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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박사 회고록 /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프란치스칸

by 巡禮者 2012. 10. 15. 1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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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석장면 " 한알의 밀이 죽지 않고는 "

 

서두(序頭)에

 

나는 이미 끝난 사람이다.

정계에서 물러선 지 어언 6년, 이날 이때까지 침묵의 세월로 살아왔을 따름이다. 이미 끝나 버린 사람을 두고 세상은 그동안 지나친 관심과 호의를 베풀어 주었다.

특히 군사 정권은 부패와 무능과 구악의 대명사로 우리 민주당을 해치웠거니와

우리는 그것이 허위든 사실이든, 어떠한 악선전에도 불구하고 침묵을 지켰다.

역사는 일시적인 승자를 위한 것만은 아니며, 장구한 세월이 흘러가는 동안에

사실(史實)의 진실성을 가려내고야 마는 법이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 때문에 괴로움을 되씹으면서도, 그동안 아무 말도 하지않았다.


정작 왜 할말이 없었겠는가. 말할 때가 아니고, 말해서 우리 국민에 대한 과오나 역사에 대한 책임이 속죄되리라고 생각되지 않았기 때문에 운명적인 침묵을 지켰던 것이다.

의로운 민주 혁명 4·19

 

태극기를 들고 경무대로 향하는 시위대
 
“학원에 자유를 달라”라는 주장을 내세우고, 국민의 자유와 민권의 수호,
조국의 민주주의를 절규한 데모를 계기로 발단된 반독재 봉기는 이승만 정부의 독재성과 부패성을 규탄하는 전국민의 음성적인 분노가 가속화되어 폭발점으로 휘몰아가던 차에, 저 몸서리치는 3·15의 살인적인 폭력 선거에 이르자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어 마침내 3·15의 제1차 마산 의거 사건을 일으키게 되었고, 잇따라 제2차 마산 의거, 4·18 고대생 데모로 진전하게 됨으로써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한 양성화된 공연한 전면 항쟁으로 변해 가고 말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역사적인 4월 19일에는 전 서울의 대학생들의 결정으로 의거가 일어나자, 무자비한 독재 정권의 일부 경찰은 이 정의에 불타는 순수한 조국애의 대열에 발포를 감행하여, 수백의 어린 생명을 살해하면서까지 독재배(獨裁輩)들은 부패 정권을 집요하게 연명시키려고 헌법에 위배되는 비상 계엄령을 선포하고 최후 발악적인 탄압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절정에 달한 전 학생, 전국민의 민권 수호의 함성은 총검을 무서워하지 않고 독재 정권의 최후적 붕괴를 재촉하였고, 5일 밤의 대학 교수단의 데모를 앞장 세운 전시민의 철야 데모는 마침내 12년 간의 이승만 독재 정권 파멸의 마지막 마무리를 맺고 말았던 것이다.

 

수천의 희생자를 내기는 하였으나 이렇게 하여 세계 사상에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평화로운 민주 혁명은 이루어졌고, 국민은 책임 정치가 기약될 희망에 가득 찬 내일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진실로 4·26의 민주 혁명은 현대 민주주의의 승리요, 민권의 승리요, 조국의 영광이 아닐 수 없다.

 

이제 이 민주 혁명을 전기로 한 민주 세력의 집결로써 우리는 공산 전체주의를 괴멸시키고 남북한을 통일시켜 조국을 세계의 어느 강대국에 못지 않은 복된 나라로 이룩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번 민주 혁명을 주도한 전국의 학생 제군과그들의 사기를 고무하는데 항상 용감하였던 언론 기관과 음으로 양으로 그들에게 정의의 투쟁을 격려한 교육자, 문화인 그리고 이 혁명 사업에 과감하게 가담했던 시민에게 영광이 있기를 빌며, 한편 반독재 투쟁에 있어서 오랜 동안 용맹한 항쟁을 계속해 온 민주당 당원 동지와 야당 동지들의 수난의 경력을 찬양한다.


