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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요가 사상과 역사

인도철학

by 巡禮者 2015. 4. 14.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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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의요가

 

 

인도는 세계의 지붕이라고 불리는 히말라야 산맥을 배경 삼아 삼각형 모양으로 남쪽을 향하여 길게 뻗은 반도 국가이다. 그 곳에는 수많은 종족들이 다양한 언어와 생활 습관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다. 백색 인종과 흑색 인종의 피가 섞인 그이들의 모습만큼이나 살아가는 방식도 천태 만상이다. 인도는 지구의 지각 변동이 일어났을 때 아프리카 대륙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가 아시아 대륙에 부딪치면서 생겼다.

 

그때 충격으로 히말라야 산맥이 생겨났고, 검은 피부의 사람들이 이 지역에서 살아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뒤 아시아 대륙 북서쪽의 카프카스 지방에서 남서쪽으로 옮겨 간 아리아 사람들이 들어왔는데 초기에 정착한 사람들과 혼혈을 이루면서 오늘날의 인도사람의 모습을 하게 된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고통을 넘어

예로부터 인더스 강과 갠지스 강 유역은 비옥한 평야를 터전 삼아 풍요로운 생활 속에서 찬란한 문화를 꽃피워 왔다. 그리고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에 세계에서 가장 큰 히말라야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기 때문에 그이들만의 고립된 문화를 가질 수 있었다. 그래서 중국과 붙어 있으면서도 그이들과 확연히 다른 문화를 만들어 냈다.

 

그뿐 아니라 북위 팔 도에서 삼십칠 도에 걸쳐 펼쳐진 드넓은 대륙은 다양한 기후 조건을 만들었다. 추운 곳이 있는가 하면 아주 더울 때 오십 도까지 오르는 열대성 기후를 가진 곳도 있다. 따라서 그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런 기후 풍토에서 살아가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밖으로부터 닥쳐오는 자연 현상들을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찾으려 했다. 사람의 힘으로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자연 현상은 오늘날에도 속수 무책인 경우가 많다. 여기서 인도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모색했던 것이다. 맨 먼저 토착민들은 바깥 세상의 초자연적 능력과 자신들의 초인간적 능력이 조화를 이루면 어떤 고통이 닥쳐오더라도 극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북서쪽 지방에서 이주해 온 아리아사람들은 토착민들의 지혜를 응용하여 그이들 나름대로의 길을 찾았다. 그래서 생긴 것이 베다의 철학이다.

 



Statue of Shiva performing Yogic meditation

 

 

 

내면의 수련을 통한 우주와의 조화

흔히 베다는 자연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주제로 한, 인류 최초의 문학이라고 한다. 당시 사람들은 이 세상에는 하늘과 공간과 땅에 각각 그 곳을 다스리는 신들이 있다고 믿었다. 그 신들은 신성함을 갖추고 있으면서 죽지 않는 존재였다. 이 신들은 정의를 수호하며, 적들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 있으면서도 인간다운 면들을 가지고 있었다. 예를 들어 술에 취하기도 하고,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기뻐하기도 했다. 또한 노래와 음식을 즐기며 생활을 하는, 사람과 비슷한 신들이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는 것과 같은 대접을 그이들에게 하면 모든 소원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등장하는 것이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아타르바베다>이다.

 

<리그베다>의 등장은 기원전 십 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리그베다>는 자연을 지배하는 신들을 찬양하는 노래를 실은 것이다. 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승려가 신들을 제단에 모셔다 놓고, 찬양하면 자연의 재앙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사마베다>는 신들을 초대하여 시와 노래를 통해 기쁘게 하기 위한 노래를 말한다. <야주르베다>는 기쁨에 가득한 신들에게 여러 가지 공양물을 바쳐 기쁨을 더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아타르바베다>는 여러 방법으로 신들을 기쁘게 한 다음 자신들의 소망을 빌어 재앙을 물리치고, 신들로부터 오는 저주를 막기 위한 것이다. 이와 같은 믿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어느 대륙 어느 지역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인류 믿음의 시작이었다.

