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우파니샤드(Upanisad)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3:08

본문

 

우파니샤드(Upanisad)

 
고대 인도의 철학서. 바라문교(波羅門敎:Brahmanism)의 성전 베다에 소속하며, 시기 및 철학적으로 그 마지막 부분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에 베단타(Vedanta:베다의 말미·극치)라고도 한다. 현재 200여 종이 전해지는데, 그 중 중요한 것 10여 종은 고(古)우파니샤드로 불리며, BC 600∼AD 300년경, 늦어도 기원 전후에 성립된 것이다. 그후 10수세기에 이르기까지 만들어진 것을 신우파니샤드라고 하며, 모두 산스크리트로 씌었다.


우파니샤드의 원뜻은 사제간에 ‘가까이 앉음’이라는 의미에서, 그 사이에 전수되는 ‘신비한 가르침’도 의미하게 되었으며, 옛날부터 천계문학(天啓文學:sruti)으로서 신성시되었다. 인도의 정통 바라문철학의 연원으로서, 그 후 철학·종교 사상의 근간·전거(典據)가 되었다. 개개의 우파니샤드는 통일된 사상을 한 사람의 작자가 일정한 형식으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긴 세월에 걸쳐 편집·정비하였다고 생각되며, 베다 및 브라마나의 제식만능주의에 대한 반발을 담은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에 불교흥기를 촉진한 사상적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그 중에는 신·구의 잡다한 사상이 섞여 있으며 전체로서의 통일이 결여되었지만 그 근본 사상은 만유의 근본원리를 탐구하여 대우주의 본체인 브라만(Brahman:梵)과 개인의 본질인 아트만(Atman:我)이 일체라고 하는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사상으로 관념론적 일원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상의 형성 배경에는 창조관과 동치(同置:upasana)의 논리를 들 수 있다.


창조의 의미로 사용되는 스리스티(srsti)는 최고신의 2분에 의하여 자신의 일부를 방출(esrj )함으로써 창조자와 피조물이 동질적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우주적 실재와 개인의 구성요소를 대응시켜 불사(不死:amrta)를 탐구하였던 동치의 논리는 범아일여사상의 원형적인 사고를 보여 주는 것이다. 인간은업(業)에의해윤회를반복하지만선정(禪定:dhyana)·고행(苦行:tapas)을 투철히 하여 진리의 인식(brahma-vidya)에 도달함으로써, 윤회에서 해탈하여 상주·불멸의 범계(梵界:brahma-loka)에 이르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우파니샤드의 대표적인 사상가로서는 아트만을 만물에 편재하는 내재성으로서의 유(有:sat)로 주장하는 우달라카 아루니(Uddalaka Aruni)와 아트만을 인식주관으로서 불가설·불가괴(不可壞)한 것으로 주장한 야지나발키아(Yaj?valkya) 등이 있으며, 전자의 ‘네가 그것(아트만)이다(tat tvam asi)’, 후자의 아트만은 부정적으로밖에 표현되지 않는다는 뜻의 ‘그렇지 않다. 그렇지 않다(neti, neti)’ 등의 말은 유명하다.

 

 

우파니샤드의 뜻과 기원

 

우파니샤드(Upanisad), 즉 '가까이에 앉는다.'라는 뜻을 지닌 용어의 어근(語根)을 고찰해 볼 때, 거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무지(無知)를 없애는 것과 브라만에로 나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중적 의미 속에는 일찍이 비밀스런 가르침의 특징이 내포되어 있었다. 예컨대 교사가 되기 위하여 스승에게서 1년을 배우지 않는 학생에게는 그 가장 높은 비밀이 전해질 수 없었다. 가르침이 비밀스럽다는 이유는 우파니샤드의 어근을 분석해 보면 알 수 있다. 우파니(Upa-ni)와 샤드(sad)의 합성어를 분석해 보면, 샤드라는 '앉다' 앞에 접두사인 '우파니'가 '가까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어떤 사람의 가까이에 앉아 있는 다는 것은 일정정도의 학습기간에 스승의 가까이에 앉아서 가르침을 비밀스럽게 전수받는다는 의미를 생각 할 수 있게 한다. 이것은 인도의 전통적인 가르침의 방식과 관련이 있다.