III.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일반의 의혹을 해명하며

 

 8개월 간의 민주당 집권을 통하여 일반 국민에게 남긴 인상이 반드시 소위 ‘무능’과 ‘부패’일까? 혹자는 감투 싸움이 빚어 놓은 추태로 말미암아 국민의 신망을 잃고 말았다는 말도 한다. 당내 신.구의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아 감투 싸움이라는 인상을 주었는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부패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반공법과 데모 규제법을 두고 2대 악법이라 하여 이를 반대하는 여론이 비등했고 급기야는 혁신계의 ‘횃불 데모’까지 일어났다. 물론 불순 세력의 가담도 있었고 옆에서 이를 충동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이로 인해 외면상으로는 정권이 흔들린다는 인상, 다시 말하여 무능하다는 말을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걷잡을 수 없이 질서가 문란해지도록 방치하지는 않을 계획이었다. 항간에 유포된 3월 위기설이니, 4월 위기설이니 하는 가운데서도 질서를 바로잡을 자신이 서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조금만 더 국민 스스로가 자중하기를 기대하였다. 어디까지나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허용하는 범위 내에서 법으로 다스리되 그래도 국민 스스로가 자숙하지 못하면 최후 단계의 강격책을 발동할 생각이었다.


‘무능’을 탓하지만, 국민들도 이제는 지나친 데모 소동에 염증을 내게 되고 이성에 돌아가 정상적인 질서를 원하게 되어 우리의 그러한 대책에 점차로 협조해 주기 시작했다.



1961년 봄철이 지나서는 격심한 혼란은 수습 단계로 들어갔다.


물론 데모로 시작하여 데모로 날이 저문 때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5.16 직전에 이르도록 데모가 매일같이 일어난 것은 아니며, 설혹 무절제한 행동이 일어난다 해도 그대로 방치하고 있을 정부도 아니었다.


무엇으로 인해서 민주당 정권이 구악과 부패, 무능의 표본으로 악선전 되었는지는

현명한 국민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과연 전국민이 민주당을 증오했으며 정권이 무너지기만 바랐던 것이었던가. 두고두고 하느님이 심판하실 일이다.

 

 

Ⅲ. 제2공화국 정치 백서 - 8개월 집권 자가 비판

 


12년 간의 독재에서 벗어난 전국민은 새 민주당 정권에게 큰 기대를 가졌다.

자유당 치하에서 억압되었던 자유가 민주당 정권에서는 그 공약한 바를 지켜 완전히 허용될 것을 국민들은 바라고 있었다.

 

사실 민주당 정권은 이 공약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자유를 누리려는 국민의 의욕을 막을 수 없었다. 또 막아서는 안된다.

민주당이 4월 혁명의 선도적 역할로 그 길을 닦은 것은 엄연한 사실이지만, 직접 혁명의 주체가 되어 정권을 쟁취하거나 이양받은 것과는 구분된다. 이것이 국민에게 강력한 시책을 강구하지 못한 이유의 하나가 되기도 한다. 경찰은 4월 혁명 때 발포자라는 좋지 못한 인상과 부정 선거의 주구라는 누명을 벗지 못한 채, 국민으로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어 있던 관계로 처음부터 강력한 치안력을 발휘하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과분한 자유를 얻은 각 개인과 단체는 먼저 언론계를 비롯하여 제각기 자기의 주장을 내세우는가 하면, 노동 단체를 위시한 각 단체의 시위가 혼란을 끝없이 조장시켰다.

 

4.19 이후 누가 정권을 잡아도 이러한 혼란을 면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적어도 자유 민주주의를 외면하고 총칼로 억압하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그렇다.


이러한 여건 속에서 부정 선거 원흉과 발포자에 대한 처형에 이르기까지 피해자인 국민들은 강경히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며 음으로 양으로 위정자를 위협하기도 했다. 따지고 보면 모든 여건이 우리에게는 불리한 형편이었다. 제2 공화국은 수난과 진통의 불연속선이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우리는 국민 앞에 내건 공약을 지키고,

또 최대한의 자유를 허용하는 가운데 점차 질서를 유지한다는 기본 방침엔 끝내 변함이 없었다.