 

인류의 정신 세계를 이끌어 오던 이런 생각은 점점 철학적이고 실천적인 것으로 바뀌어 간다. 인도 사람들은 베다의 가르침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인간 사회에 사성 계급을 만들어 내,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의 네 부류로 나누었다. 이와 같은 사고는 신과 대화를 할 수 있는 브라만 계급의 위치를 굳게 하고, 나라를 다스리는 크샤트리아들이 그이들을 뒷받침하며, 경제 활동을 하는 바이샤 계급이 그이들을 경제적으로 지원토록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천민 계급인 수드라들은 노동력을 제공하면서 나름대로의 성취감을 가지도록 했다. 이 계급들은 종속 관계에 있는 듯하면서도 모두가 신들을 위한 집단이었다. 자기에게 맡겨진 일들에 충실함으로써 신들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다음에 더 나은 세상에 태어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대가 흐름에 따라서 다양했던 신들은 하나의 우주 주재자에 의해서 지배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주재자는 모든 신을 통괄하는 우주 원리를 신격화한 브라만이다. 그러니까 브라만이라는 제사장들을 통하여 각양 각색의 신들에게 부탁하던 기원을 자신의 내면 수련을 통하여 얻어 보자는 것이었다. 여기서 나온 것이 우파니샤드 철학이다. 곧 우주의 원리이자 주재자인 브라만과 자신을 주재하는 아트만이라는 소우주의 원리가 조화를 이루면 곧 모든 고통을 없앨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요가는 해탈을 위한 수행법

 

요가의 기원은 인도 문명의 발생지인 하라파와 모헨조다로 유적에서 찾을 수 있다. 십구 세기 인도 유적 발굴단이 발견한 많은 유물들 가운데 명상을 하는 모습의 진흙 조형물이 발견된 일이 있다. 그것이 만들어진 때는 기원전 삼천 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것이 수행법으로 체계화된 것은 이천오백몇 년 전이며, 그 내용들이 경전으로 만들어진 것은 천오백 년 전의 일이다. 요가의 명상 수행법은 불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종교 쪽에서 수행 이론은 상키아 학파의 것을 받아들였다.

 

요가는 관념적인 사상 체계가 아니라 체험과 실천을 바탕으로 신체 훈련과 정신 정화를 목표로 한, 해탈을 위한 수행법이다. 요가는 자신에게 닥쳐오는 괴로움을 자기 안에서 찾고 스스로 해결하는 방법을 제시한다. 몸과 마음의 속박에서 벗어나 대자연에 그대로 몰입함으로써 절대 경지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있는 것과 없는 것을 초월한 공의 상태, 원하는 것도 없고, 술수도 없고, 흔적을 남기는 마음도 없는 세계를 추구한다. 그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져 버리고 더 커다란 대상에 들어가는 절대적 기쁨을 얻은 상태다. 마음 속에서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몸에는 한 점의 부조화도 없는 상태로 자신이 절대가 되는 특수한 체험이다.

 

조화와 통일을 의미하는 요가는 참 나를 발견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참 나를 발견하면 거기서는 위대한 힘과 지혜가 떠오른다. 요가는 위대한 힘과 빛나는 지혜를 자신의 내면 세계에서 찾으려 한다. 그래서 요가는 어떤 종교와도 대립한 적이 없고, 오히려 여러 종파에서 요가 수행법을 받아들이는 일도 많았다.

 


A sculpture of a Hindu yogi in the Birla Mandir, Delhi


 

요가 수련의 여덟 가지 단계

 

요가는 현실 세계와 절대 세계를 긍정하며, 현실 생활 속에서의 해탈, 절대계와 하나가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목적을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해서 요가 수행법이 체계화된 것이다.

 

요가는 해탈에 이르는 기술을 가르친다. 해탈은 몸과 마음이 속박에서 벗어난 상태이다. 이 상태는 "몸과 마음의 활동 균형이 완전히 이루어져서 생명이 자유롭게 활동하고, 몸과 마음의 혼이 형태로 나타나는 현상, 형태 속의 깊은 무형의 활동력이 조화를 이루어 통일되고, 절대 생명이 그대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 상태를 깨달음의 단계라고 한다. 절대 생명의 자유와 이것의 무한함을 깨닫는 것이다. 절대 생명은 체험할 수 있을 뿐 말로 나타낼 수 없다. 이런 체험에 이르는 방법은 여섯 종류가 있다. 곧 즈냐나요가는 이성을 개발시키는 방법이고, 바크티요가는 감정을 순화시키는 방법이며, 라쟈요가는 심리 상태를 조절하는 방법이다. 크리야요가는 몸을 훈련하는 방법을, 만트라요가는 밀교의 수행을, 카르마요가는 사회 활동을 통해 절대 생명을 체험한다.

