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 요한 14, 23~29
심리학에 성격의 A-B-C 이론이란 것이 있다. 여기서 A는 선행사건이나 사실, 혹은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태도 등이다. C는 그 사람의 정서적 행동적 결과 혹은 반응이다. 반응은 적절할 수도 있고 부적절할 수도 있는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A란 사건이나 사실이 C란 정서적 결과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A에 대한 그 사람의 신념인 B가 C의 원인이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든다면 어떤 사람이 이혼 후에 우울증에 걸렸다면 우울 반응을 일으킨 것은 이혼자체가 아니라, 이혼에 대한 그 사람의 신념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문제가 되는 것은 신념인데, 이 신념이 비합리적이라면 이 사람은 정서장애와 자기 성장 지향성을 가질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비합리적인 신념의 가장 대표적인 것이, 「절대 당위」라는 것이다. 즉 완벽하게 “해야만 한다”, 절대적으로 그렇게 “해야만 한다”등과 같은 것, 영어로 이야기하면 must, should, ought to 등이 대표적인 비합리적인 신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비합리적인 신념 대신 효과적인 새로운 감정을 창출하는 것이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 정서치료의 목적이다.
오늘 1 독서는 유대인들이 가졌던 절대 당위인 할례의 문제와 이문제의 합리적인 해결 과정을 보여 준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 이후 교회는 사도들의 영웅적인 활동과 초대 교회 신자들의 모범적 생활로 많은 발전을 이룬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초대교회에 가지고 있었던 문제는 크게 두 가지인데 박해와 오늘 1 독서에서 나오는 할례를 중심으로 한 유대 율법의 문제였다.
박해. 처음에는 사도들과 몇몇 지도층 인사들에게 한정되었던 박해는 더더욱 광범위하게 진행되고, 이 박해는 막 뿌리를 내리려는 우리 교회에 엄청난 재앙이었다. 그러나 참으로 아이러니한 것은 이 박해가 우리 교회의 성장에 방해가 된 것이 아니라 우리 교회가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박해를 피해 유대 밖으로 나아간 사람들에 의해 새로운 이방인 공동체들이 하나 둘 형성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히려 하나의 위기가 새로운 발전을 가져오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초대교회가 가졌던 또 하나의 문제인 할례문제. 처음 초대교회 신자의 대부분은 유대인들이었고, 이들이 대부분 교회의 지도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이제 이방인들이 하나 둘 들어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아주 많은 수의 이방인들이 들어오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구약의 법들.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문제가 생긴다. 특히 하느님의 백성에 귀속시키는 전통적인 예식인 할례 문제,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도 받았던 그 의식은 아주 미묘한 문제가 됐다.
이것의 주된 논점은 할례라는 것이 단순한 유대인의 집단에 들어가는 민족의식인가 아니면 구원과 직결되는 구원의 문제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사소한 문제일 수도 있지만 초대교회를 분열시킬 수도 있는 큰 문제였다.
바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루살렘 사도회의가 열리게 되고 이것이 오늘 제 1독서의 배경이다. 사도들과 교회의 지도자들은 할례문제를 이방인들에게 강요해서는 안 된다. 구원과 할례는 관계가 없다고 선언한다. 할례를 단순히 전통적인 유대인의 관습으로만 받아들이는데, 그 근거를 사도들은 이방인들에게 성령이 역사 하셨다는 사실에서 찾고 있다.
그러나 사도들은 부차적인 문제 몇 가지를 이방인들에게 부탁했다. 우상에게 바쳤던 제물, 그리고 피와 목 졸라 죽인 짐승을 먹는 것, 그리고 음란한 행동은 금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 세 가지의 특징은 단순한 것이지만 그 당시 이스라엘만이 지키던 독특한 관습들인데 이것은 존중하자는 것이고 이방인들도 여기에 동의함으로 분열의 위기를 벗어나게 된다.
여기서도 보지만 바로 초대교회가 분열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절대 당위인 할례를 “해야만 한다”라고 고집하지 않았기 때문이요 둘째는 타민족이 가지는 관습도 받아들일 수 있는 아량과 셋째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성령의 역사하심과 셩령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있었기에 바로 초대 교회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비합리적인 신념에서 벗어 날 수 있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교훈을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이 가지는 비합리적인 신념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실마리가 “모든 것을 가르쳐주시고 예수님의 말씀을 되새기게 하여주시는 성령”께 있다는 교훈 말이다.
이번 주 한겨레 21에 나온 이상수씨의 글로 결론을 대신 할까 한다. “된사람(군자)은 하늘 아래 일을 하면서 죽어도 이래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법이 없고, 또 이렇게 해서는 죽어도 안 된다고 주장하는 법도 없다. 다만 마땅함을 따를 뿐이다”
홍금표(성 도미니꼬선교수녀회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