 

야당 시절의 오랜 체험을 통하여 우리는 피치자(被治者)의 입장과 사정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이승만 정권의 악착스런 탄압과 박해를 받아 본 우리이니, 어떠한 사태하에서도 그들의 전철을 밟지 않는다는 원칙을 세우고 정치에 임했던 것이다. 그에 따른 고충이 다대했음은 더 말할 여지도 없다. 국무 총리 생활을 통하여 나는 새벽 2시 전에 취침해 본 일이 별로 없을 정도로 성심껏 최선을 다하여 무슨 일이든 잘해 보려고 한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경제 안정과 사회 질서 유지를 위한 제반 준비가 갖추어지고, 그 실현 단계에서 시간을 얻지 못한 것이 애석하다. 작은 집안 살림도 아닌 나라 살림이 단시일 내에 안정되지는 않는 것이었다. 몇 달만 더 계속되었어도 국가의 기틀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다.

 

이러한 기회를 허용하지 않고, 집권한 지 불과 18일만에 정부를 전복하려고 갖은 음모와 갖은 계략을 꾸민 사람들에게 내가 이제 와서 무슨 얘기를 한단 말인가.

 

민주당 정권 8개월을 통하여 역사에 두드러지게 나타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다만 부패했고 무능한 것이 우리의 본질이었다면 군사 정변을 당하여 마땅했을 것이다. 우리가 경제 제일주의를 내세워 5개년 계획을 성안하고, 그 실천을 위하여 총력을 집결할 만한 정치 안정기에 민주당은 좋지 못한 인상만 남긴 채 종언을 고하였다.

 

여기서 민주당이 시작해 놓고서도 미처 실현을 보지 못한 채 좌절되고 만 몇 가지 시책을 말한다면 약자의 변명이라고 말할지도 모르거니와, 그렇다고 사실을 밝히지 않고 넘어가는 것도 사리에 맞지 않을 듯하여 약간의 해명을 해두려 한다.


5개년 계획에서 농촌 고리채 정리는 그 구상이 자유당 말기에 조금 비쳤던 것이 사실이나 구체적 초안을 정비한 것은 민주당 내각이었다. 그것을 곧 실시하지 못한 것은 재정적 뒷받침이 없었기 때문인데, 군정(軍政)에서 이 초안 그대로를 아무 뒷받침 없이 내밀다가 실패의 고배를 마시고 만 것이다.

 

좌우간 우리 농민들을 위하여 애석한 일이다. 우리는 5개년 계획의 초안을 4월에 이미 끝내고 있었다. 비밀리에 성안하여 발표할 생각이었는데, 그만 사전에 신문에 발표가 되었던 것이다. 1961년 4월에 나온 신문들을 보면 민주당 5개년 계획에 대한 명세서가 밝혀져 있을 것이다.

 

국토 건설 사업이 1961년 봄에 착수되어 새로운 희망을 약속해 주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은 대미 관계를 원활히 하여 외환 정책의 기초를 굳건히 하였다. 김 재무 장관으로 하여금 막대한 액수의 달러를 원조 받아 왔건만, 뒤에 박 정권은 외유 기타의 명목으로 어떻게 낭비했는지 내가 알 바 아니다.


민주당 정권은 자유의 시련을 일선에서 겪어야 했으며, 특히 4월 혁명의 여파를 수습하는 데 많은 시간을 충당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어떠한 정권이 출현했다 하더라도 4.19 이후의 격류 속에서 수난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어려운 가운데서도 이 나라 발전을 위한 많은 계획을 세우고 민주당 정권이 발전의 씨를 뿌렸건만 우리에게 운명은 가혹했다. 결과적으로 자유 민주주의의 값진 시련을 우리는 육신으로 체험했으니, 제2 공화국을 이끌어 온 나로서 오직 하느님 앞에 경건한 감사와 사과의 기도를 드린다.