 

이들의 전통적인 가르침의 방식은 숲에서 은밀하게 진행 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파니샤드는 숲속에서의 가르침을 담은 ‘밀림서(密林書)’ 즉 ‘아라냐카(?ranyaka)’의 사상과 맥을 계승하고 있다. 『아라냐카』는 원래 베다의 제의 해설서인 『브라흐마나』의 보충적 문서였지만, 『리그베다』의 본집인 『상히타』의 부록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숲에 속한다”라는 문자적인 의미를 지닌 『아라냐카』는 숲속의 은둔자들에게 제사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인간과 우주에 대한 신비적 사색을 하게 해 줌으로써 우파니샤드로의 길을 열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아랴냐카』에서 설명되고 있는 제의적 진술은 성스러운 것으로 여겨지고 있고, 적절한 자격 없이 어설프게 진행되는 부적절한 제의는 인간에게 위험을 초래 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그러기에 제자들은 마을에서 공공연히 배우는 것이 아니라, 숲속에서 은밀히 홀로 배워야 했다.

 

제의 문서인『브라흐마나』의 보충적 주석서로 출발한 『아라냐카』는 점차 제의를 비유와 상징으로서의 알레고리적인 방식으로 해석하게 됨으로써, 제의의 실제적인 해석을 제시하고자 했던 『브라흐마나』와는 점차 결별을 보이게 되었다. 그러나 이 둘 사이가 완전히 절연된 관계는 물론 아니고 제사에 관해 『아라냐카』는 더욱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경향으로 흘러갔다는 뜻이다. 특히 베다의 교훈에 따라 브라만을 학습하는 학습기(學習期, brahmacharya)와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해야 하는 가주기(家住期, grihashta)를 거쳐서 숲 속에 은둔하면서 철학적 사색과 경전 연구를 위해 은둔기(隱遁期, v?naprastha)에 접어든 사람들 곧 ‘바나프라스타(V?naprastha)’는 초기 우파니샤드보다 분명 시대적으로 앞선 개념이다. 바나프라스타는 문자적으로 “숲에 거주한다”는 뜻으로 힌두인의 일생의 4단계(?shrama, 아쉬람) 가운데 3단계에 해당한다. 마지막 4번째 단계는 이 은둔기를 지나 방랑걸식하며 브라만의 지식을 가르치는 ‘유랑기(流浪期, sanny?sa)’다.

 

밀림서인 『아라냐카』가 제의문서인『브라흐마나』보다 베다의 해석에 있어서 더 사색적이었던 것처럼, 이제는 『아라냐카』보다 한결 더 깊은 심오한 사색의 단계로 들어선 작품의 결실이 베다의 끝을 차지하는 베단타 철학 곧 우파니샤드로 탄생하게 되었다. 우파니샤드에게 주어지는 최대 공약수로서의 집약적 표현은 바로 우주와 인간의 근원적 자아인 아트만(?tman) 혹은 브라만(Brahman)의 본성에 대한 진술이다. 이 본성을 언급하는 우파니샤드의 표현은 종종 ‘비밀스런 단어(密語)’, ‘금언(金言)’, ‘비밀스런 본문(密本)’, 또는 ‘비밀스런 의미(密意)’로 제시된다. 그리하여 우주와 인간의 본성을 말함에 있어서 비밀스런 가르침의 형태는 다양한 비유를 통하여 나타난다.

