필요한 것이다.

예를 든다면 그림을 그리는 예술가가 나무를 볼 때 미의 차원에서 나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경제학자의 견지에서 나무를 본다면, 즉 어떻게 나무를 이용하여 더 많은 이익을 낼 수 있겠느냐 하는 견지에서 나무를 보고 그림을 그린다면 그 그림은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아마도 이 사람은 나무를 돈으로 그릴 수도 있을 것이다.

구원의 문제도 이와 마찬가지다. 구원의 문제의 대한 올바른 이해를 위해서도 역시 세상을 바라보는 눈과는 다른 관점이 필요하다.

사실 세속적이고 평범한 범인의 눈만 가지고는 퀴리 부인의 열정이나 넓은 문을 버려 두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려 애쓰는 행동, 그리고 첫째면 첫째이지 첫째가 꼴찌가 되는 반전을 그리 쉽게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오늘날 교회의 불행은 바로 잘못된 눈, 세속적이고 경제적인 관점으로 신앙의 가치를 재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길이란 결국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는 길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때문에 우리가 그 길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앙의 눈이 필요하다.

물론 신앙의 눈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는 잣대로 삼는 것도 위험한 발상일 수 있지만, 그러나 구원의 문제에 관한 한 신앙의 눈만이 세상과 사건 사물의 의미를 우리에게 올바로 밝혀 줄 수 있을 것이다.


홍금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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