 

우리의 잘못으로 주어진 정권을 빼앗기고 군정이라는 어려운 과정을 국민 모두가 맛보게 한 데 대하여 국무 총리직에 있었던 나로서 거듭 자책을 느끼며 사과할 따름이다.

 

Ⅳ. 침묵의 세월 - 집권 18일만의 쿠데타 모의

포승에 묶인 민주주의의 꿈
포승에 묶인 민주주의의 꿈

 



5.16과 함께 이날, 이때에 이르기까지 일체의 대외적인 발언을 삼가해 왔다.
누구보다도 책임감을 느껴서 정치를 잘했느냐 못했느냐에 대한 것은 후일 사가(史家)의 비판을 받을 일이지만, 여하튼 도의적으로 보아 무거운 책임을 느꼈기 때문이다.


5.16 정변이 일어난 동기가 ‘장 정권이 무능하고 부패하여 국정을 바로잡기 위한 혁명’이라고 널리 선전되어 왔음은 이미 구문에 속한다. 무엇이 무능하고, 무엇이 부패였는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아는 사람만이 알 것이다.

 

‘군사 혁명 비사(秘史)’라는 책을 보면 우리가 집권한 지 18일만에 정권 전복의 모의가 시작되고 있다. 집권 18일만에 대체 무엇을 어쩌자는 셈이었을까. 그동안에 부패와 무능이 나타나고 있었던가?

 

아니면 부패와 무능을 미리부터 예언할 수 있었다는 얘기인가? 세상에 이러한 모순이 없다. 처음부터 정권을 잡겠다는 그들이 한번이라도 정직하게 발표한 일이 있었는지, 과문한 나는 듣지 못했다. 부패와 무능을 기다렸다는 것이라면 또 모른다.

전부터 정권을 쥐고야 말겠다는 야심을 지닌 증거는 되어도 우리가 잘못한 때문에 쿠데타를 시작했다는 논리적인 귀결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러면 장차 무능해지고 부패할지도 모르니 미리 쿠데타를 모의했다는 주장이 성립될 수 있을까?

 

하여튼 장 정권이 무능, 부패했기 때문에 쿠데타를 일으켰다는 공언은 앞뒤가 어긋나는 얘기다. 뜻있는 국민이 어떻게 생각할는지 의문이지만, 침식을 잃고 양심껏 한다고는 했을 뿐인데 무엇이 어떻게 부패했는지 알 길이 없다.

 

5.16 후에도 군사 정부에서는 전 각료 및 관련자들을 감금해 놓고 취조를 거듭하여, 소위 장 정권의 부패상을 색출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썼다.

그러나 이렇다 할 만한 부패상은 없었다.

 

‘장 정권의 부패상’이라고 각 신문이 앞을 다투어 대서 특필로 보도하였지만

그 내용은 무엇이었나? 여러 차례에 걸쳐 중앙 정보부에서 민주당 정권의 부정 부패상을 들춰 내었지만, 결국 그들 자신의 노력에 의해 민주당 정권이 ‘깨끗한 정부’였음을 증명해 주는 결과밖에 초래한 것이 없다.

 

조재천 씨가 공산주의자로 몰리고, 김영선 씨가 부정 축재자라고 옥살이를 하였는데, 결국 조씨는 아무 혐의가 없다고 하여 자유의 몸이 되었고, 김씨는 부정 축재자가 아니라는 판결이 났다.

 

성실한 태도로 진정한 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하여 권력의 남용으로 독재를 하지 않으면 ‘무능’이라는 혁명의 대상이 되는 것인가. 8개월 간의 짧은 시정(施政) 끝에 덮어놓고 부패와 무능이라는 누명밖에 씌울 것이 없다면 이는 쿠데타를 정당화시키려는 구호로 쓰기 위한 것뿐일 것이다.