 

그 가운데 부정적(否定的) 방식의 가르침인 ‘무엇도 아니고 무엇도 아니다’라는 뜻의 ‘네티 네티(neti neti)’의 양식은 아주 독특하다. 어떤 명제에 대한 진술을 함에 있어서 그 어느 것도 단정적으로 혹은 긍정적 형식으로 설명 되어질 수 없고, 오직 부정의 형식을 거쳐야 지고(至高)의 뜻이 드러날 수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 제 1장에서 “도를 도라고 하면 영원한 도가 아니고 이름 지어 붙인 것은 영원한 이름일수 없다(道可道非常道名可名非常名)”는 것과도 통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부정의 접근형식 외에도 존재의 ‘숨’ ‘죽음’ ‘탄생’의 뜻과 관련되는 ‘잘란(jal?n)’이라든지, “진리 가운데 진리”를 뜻하는 “사티야스야 사티얌(satyasya satyam)” 또는 “궁극적 목적”으로서의 “타드바남(tadvanam)" 같은 단어가 비밀스런 가르침을 이루는 주요 표현 양식이다. 물론 ‘옴(Om)’과 같이 우주의 비밀을 드러낸다는 독특한 신비적 표현도 사용되고 있다.

 

이 같은 우주와 인간의 본성에 대한 비밀스런 가르침을 전수하기 위해 베다의 스승이 제자에게 숲속에서 신비한 가르침을 전수했고 그것이 우파니샤드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었다. 『아라냐카』가 ‘밀림서’라는 이름에서 드러나듯이 ‘숲속에서의 교육’에 중점을 둔 것이었다면 『우파니샤드』는 점차 시간이 흐르면서 보다 깊은 신비적 사색의 결과물인 ‘텍스트로서의 가치’로 드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깊은 철학적 사색의 결과는 제사 중심적 바라문 계급의 산물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제의 계급을 어느 정도 부정하고 나선 왕족이나 무사(武士) 출신인 크샤트리아 계급이 주종을 이루었다는 점이다. 우파니샤드의 등장인물을 보더라도 전사(戰士)나 지혜로운 임금, 왕자, 그리고 귀족들이 지혜로운 가르침을 전수하고 있다.

 

예컨대 『찬도기아 우파니샤드』에서는 웃달라카 아루니(Udd?laka ?runi)가 5명의 학식 있는 바라문들에게 “깨어있는 상태의 아트만”(?tman Vaishv?nara)의 본성에 대하여 가르침을 주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깨어 있는 상태”라 함은 인간 의식의 4단계 중의 첫 단계로서 지능을 가지고 외계 사물을 판단하는 단계를 말한다. 그런데 웃달라카 자신도 아트만의 본성에 대해 참된 가르침을 줄 수 없는 한계를 깨닫게 되자 이들 6명은 모두 아쉬바파티 카이케야(Ashvapati Kaikeya) 왕에게 가서 참된 가르침을 받는다. 이처럼 『우파니샤드』는 기존의 제사 중심의 해설서인 『브라흐마나』를 중심으로 한 바라문의 전문적 권위가 지혜로운 왕이나 현자들의 수중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바라문적 사고에서 크샤트리아의 사고체계로의 이동은 제사 중심의 사고에서 벗어나고 있음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특히 윤회(輪廻)의 이론은 바라문의 사고이기보다 왕들 중심의 크샤트리아들이 제기한 사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바라문 계열에서 인정하지 않으려고 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인도인들도 잘 수긍하려고 들지 않는다. 오히려 크샤트리아 계급의 한가한 자랑에 지나지 않는 것이고, 기본적인 사상적 기초는 바라문에게 있지 크샤트리아 계급일 수는 없다고 보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파니샤드 본문이 지시하고 있듯이 왕과 전사 계급의 지적이고 철학적인 사색의 역할과 그 영향은 부인할 수 없다.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아트만-브라만의 교리는 이미 『브라흐마나』에서 그 사상적 맹아를 보였고, 『리그베다』의 사상에 대한 논리적 발전을 보여줌으로써 베다 사상의 전체적인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누구도 부인하지 못한다.