 

요가 수련에는 여덟 단계가 있다.

첫 번째 단계는 마음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하여 마음을 흩트리는 원인이 되는 것을 일체 금하는 것이다. 살생을 할 때 가려서 하고 다른 사람의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 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을 속이지 않으며, 이성에 흑심을 품지 말고 문란한 성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필요한 것 이상으로 탐내는 마음을 가지지 않는다. 이런 초보적인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몸과 마음의 균형을 조절하며 몸과 마음에 장애가 되는 것을 전혀 하지 않는다.

 

두 번째 단계는 마음을 깨끗이 하고 늘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온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서 필요한 것들을 행하는 것이다. 곧 깨끗한 마음, 만족할 줄 아는 마음, 질서를 지키며 이치에 따를 줄 아는 마음, 올바른 도리를 배우려는 마음, 이 세상은 우주의 원리 속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성을 살리면서 진리에 따라 삶을 살아가는 기본이 된다.

 

세 번째는 몸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몸가짐과 태도는 몸과 마음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바르지 않은 자세를 하고 있을 때는 반드시 무리가 뒤따르며, 서서히 신경을 마비시켜서 체액을 제대로 분비하지 못하게 하며 피의 순환을 막는다. 그리고 뼈에 무리를 주어 근육을 지나치게 긴장시킨다거나 풀어지게 하여 내장을 압박하고 제자리를 잡지 못하게 하는 등 여러모로 몸에 장애를 일으킨다. 바른 마음을 바탕으로 해서 바른 자세를 가질 때에는 몸과 마음이 조화를 이루며 온몸이 조화로운 활동을 한다. 이때 몸과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다.

 

네 번째는 식사법과 호흡법이다. 우리들은 생명 에너지를 음식물과 공기를 통해서 흡수한다.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생명 활동의 원동력으로 삼는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먹는 방법, 호흡하는 방법이 바르냐 바르지 않느냐에 따라서 생명력의 활동성을 좌우하게 된다. 생명은 균형을 유지하는 활동이기에 균형을 유지하는 방법이 필요하다. 요가의 식사법은 균형의 영양학이다. 편식을 하면 혈액이 어느 한쪽에 기울어져서 생체 반응에 이상이 일어날 수 있다. 음식물에는 평형을 파괴하는 움직이는 에너지가 강한 것과 평형을 유지하는 조용한 에너지가 강한 것이 있다. 그래서 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흔히 영양은 먹는 것 자체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만 영양은 먹은 음식을 흡수하고 소화하며 중화시켜 배설하는 것까지를 말한다. 식탁에 올려 놓은 음식들이 아무리 많은 칼로리를 포함하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자기 것으로 만드는 힘을 가지지 못한다면 단지 그것을 배설물로 만드는 것일 뿐이다. 그런 사람은 배설되기까지의 중간 과정에서 분해물이 독성을 품어 장해를 일으키는 일이 많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먹는 것은 전부 영양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생체는 필요 이상의 것을 흡수하지 못하게 되어 있다. 진정한 영양은 조금 먹고 그것을 완전히 소화 흡수시킬 수 있는 몸의 활동이다.

 

무엇을 먹어야 할까는 그 사람이 그때 그 장소, 곧 생활하고 있는 장소에서 생산되는 것 가운데에서 적절한 것을 선택해야 한다. 생명력이 강한 것, 자연 속에서 나오는 것, 조리하지 않는 것, 잎, 줄기, 뿌리, 열매 들이 갖추어진 완전식, 가공되지 않은 것을 선택해야 한다. 그러나 사람은 잡식성이며, 요리를 해서 먹기 때문에 감수성을 떨어뜨린다. 그것을 나아지게 하려면 때때로 단식이나 절식으로 과식이나 편식의 습관을 고쳐야 한다.

 

다음에 호흡법은 물리적으로 횡격막의 위아래 운동과 복부의 긴장 이완의 상호 운동으로 내장 체조를 함으로써 산소를 공급하고 탄산가스를 내뿜는 일을 하게 한다. 생리적으로는 산소의 공급에 의해서 신경과 분비선의 활동을 강화시키고, 해부학적으로는 자세를 교정, 심리적으로는 감정을 조절하는 생명 운동의 중요 부분이다. 요가 수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푸라나야마법이다. 푸라나야마는 우주에 한없이 떠다니는 생명 에너지인 푸라나를 푸라나야마라고 하는 특수한 호흡법으로 흡수하여, 쿤바크라고 하는 호흡 유지법으로 자기 것으로 만들고 몸 안에 저장, 필요할 때에 자유롭게 꺼내 쓰는 것이다.