 

민주당 정권이 국민 앞에 큰 과오를 범해서 쿠데타를 당하지 않으면 안되게끔 정국이 악화되었다는 자각은 없다. 아마 내가 군부를 너무 믿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 민주당 정권이 실책을 거듭해 이를 전복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생각한 것이 군 전체의 지배적인 주장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지금까지도 필연적으로 쿠데타에 의해 정권을 내놓아야 할 정도로 제2 공화국이 큰 과오를 범했다는 의식적인 자각은 없다.

 

다만 정권을 유지하지 못한 탓으로 국민의 여망에 어긋나게 된 결과에는 나 자신이 뼈아프게 도의적 책임을 느낀다. 국민 앞에 사과하며, 그동안 자숙과 근신의 성의를 표하는 길밖에 없어 오늘까지 침묵 일관이었다. 할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할말은 얼마든지 있어도 자숙을 통하여 우리 스스로를 돌이켜본다는 뜻이었다. 침묵 속에서 나는 잃어버렸던 세계를 찾을 수 있었다. 신앙 생활에 파묻힌 나날 속에서 내가 걸어온 길을 조용히 회고했던 것이다.

 

 

Ⅳ. 침묵의 세월 - 5·16 비화

 



한때 ‘3월 위기설’이니 ‘4월 위기설’이 있었지만,
이는 장 정권이 무너지기를 바라는 사람과 어느 기자의 추궁에 넘어간 모 인사의 발언을 기자가 왜곡 보도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모든 혼란이 종식되고 의욕적인 제2 공화국이 튼튼한 기반 위에 설 준비가 끝난 때였다.


5.16 일주일 전에 나는 군 일부에서 군사 쿠데타 모의가 진행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였다.그전에도 2, 3차 다른 부류의 쿠데타 모의가 있다는 미확인 정보를 입수하고 비밀리에 내사케 한 일이 있었다. 내사 결과 확실한 것이 아니라, 쿠데타 모의가 전연 없었는지 내사가 철저하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하여튼 그전의 2?3차 모의설은 불발이었다. 그러던 차 이것이 4번째의 정보였다.

 

나는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당시의 육군 참모 총장인 장도영(張都暎)을 불렀다.

내가 입수한 정보는 박정희(朴正熙) 소장을 주동으로 한 일부 군인들이 쿠데타 모의를 진행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내가 입수한 정보를 장도영에게 전하고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라고 물었다. 내 말을 들은 장도영은 “천만에 말씀이십니다.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는 태연한 대답이었다.


이것이 5월 초순경의 일이다. 장도영의 대답을 들은 나는 도시 안심할 수가 없었다. 내가 입수한 정보는 막연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구체적인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구 어느 중국 음식점에 몇몇이 모여 활약하고 있다는 내용도 알았다.


“염려 말고 안심하십시오”라는 말만 반복하는 대답이 불만스러워, 나는 정색을 하고 그에게 엄숙히 말했다.“참모 총장이 먼저 알아서 나에게 보고해야 될 성질의 사건을 반대로 내가 참모 총장에게 지시하고 있으니 책임 지고 내사해 보시오.” 이러한 내 말에도 “알아는 보겠습니다만, 그럴 리가 없습니다” 라는 대답이 반복될 뿐이었다.


나는 그에게 엄밀히 조사할 것을 단단히 부탁해 두는 한편, 이 사건에 관련된 민간인도 확인해 보라고 검찰에 명했다. 검찰로 말하더라도 그 무렵에 2?3차나 그와 비슷한 정보를 입수하고 조사해 본 일이 있었다. 이렇다 할 단서가 잡히지 않아 정보 사기꾼에게 속은 줄로만 알고 있었다.


내 지시가 있은 지 며칠 후에 쿠데타 관련 민간인 혐의자 한 명을 체포했다는 보고가 있었다. 그러나 그를 심문해 본 결과 끝내 만족할 만한 자백을 듣지 못했다 하여, 결국 또 하나의 사기꾼으로 여기고 있었다.