 

『우파니샤드』의 철학은 아리아인(Aryan)들의 것이라기보다는 인도의 원주민이었던 드라비다인(Dravidian)의 영향이 더욱 컸으리라는 주장도 종종 제기되고 있다. 그 이유로는 시간이 점차 경과하면서 드라비다인의 혈통이 아리아인들에게 더욱 확산되어 갔고, 아리아인들의 전투적인 기질보다는 드라비다족의 사색적 분위기가 『우파니샤드』의 내용과 더 일치된다는 주장이다. 뿐만 아니라 언어의 변화과정도 드라비다인들의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아직 입증 된바가 없기에 다만 상호 영향을 미친 정도로 밖에 이해 할 수 없다. 『우파니샤드』의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적 경향은 고대의 물활성(物活性)적인 정령론(精靈論)적 견해에서 출발하여 아리아인들의 신인동형론(神人同形論, anthropomorphic)적 자연신들과 대조를 보이면서 점차 하나의 철학적 결과물로 발전해 갔던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종합해 볼 때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사상의 끝을 이루는 것이지만 인도의 초기 사상에서 그 맹아를 보였던 것이고, 아리아인들과 드라비다인들(Aryo-Dravidian) 사이의 문화적 종교적 혼합 형태의 사상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우파니샤드(Upanisad) 학습

 


우파니샤드에 대해 먼저 기억해야 할 주요 단어는 두 개다. 아트만(我)과 브라만(梵). 이 두 단어가 가장 중심이 되는데, 이 단어들이 서로 상반되는 것 같기도 하고 일치하는 것 같기도 할 것이다. 그럼 차례차례 살펴본다.

 

우파니샤드의 중심적 관심사는 다음 세 질문 안에 반영되어 있다 : 내 존재의 그 깊은 심현처에서 나는 누구인가? 만유의 궁극적인 기초는 무엇인가? 그리고 가장 깊은 자아와 궁극 실재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파니샤드에 있는 명상과 사변의 결론은 자신의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심현처에서 모든 사람이 우주의 궁극적인 힘과 실재와 동일하다는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베다의 결론 부분으로 그리고 종전의 모든 성전의 진리에 대하여 최고이고 가장 심오한 선언으로 널리 인정받고 있다. 자아를 발견하는 자는 일체 세계들을 획득하며 불멸을 포함한 모든 욕망을 충족시킨다. 이런 해탈의 지식에 대한 관건은 의식의 과정과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범속한 자아와 이들 과정과 내용의 궁극적인 바탕인 자아 사이의 구별이다. 아트만과 브라만의 일치가 이런 의미에서 일맥상통하는 것이 아닐까. 물아일체(物我一體) 또한 이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재사에 이르면 불교도, 자이나교도, 사명외도는 베다의 제사 전통 전체를 거부했으나 우파니샤드 성자들 대부분은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실제로 이 세상에서 자신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길로서의 제사 행위를 용인한 것은 우파니샤드의 특성이 되는 지식의 길을 먼저 예비한 것이었다. 제사의 길은 리타 즉 근본적 리듬이며 규범인 리타 안에 바탕을 두고 있고, 리타로 통제되고 있는 존재에 대한 비전 안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은 상기해 볼 필요가 있다.

 

리타는 우주 안의 만물을 제어했다. 그것은 힘 중의 힘이며 신마저도 초월했다고 나온다. 이에 발전하여 브라만(위대한 창조력)이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되는데 존재의 기초적인 바탕이자 힘인 브라만, 그 브라만에 대한 추구는 중요한 우파니샤드의 탐색이 되었다. 우파니샤드의 또 다른 모색, 즉 궁극 자아에 대한 모색도 역시 그 뿌리는 제식적 전통과 재사라는 문제의 등장에 두고 있다.  

