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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를 만나다: 자유의지론

宗敎哲學

by 巡禮者 2012. 8. 18. 0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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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구스티노를 만나다] “달려가거라, 내가 안아 오리라!”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성염


그의 나이 서른둘이던 386년 가을, 아우구스티노는 격렬한 정신적 회오리바람에 휩쓸리고 있었다. 마니교를 청산하고 플라톤 철학에 접하면서 사상적 방황이 잦아들기 시작하였고,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의 설교를 들으러 다니면서 그리스도교로 마음이 기울기 시작하였다.

“오, 영원한 진리여, 참된 사랑이여, 사랑스러운 영원이여! 당신께서 내 하느님이시니 밤낮으로 당신을 향해 한숨짓습니다.”라는 고백처럼, 언제나 진리를 찾아왔고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이 자기가 찾던 그 진리이심을 깨달은 터에, 그 진리에 온몸으로 헌신하고 싶었다.

「고백록」 제8권에는, 진리를 열애하던 철학자의 심중에서 일던 질풍노도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저 안토니오 성인처럼 부귀공명을 일거에 내던지고 사막으로 은둔한 사람의 얘기도 알고 있었다. 최근 밀라노 황실 근위대 장교로 있다가 은둔생활을 하는 수도자들의 삶을 보고서 그 자리에서 군복과 속세를 한꺼번에 벗어던진 사람들의 얘기도 들었다.

“저 사내들도 해내고 저 여자들도 해내는 것을 너는 못한다?” “자, 이제는 해야 해. 이제는 해야 해.” 말로는 벌써 하고도 남았지만 실제로 안 되었다. “언제까지, 언제까지 ‘내일 또 내일’ 입니까? 왜 지금은 아닙니까? 어째서 바로 이 시각에 내 추루함이 끝장나지 않습니까?”라고 하느님께 넋두리하였다. 하지만 이 하소연에는 “나에게 순결과 절제를 주소서. 그러나 지금은 말고.”라는 저 유명한 기도가 곁들여 있었다.

저 운명의 밤에 밀라노 저택 담 밖에서 들려오던 동요, “집어라! 읽어라!”를 듣고서 성경을 펴 읽던 순간, “평정의 빛이 내 마음에 부어지듯 의혹의 모든 어둠이 흩어져 버렸다.”는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는데, 그 성경 역시, 놀랍게도, “음탕과 방탕 속에 살지 맙시다. 그 대신에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입으십시오. 그리고 욕망을 채우려고 육신을 돌보는 일을 하지 마십시오.”라는 로마 신자들에게 보낸 서간의 구절이었다. 그러니까 회심의 마지막 순간 그를 붙잡고 늘어진 것은 사상적 갈등이 아니라 ‘육욕’이라는 실존적 죄악이었다.


“악은 어디서 오는가?”

아우구스티노 같은 명민하고 비판적인 지성이 마니교에서 십 년 넘게 머무적거린 데는 까닭이 있었다. 마니교가 세상이 고해(苦海)인 것도, 본인이 애욕에서 한 걸음도 못 빠져나오는 것도 선의 원리인 하느님께 쐐기를 박으면서 덤비는 악의 원리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선악이원론을 가르쳤던 것이다.

“죄를 짓는 것은 우리가 아니고 뭔지 모르지만 우리 안에 있는 다른 본성이 죄를 짓는 것으로 보였고, 그래서 탓이 나에게 없다는 오만을 부추기고 있었습니다. 또 내가 무슨 악을 저질렀을 경우에는 뭔지 모르지만 나와 더불어 있고 그러면서도 내가 아닌 다른 무엇에다 탓을 돌리기를 좋아하였습니다”(「고백록」, 5.10.18).

「자유의지론」(성염 역, 분도출판사, 1998년)은 아우구스티노의 초기 대화편에 속한다. 387년 부활절 밀라노에서 암브로시오에게 세례를 받고 나서 고향 아프리카의 타가스테로 출발하였는데 전쟁으로 뱃길이 막혀 로마에 머물던 388년경에 고향 친구 에보디우스와 주고받는 대화로 엮어져 있다.

이 책은 “악이 어디서 유래하는가?”라는 주제를 다룬다. 악의 수수께끼를 두고 3천 년에 걸친 서구철학의 어느 누구도 이 책을 넘어서지 못하였다는 것이 필자의 견해다. 책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제1권은 “악의 장본인이 하느님이 아니신가?” 하고 묻는다. “악은 현세에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며, 이런 세계를 만들거나 예방 못한 신은 전능하지 못하다. 신이 전능하여 악을 예방할 수 있었으나 악을 예방하려고 하지 않았다면 그는 전선하지 못하다.”라는 ‘에피쿠로스 딜레마’를 내세우면서, 자신이 저지르는 악행을 면피하려는 간교한 술책을 교부가 분쇄한다.