 

검찰측에서 장도영을 만나 이 사건에 대하여 문의해 보았던 모양이다. 이때에도 장도영 총장은 “군내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없소. 공연한 염려니 국무 총리더러 안심하라고 하시오”라는 말을 하게 되어 흐지부지고만 것이다. 군 책임자와 검찰측의 말이 염려없다는 것이었다.

 

육군 참모 총장과 검찰측의 말이 한결같으니, 더 이상 추궁하여 불신의 태도를 보일 수가 없었다. 군 내에서 쿠데타를 모의하고 있다는 정보는 계속하여 들어왔다.

재차 내 추궁을 받은 장도영의 대답은 여전했다.


“모두 공연한 모략입니다. 아무 염려 마십시오. 제가 있는 동안에 절대 그런 일이 없습니다.”

 

나뿐만 아니라 국방 장관, 유엔군 사령관 매그루더 장군에게 같은 말로 ‘안심하라’는 말뿐이었다. 5월 15일에도 나는 아무런 관심없이 당의 회의를 가졌다.

 

다음날 1961년 5월 16일 새벽 2시경이다. 장도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에게 직접 온 것이 아니고 경호실을 통한 보고였다. 그때 나는 반도 호텔 809호실에 있었고 경호실은 808호실이었다.

 

30사단에서 장난을 하려는 것을 막아 놓았고, 지금 해병대, 공수 부대가 입경하려는 것을 한강에서 제지시키고 있다는 보고가 아닌가.


“아무 염려 마시고 그저 그런 일이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십시오”여전히 무사하다는 말이었다. 깜짝 놀란 나는 “한 주일 전에 내가 말한 그거 아닌가?”


“아니 별것 아닙니다. 염려 마시고 제게 맡기십시오.”"염려 말라는 말만 말고 내게 곧 와줘. 와서 직접 자세히 보고를 하게.  매그루더 사령관에게도 보고했나?”

“네, 했습니다.” 그래, 곧 좀 왔다 가게.” “곧 가겠습니다.”

경호원을 호텔 현관에서 대기시키고, 불안과 초조속에서 장도영을 기다렸으나 종내 나타나지 않았다.


얼마 후에 총성이 요란하게 들렸다. 신변의 위험을 느꼈다. 이성을 잃은 군인들이 무슨 짓을 못하랴 싶었다. 사세 부득이 그 자리를 피했다. 반도 호텔에 군인이 들어오기 전 불과 10분 앞서였다.


가야 할 목적지를 정하고 나선 것은 아니다. 우선 길 건너 미 대사관으로 가 보려 했으나 문이 절벽으로 잠겨 있었다.무교동 골목으로 빠져 청진동으로 달려가, 한국 일보사 맞은편 미 대사관 사택의 문을 두드렸다. 어떤 엄명이 내렸는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갈 수도 없고 길에서 방황할 수도 없어 일단 안전한 곳에서 정세를 파악하기 위해 잠시 몸을 피하기로 했다. 어디로 가야겠다는 작정은 없었다. 잠시 피신해 정세를 보기 위해서 아무도 짐작 못할 혜화동의 수도원으로 가 보았다. 내자가 전부터 친교가 있던 원장에게 사정을 말하고 허락을 받아 방 하나를 얻었다.


혹자는 겁에 질려 꼭꼭 숨어만 있던 것처럼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그런 것만은 아니다. 거기서 무엇을 어떻게 했는지는 아직 말할 단계가 아니므로 보류해 둔다.


이때 받은 충격은 너무나 컸다. 무슨 까닭으로 이런 변을 당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16일이 밝아 왔다. 시민들의 얼굴은 무표정 그것이었다. 군사 쿠데타의 절실한 필요를 느껴 이 박사 하야 때처럼 호응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쿠데타에 가담한 일부 사병들도 영문을 몰랐으리라.


이것으로 봐도 이 쿠데타가 군 전체의 의사가 아니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쿠데타가 지난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장도영이 양다리를 짚지 않고 처음부터 굳세게 나갔거나 매그루더를 만난 윤 대통령이 진압할 뜻을 표시했다면 5.16 정변은 결코 성공되지 못했을 것이다. 윤 대통령은 이러한 사태가 벌어지기를 바랐던 바이고, 먼저 내통을 받았을 때에도 기대하고 있던 일이었기 때문에 올 것이 왔다’는 말을 하게 되지 않았던가.