 

다섯 번째는 감각을 조절하는 것이다. 우리는 생활 속에서 감각 기관의 동요에 속박되고, 진정한 나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할 때가 있다. 요가 수행에서는 이 감각 기관이 어지러운 것을 그릇된 것으로 보고 참 나와 진실을 찾으려 한다. 대뇌와 소뇌도 감각에 따라서 활동한다. 생명에 진정한 휴식을 취하게 하기 위해서 대뇌와 소뇌에 자극을 피하게 해야 한다. 거기에는 적극적인 차단법과 소극적인 차단법이 있다. 소극적인 방법은 인공 동면 상태가 되는 것이고, 그것은 조용한 곳에서 호흡법을 행하는 것이다. 적극적인 방법은 어디에서나 평정 상태를 유지하는 몸과 마음을 기르는 방법으로, 적극적으로 부딪혀서 적응력을 키워 가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이루어진 상태를 부동심이라고 한다.

 

앞의 다섯 단계에서는 주로 몸의 수련을 강조했다. 이것은 요가의 목적 달성을 위한 준비 단계로서 주로 몸의 단련을 뜻하며 흔히 하타요가라고 한다. 그리고 앞으로의 세 단계는 마음의 수련을 주로 하는 라쟈요가이다.

 

여섯 번째로 정신을 한 곳에 집중해서 감수성을 향상시키는 심신 통일 수행법이 있는데 호흡, 코끝, 단전 들에 마음을 집중하는 방법이다. 생물의 생존은 감각과 반응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자극이 있어도 그것을 자극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일도 있다. 건강하기 위해서는 바르고 예리한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 감수성을 잃으면 바르게 반응하고 적응할 수 없기 때문에 바른 삶을 유지할 수 없다. 하나의 자극에 대한 반응이 다른 자극에 영향을 끼치게 되고, 차례로 영향을 미쳐서 온몸이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이 자극과 반응의 균형을 취하는 것이 건강이다. 자극과 반응의 불균형이 몸의 부조화 상태이며, 이 부조화에서 평형으로 돌아가려 움직일 때 이상을 느낀다. 이것이 병이며 고뇌이다. 곧 살아 있다는 것은 늘 평형 상태에서 활동한다는 것을 뜻한다.

 

같은 자극일지라도 느끼는 정도에 따라서 반응이 다르다. 같은 자극일지라도 주의를 집중하면 느낌이 강해지고 주의를 게을리하면 약해진다. 몸과 마음이 느슨해져 있을 때와 호흡이 깊고 안정된 상태에서도 감수성은 예리해진다.

우리 몸에서 느끼는 활동을 하는 것은 신경이고, 신경이 느끼게 해 주는 것이 생명 에너지인 푸라나이다. 요가에서는 이 푸라나를 모으기 위해서 푸라나야마를 수련한다. 그것은 몸과 마음을 통일하기 위해서 모든 세포가 한결같이 하나의 목적을 향해서 움직이게 하는 호흡, 의식 집중이 필요하다. 바른 자세란 몸의 구석구석 힘이 두루 미치고, 마음이 안정되어 있는 상태이다. 단전 호흡은 깊고 조용한 호흡을 리드미컬하게 행하는 것이고 횡격막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복부가 앞뒤로 움직이는 상태이다. 의식 집중이란 의식 밖에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이다.

 

이런 훈련을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방법을 취하면 된다.

먼저 바른 자세를 취하고, 눈을 크게 뜨고 깜빡이지 않으며 주의를 집중한다. 슬며시 감은 눈을 할 때에는 코끝, 단전, 눈썹 들에 의식을 집중한다. 그리고 혀를 입천장에 붙이고 숨을 한곳에 모은다.

