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제4주일 (요한9,1~41)
고사성어에 군맹평상(群盲評象)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여러 맹인이 코끼리 평한다는 말로 이러한 고사성어가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다.
옛날 인도의 한 왕이 맹인들에게 코끼리를 만져 보게 하였다. 그리고 왕은 코끼리를 만져본 맹인들에게 질문을 한다.
"너희들은 코끼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
맹인들은 대답하지만 각자의 대답은 너무나 달랐다고 한다. 상아를 만져본 맹인은 코끼리의 모양은 무와 같다. 귀를 만져본 맹인은 키와 같다. 머리를 만져본 맹인은 돌과 같다. 다리를 만져본 맹인은 나무토막과 같다고 이야기하면서 서로 다투더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자기 경험하고 체험한 것만을 고집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 그리고 부분에 집착하여 전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더불어 좁은 식견을 가지고 어떤 사물을 잘못 판단하는 것을 비판할 때 곧잘 쓰는 고사성어인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에 나오는 6번째 기적으로서 태중 소경을 치유하는 기적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기적은 크게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자연이적사화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구마 치유이적사화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후자에 속하는 기적으로 이러한 기적들은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한다. 그러기에 태중 소경의 치유는 예수님의 사명이 인간의 눈뜸과 해방임을 보여주는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른 두 가지 해석이 나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태중 소경은 사회적으로도 약자요 하느님을 아는 지식적인 면에서도 부족하고 율법을 지키는데도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일이 하느님의 업적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분이요, 그분이 주님임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역사에 동참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 바리사이파 사람들, 스스로 지혜로운 사람이요 볼 수 있는 자라고 자랑하던 그들은 예수님의 일을 통해 하느님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결코 하느님에게서 올 수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분을 죄인으로 결론 지음으로 그들은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아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이러한 엇갈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먼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왜 이러한 결론을 내렸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안식일 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안식일은 유다인들에게 아주 의미있는 날로서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의미는 세상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던 것에서 유래하는 날로써 이날의 의미는 세상창조의 완성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집트에서의 해방이 이루어지던 날이 바로 이 안식일이다. 그러기에 이 안식일은 창조와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날을 경건하게 보내며 예배와 휴식을 통해 세상 창조와 이집트에서의 해방을 기념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이를 위해 이 날은 일체의 노동 즉, 농사나 추수 등 세속적인 활동을 금하였는데 그 금지사항이 39가지나 되었다 한다. 물론 이러한 법의 근본 목적은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사랑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바로 이 법을 예수님께 적용한다. 자기들이 알기에는 안식일을 경건하게 지내기 위해 일체 노동이나 병자를 치유하는 모든 행위가 금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엄하게도 흙을 개어 발랐기에 노동을 금하는 법을 어겼고 거기에 태중 소경을 치유하는 죄까지 지었다는 것이다. 즉,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결코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일 수 없다고 결론 짓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 안에 나타나는 태도는 법의 정신보다는 문자에 얽매이는 편협성과 아집, 부분적인 것에 집착하므로 전체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음, 타인을 비판함으로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교만, 자신들의 논리로만 세상을 보려는 자기 중심적인 태도, 그리고 잘못된 신념 등 우리 인간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복합적인 모습이 그들의 모습 안에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태중 소경의 모습은 30~31절까지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과 죄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근본 원리에 대한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이 그것이다.
바로 이러한 대조가 '진정한 눈뜸'을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아집에서 벗어나
고사성어에 군맹평상(群盲評象)이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여러 맹인이 코끼리 평한다는 말로 이러한 고사성어가 나오게 된 배경은 이렇다.
옛날 인도의 한 왕이 맹인들에게 코끼리를 만져 보게 하였다. 그리고 왕은 코끼리를 만져본 맹인들에게 질문을 한다.
"너희들은 코끼리를 무엇이라고 생각하느냐 ?"