윤 대통령의 이러한 심사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제2 공화국의 원수요 총리라면 도의상으로라도 운명을 같이해야 옳을 일이지, 어서 정부가 전복되기만 바라고 있었다는 것은 도저히 상식으로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5월 18일, 나는 정식으로 사임을 발표했다. 내가 사임을 결정하게 된 직접적인 동기는 윤 대통령의 태도를 알았기 때문이다. 쿠데타를 지지하는 태도를 처음에는 알지 못했으나 17일경에는 알게 되었다.


그는 군 쿠데타를 지지할 뿐 아니라 쿠데타 진압을 방지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쓰고 있음을 알았다.대통령의 김모 비서를 1군 사령관 이한림에게 보내어 쿠데타 진압을 저지하도록 했다. 국군 통수권을 쥐고 있는 대통령의 태도가 이러한 것을 알고는 쿠데타가 진압되리라는 희망을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나라의 운명은 결정되었다.

 

윤 대통령뿐만 아니라 장도영까지도 쿠데타에 가담하게 되고 보니, 총리 사임은 필연적인 귀결이었다. 이 후에도 여러 가지 수난이 계속되었다. 헌병과 특무대원 10여 명이 6개월 간이나 나를 연금 상태에 머물게 해놓고 24시간 감시하였다. 나중에는 소위 ‘임시 특별법 위반, 혁명 과업 방해죄, 국가 보안법 위반, 반국가 단체 구성 혐의’라는 죄목으로 구속, 투옥까지 당했으니 더 할말이 무엇이 있겠는가?

 


Ⅳ. 침묵의 세월 - 오직 사학(史學)의 평가만이


그러면 이처럼 ‘무능’하고 ‘부패’한 정권이라 하여 이를 총칼로 전복시키고 들어선 군사 정권과 그 연장인 현 공화당 정권이 5년이란 장장 세월간에 과연 얼마나 ‘유능’하고‘깨끗’하게 나라를 잘 다스려 국리 민복을 가져왔는가?

 

그들이 처음 내걸었던 소위 ‘혁명 공약’은 그대로 잘 지켰으며, 민권의 자유가 옹호되고 만백성이 더 잘살게 되었는가? 정복을 당한 내가 말하기보다 이에 대한 가치관을 1964년 1월 5일 박순천(朴順天) 씨가 삼민회(三民會) 대표로 국회에서 발언한 정책 기조 연설에서 들어 보기로 하자.


“5.16은 일부 극소수 군인이 정권욕에 사로잡혀 헌정을 중단하고 군사적인 독재 정권을 수립함으로써 4.19와는 본질적으로 다를 뿐 아니라, 독재의 재등장이라는 의미에서 5.16은 4.19에 대한 반대 사태다. 현 정권이 곧 군정의 연장이다. 1960년 9월 10일 서울 충무가(忠武家)에서 밀회하여 쿠데타를 음모할 때는 장 정권 성립 후 불과 18일만인 만큼 이것은 ‘혁명’이 아니고 의거도 아닌 정권 획득을 위한 쿠데타다. 5.16 군사 쿠데타의 명분은 허위였으며 그 이념과 공약이 양두 구육(羊頭狗肉) 격이었고, 그 뒤로 정권욕에 시종해 왔다. 현 여당의 거대한 조직비, 사무 당원 유지비, 사상 유례 없는 추악한 매수, 선거 자금, 야당 파괴 공작금, 비밀 정보비 등 막대한 정치 자금의 출처가 어딘가…?