 

자아에 대한 이념들로 들어가 보면 흥미로운 얘기들이 나온다. 우파니샤드의 중심적 물음은 ‘죽음에서 살아남고, 삼사라에서 해탈할 수 있는 자아란 무엇인가’라는 것이다. 가장 가능성 있는 후보들은 물, 호흡, 불, 지식이다. 이들 제각기는 인간 생명에 불가결의 것이며, 영속적이며, 그리고 삼사라 이념이 필요로 하는 많은 형상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다. 먼저 물을 살펴보자. 이는 서양 철학사 최초의 철학자인 탈레스를 생각하게 한다. 만물의 근원을 물로 보았던 탈레스와 비슷하게 물로서 ㅡ 이 자아 이론은 물이 생명에 필수적이며 그것이 삼사라 이론이 요구하는 다양한 형상을 취할 수 있을 정도로 미세하다.

 

호흡으로서의 자아는 호흡이 없으면 죽으므로 그것이 생명의 기반으로 여겨질 수 있었다.호흡이 죽어가는 사람을 떠나면 그것은 모든 생명 기능을 함께 가지고 가며 편재하는 바람 안에 있는 집으로 그 사람을 데려간다고 여긴다. 불로서의 자아는 의심할 여지없이 제화의 이념, 즉 천계의 신들에게 제물을 날라다주며 야즈냐를 통해 음식 제물을 약속된 새 생명으로 변화시킨다는 제화의 이념과 연결된 것이다.생명이 육신을 떠날 때 육신이 차거워 진다는 관찰과도 역시 연결되어 있다.

 

지식으로서의 자아는 아트만이라는 이념을 가능케 한 것이다. 해탈의 길은 자아와 지식을 동일시함으로써 자연히 제사 행위 위의 지식을 강조했으며, 그리하여 지식의 길이 탄생되었다. 호흡,물,불로서의 자아 이념들은 가장 깊은 자아를 존재의 궁극적인 힘과 바탕과 상호 동일시할 수 있는 길을 이미 마련해두었으므로 지식이라는 본성을 갖는 자아를 브라만과 동일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었다.지식의 위력은 모든 위력들 가운데 가장 위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부터는 우파니샤드의 중심 개념인 아트만과 브라만을 집중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각 개별적인 우파니샤드는 수많은 다른 견해들,때로 상반된 견해들을 가지고 있다.만유의 궁극적인 바탕으로서의 브라만에 대한 모색 그리고 브라만과 개인적 존재의 궁극적인 바탕인 아트만과의 최종적인 동일시는 여기서 분명히 제시된다.브라만은 우주의 바탕이자 불가멸이고 궁극적이기 때문에 다른 무엇으로 환원될 수 없다.브라만은 언어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언어를 가능하게 하는 힘이고 마음이 생각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마음이 생각할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브라만은 만유의 근원이고 지탱하는 힘과 생명이며 심정안의 자아이다.이에 반해 아트만은 다른 곳이 아니라 오직 지식에만 있으며,자아 지식의 경우에는 자아가 만물이므로 별도로 알아야 할 대상이 없다. 순수지성으로서의 자아와 세계의 바탕과의 일치를 확언하는 야즈냐발크야의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것들은 동일하므로 아트만이 브라만을 알게 되는 일에는 문제가 있을 리 없다. 이 범아는 순수지성의 본성을 지니게 되며,범아의 충만과 순수가 실현되면 그때에는 만물이 무매개적으로 자연적으로 아트만 자신의 빛에 의해 조명된다. 

 

우파니샤드는 존재의 영적인 기반을 추구하려는 인간적 노력의 탁월한 증거이다.사람들 각자 안에 내적 자아가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바탕과 동일하다는 발견을 통해,우파니샤드는 제사의 길로부터 지식의 길로의 이행을 표징하고 있다.브라만은 만유의 궁극적인 바탕이고 근원이고 버팀목이며 만물의 회귀점이다.그러나 그것은 존재의 온갖 형상에 선행하여 어떤 다른 것으로 환원될 수도 없고,어떤 다른 것을 빌어 적절히 정의할 수 없으므로 어떤 범속한 방식으로 알려질 수도 없다.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