세인들이 하느님을 피고처럼 몰아세우는 고통과 재앙을 ‘죄벌(poena peccati)’로, 인간이 저지르지 않을 수 있으면서도 저지르는 악행을 ‘죄악(peccatum)’으로 나누어 설명한다. 죄악은 인간이 장본인이고 죄벌은 죄악을 벌하시는 하느님에게서 온다. 그러면 정말 ‘악’이라 부를 만한 것은 ‘죄악’밖에 남지 않는다.

제2권은 “자유의지는 왜 주셨을까, 하느님의 예지로 미루어 인간의 범죄는 필연적인데?”라는 시비를 다룬다. 술이나 성욕을 악용할 수 있다고 해서 그것이 악하다는 말은 안 되며, 따라서 하느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주시지 말았어야 한다는 논리는 안 선다. 자유의지도 사용하기 나름으로 악용될 수도, 선용될 수도 있다. 자유의지의 사용 자체도 자유의지의 처분에 맡겨져 있으므로 자유의지 자체를 파괴하지 않고서는 자유의 악용이라는 위험을 제거할 길이 없다.

“그러면 의지가 하느님을 등지고 작은 선을 향해서 내리는 결단(이 결단이 곧 죄악)이 하느님이 아니고 어디서 기인하는가?”라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한다. “솔직히 우린 모른다. 악은 선의 결핍, 곧 무(無)다. 없는 것을 인간은 알 수 없다. 침묵을 들을 수 없고 어둠을 볼 수 없듯이….”

제3권은 본서의 주제대로, 자유의지는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며 “악은 피조물의 자유의지에서 발생한다.”고 설명한다. 인간으로서는 세상의 악이 자기에게 책임이 있다고 자인하거나, 오로지 신이나 운명이나 사회나 타인들의 탓이라며 손을 털 수 있다. 다만, 악이 인간에게서, 누구보다 자기한테서 발원한다고 인정하면 인간은 개인적 집단적 노력으로 악을 청산하는 길에 나설 수 있다. 선악이원론이나 숙명론이 얼마나 간교한 책임회피인지 알 만하다.


“달려가거라, 내가 안아 오리라!”

아우구스티노가 이 책에서 사변적 해답을 찾아냈지만 악은 여전히 신비로 남아 평생에 걸친 그의 탐구과제가 된다. “모든 죄는 당하는 사람보다 행하는 사람을 해친다.”(「교리요강」, 17)는데도 인간은 부단히 죄를 짓는다.

“나는 무엇이 더 나은지 알고 거듭 확인하고서는 결국 더 못한 것을 따르고 만다.” 로마 문인 오비디우스의 자백이다. 바오로 사도마저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라고 실토하지 않았던가?

인간에게 악이 있다는 것은 결국 우주의 불완전을 하느님이 용인하셨다는 의미다. 완전하신 창조주께서 창조물의 불완전을 두고 예견하신 처방은 그럼 무엇일까? 아우구스티노는 이사야서의 한 대목(46,4)에서 해답을 얻는다. “너희가 백발이 되어도 나는 너희를 지고 간다. 내가 만들었으니 내가 안고 간다. 내가 지고 가고 내가 구해낸다.”

인간 의지의 악용과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겨루는 가운데 달아나는 자기 등 뒤에 대고 하느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처럼 들렸다. “달려가거라! 내가 안아 오리라. 내가 데려오리라. 거기서 내가 안고 오리라!”(「고백록」, 6.16.26)

여기서 교부는 은총으로 시선을 돌리게 되고 그것이 교부의 인생 말년을 점철하는 ‘펠라기우스 논쟁’으로 이어진다. 선을 행하는 것도 은총이요 선을 하려는 마음을 먹는 것도 은총이요 죄를 죄로 깨닫는 것도 은총이요 뉘우쳐 용서받음도 은총이니, 사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성염 요한 보스코 - 1986년 교황청 살레시오대학에서 라틴문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주교황청 한국대사(2003~2007년)를 역임했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 등의 저서와 「아시아인의 심성과 신학」 등 많은 역서, 「신국론」, 「자유의지론」 등의 아우구스티노 주해서를 냈으며, 수십 편의 학술 논문을 발표했다.

[경향잡지, 201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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