쿠데타의 논공 행상식으로 창설된 기관과 채용된 공무원 증가는 5.16 당시에 비해 약 4만 명이 증가되었다. 군사 정권 유지를 위하여 수도 방위 사령부, 중앙 정보부 등을 만들어 경찰 국가화하고 국민을 공포 분위기 속에 몰아넣었다. 논공 행상 또는 정치 자금 조달 방법에 의한 특혜 등은 삼성 재벌 등 기개인의 치부를 낳고 대부분 국민의 경제적 희생은 물론 중산 계급의 몰락을 초래했다….”


이만하면 노련한 정치인으로서의 5.16의 평가가 역력히 드러났다. 군정 이래의 민권 억압, 통화 개혁, 고리채 정리 실패, 4대 의혹 사건, 주체 세력간의 갈등, 암투, 번의, 군인 데모, ‘완전 범죄형 부정 선거’, ‘대량 사면령’, 학원.언론 탄압 등등 구악을 뺨치는 신악이 구정치인을 무색케 할 정도니, 이것이 과연 쿠데타를 합리화시키기에 흡족한 ‘유능’하고 ‘깨끗’한 정치의 모습인지 국민이 이미 각자 판단을 내리고 있거니와  좀더 긴 안목으로 사가(史家)들의 평가를 기다릴 뿐이다.

Ⅳ. 침묵의 세월 - 결언(結言), 침묵 속의 기도

 천추(天主)께 기구하는 운석 선생
천주(天主)께 기구하는 운석 선생

 
능력과 덕이 없는 사람이 나라 일을 맡았다는 것에 스스로 도의적 책임을 느끼는 바이다.
아무리 심혈을 기울여 잘해 보려고 있는 힘을 다 써 보았으나 결과가 이쯤 되고 보니 할말도 없다.

 

지금 와서 억울하기 짝이 없지만 나는 누구를 원망하지도 않고 또 보복하려 하지도 않는다.모든 것을 하느님께 맡기고 어떻든지 하느님이 이 나라를 버리지 말아 주시기만 바랄 뿐이다.


내가 국민 앞에 저지른 잘못은 속죄의 심정으로 사과할 뿐이다. 8개월이라는 기간 국정을 맡았다가 무능하다는 말을 들으며 물러나 앉은 나로서, 지금 새삼스럽게 절감되는 것은 만사가 인력만으로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한 집안을 다스리는 것도 수월한 일이 아니지만 한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서 하느님의 특별하신 은총이 없이는 힘들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나의 덕이 모자라고 신앙이 부족하여 이러한 결과를 초래했으니 하느님께 사죄하고, 나로 인하여 이 나라 백성이 입은 피해를 하느님과 국민이 너그럽게 용서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앞으로도 정치인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섬기고,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그 뜻을 받들게 되어야 이 나라가 행복스럽고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될 것이다. 만약 하느님을 무시하고 적대시하여 시속(時俗)을 따르면 나라의 운명이 위태로울 것이다.

 

그래서 다만 한 사람이라도 더 하느님의 거룩한 뜻에 복종하도록 그 복음과 계명의 가르침을 전하면서 여생을 보내고 싶은 생각이다.


제2 공화국의 각료로 있던 사람 중 대다수가 독실한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분들도 허탈감과 인생의 무상함을 느낀 나머지 어딘가 마음을 정착하고, 참된 구국의 지표를 모색하던 그들이 반성 끝에 성실한 구도의 노력으로 얻은 신앙이다.

 

신앙인에게는 구원의 길이 언제나 열려 있는 것이다.

 

정치를 떠난 나로서 정치인들에게 할말은 없다. 다만 정치인이 되기 전에 옳은 정치인이 되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것만은 말할 수 있다. 하느님을 모르거나 무시하고서는 그 누구도 정치를 옳게 할 수 없다고 잘라 말하고 싶다.


새로운 세대를 창조하는 젊은이들도 자신의 앞날을 개척하고 더 나아가 국가 민족과 세계에 공헌하려는 뜻을 가졌다면, 인간의 종착점이 어디 있으며 인간의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를 안 후에 그 길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이 길을 벗어나서는 모든 노력이 헛되는 것이다.


이 길은 오직 하느님의 뜻을 받드는 성실한 신앙에서만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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