 

일곱 번째는 깊은 사색에 들어가는 단계인데 이를 "정려"라 한다. 정려란 무념 무상의 상태에서 대상과 완전히 하나가 되어 바르게 그것을 감수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의식 집중을 통해 무심에 이르는 방법과 대상을 전혀 가지지 않고 좌정과 선성을 거쳐 무심에 이르는 방법의 두 가지가 있다. 사물의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평정심, 평형체가 아니면 안 된다. 평정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대립, 무조건이 아니면 안 된다. 욕구에 집착하고 차별을 가지면 마음이 흐트러진다. 있음과 없음을 초월한 상태, 곧 공의 상태로 되기 시작하여 전체를 취하는 마음과 몸이 되는 것이다. 전혀 장애가 되는 것이 없기 때문에 마음 속에 사물의 진실이 그대로 투영된다. 이 경지는 무정하거나 긍정하는 것을 넘어서서 몰입하는 것이다. 요가에서는 이 상태를 열반(니르바나)이라고 하며 열반에 들어가기 위한 수행법을 쟈나라고 한다. 그러나 이 경지에서는 자신의 마음과 대상이 하나로 되었으면서도 얼마간의 구분이 있다고 한다. 여기서 여덟 번째 단계인 삼매가 필요하다.

 

여덟 번째 단계는 삼매와 열반에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는 자기를 중심으로 한 모든 것이 사라지고 대상만이 빛난다. 대상과 내가 하나로 된 경지에서 더 나아가서 진실만 빛나기에 이르는 것이다. 이때에는 우주의 진리와 생명력이 그대로 자신의 의지로 활동하는 것이고, 살아가는 방식이 그대로 자연의 리듬과 일치하는 것이다. 이것이 요가 최고의 수행법이다. 이때에는 현상적인 원리들은 사라지고 실재만이 빛난다. 자신의 안에 들어 있는 영의 성질을 지닌 아트만이 우주의 영성인 브라만과 완전히 일치한다.

 

종파를 넘어 실천으로

인도 사람들은 그 머나먼 옛날에 자기를 떠나서는 그 무엇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고 자기 본래의 모습을 개발하려고 노력했다. 그 본래의 모습을 감추고 사는 것이 부자연스런 생활,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생활이라고 생각했다. 사람은 태어나서 어떤 형태로든 생활을 유지하다 어느 때엔가 죽는다. 모두 자연의 이치이다. 그러므로 건강과 행복은 자연 속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은 불필요한 존재를 허용하지 않는다. 자연 현상은 조화를 유지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은 모두 이 우주에서 필요로 하는 것이고 모두가 절대 가치와 사명을 띠고 있다. 요가 수행을 하는 이는 이 사실을 깨닫고 모든 것이 선하다고 받아들인다. 그러므로 거부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 무대립, 무조건, 무저항심에서 모든 것을 인정하며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활용해서 자기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로움을 가리켜서 불교에서는 "반야"라고 한다.

 

근세에 들어 바깥으로부터 이슬람교, 기독교 들이 들어오면서 인도의 많은 종파에서도 자기 반성 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힌두교에서도 자기 반성과 함께 고유 문화를 다시 바라보는 작업이 이루어졌는데 이런 과정 속에서 요가도 전통 방법을 복고함과 동시에 새로운 요가 전개 운동이 나타났다.

 

라마크리슈나 또한 이런 운동을 펼쳤는데, 그이의 중심 사상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것이 본질에 있어 같으므로 요가를 통하여 모든 종파를 초월하자는 것이었다. 각자가 요가를 통하여 절대자와 하나가 되는 "바크티요가"가 그이의 주된 수행법이었다. 그이는 신은 바깥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자신의 마음 속에서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신을 보려면 마음이 순결해야 하며 자아 의식을 없애야 한다고 했다. 그이에 따르면 신은 어떤 종교 이론이나 의식에 따라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험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신을 경험하고 나면 세상의 모든 것이 신이고 그 가운데서도 사람은 가장 신을 닮은 모습이라고 했다. 나아가 어떤 종교의 교리에도 구애받지 않고 요가를 통하여 종교의 순수한 본질을 깨닫는 것이 그이의 목표였다.

 

그이의 사상을 이어받은 비베카난다는 더 적극적으로 생각하여 사람은 신의 모습을 하고 있으므로 사람에게 봉사하는 일이 곧 신에 대한 숭배라고 주장하며, 고통받는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이 종교 수행이라고 했다. 그이의 교파는 인도 여러 곳에 사원, 수도원, 학교, 병원 들을 가지고 사회 봉사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