맹인들은 대답하지만 각자의 대답은 너무나 달랐다고 한다. 상아를 만져본 맹인은 코끼리의 모양은 무와 같다. 귀를 만져본 맹인은 키와 같다. 머리를 만져본 맹인은 돌과 같다. 다리를 만져본 맹인은 나무토막과 같다고 이야기하면서 서로 다투더라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자기 경험하고 체험한 것만을 고집하는 인간의 어리석은 모습, 그리고 부분에 집착하여 전체를 보지 못하는 어리석음과 더불어 좁은 식견을 가지고 어떤 사물을 잘못 판단하는 것을 비판할 때 곧잘 쓰는 고사성어인 것이다.
오늘 복음은 요한 복음에 나오는 6번째 기적으로서 태중 소경을 치유하는 기적 이야기이다.
예수님의 기적은 크게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자연이적사화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구마 치유이적사화로 나눌 수 있는데 오늘 복음은 후자에 속하는 기적으로 이러한 기적들은 예수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한다. 그러기에 태중 소경의 치유는 예수님의 사명이 인간의 눈뜸과 해방임을 보여주는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똑같은 사람과 똑같은 사건을 두고 전혀 다른 두 가지 해석이 나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 치유를 받은 태중 소경은 사회적으로도 약자요 하느님을 아는 지식적인 면에서도 부족하고 율법을 지키는데도 그리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일이 하느님의 업적이라는 사실과,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분이요, 그분이 주님임을 고백함으로써 하느님의 위대한 구원역사에 동참하게 된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 바리사이파 사람들, 스스로 지혜로운 사람이요 볼 수 있는 자라고 자랑하던 그들은 예수님의 일을 통해 하느님을 보지 못할 뿐 아니라 예수님이 결코 하느님에게서 올 수 없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분을 죄인으로 결론 지음으로 그들은 그토록 대망하던 메시아를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고 만다.
그러면 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고, 무엇 때문에 이러한 엇갈린 결과가 나오는 것일까? 먼저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보자.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왜 이러한 결론을 내렸는가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안식일 법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안식일은 유다인들에게 아주 의미있는 날로서 두가지 의미가 있다. 첫째 의미는 세상 창조를 기념하는 날이다.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7일째 쉬셨던 것에서 유래하는 날로써 이날의 의미는 세상창조의 완성으로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이스라엘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이집트에서의 해방이 이루어지던 날이 바로 이 안식일이다. 그러기에 이 안식일은 창조와 해방을 기념하는 날이었던 것이다.
그러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날을 경건하게 보내며 예배와 휴식을 통해 세상 창조와 이집트에서의 해방을 기념하고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기 위해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이를 위해 이 날은 일체의 노동 즉, 농사나 추수 등 세속적인 활동을 금하였는데 그 금지사항이 39가지나 되었다 한다. 물론 이러한 법의 근본 목적은 하느님과 인간을 위한 사랑이었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바로 이 법을 예수님께 적용한다. 자기들이 알기에는 안식일을 경건하게 지내기 위해 일체 노동이나 병자를 치유하는 모든 행위가 금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무엄하게도 흙을 개어 발랐기에 노동을 금하는 법을 어겼고 거기에 태중 소경을 치유하는 죄까지 지었다는 것이다. 즉, 율법을 지키지 않았기에 예수님은 결코 하느님에게서 온 사람일 수 없다고 결론 짓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 안에 나타나는 태도는 법의 정신보다는 문자에 얽매이는 편협성과 아집, 부분적인 것에 집착하므로 전체를 잃어버리는 어리석음, 타인을 비판함으로 자신을 내세우고자 하는 교만, 자신들의 논리로만 세상을 보려는 자기 중심적인 태도, 그리고 잘못된 신념 등 우리 인간이 흔히 가질 수 있는 복합적인 모습이 그들의 모습 안에 그대로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비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태중 소경의 모습은 30~31절까지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하느님과 죄와는 결코 양립할 수 없다는 근본 원리에 대한 어린이와 같은 단순함이 그것이다.
바로 이러한 대조가 '진정한 눈뜸'을 위해 우리가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하나의 해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