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이해’ 넘어서는 신앙의 길
니시다 철학에 의하면 알면 알수록 이해가 깊어지고 이해가 깊어질수록 사랑하게 된다는 말을 하고, 부부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 의하면 상대방에 대한 앎과 관심, 이해가 사랑을 키워주는 열쇠라 합니다.
이 말들은 모두 우리 앞에 놓여진 사건이나 사람보다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내적 작용이 사랑에 있어서는 더 중요하다는 말입니다.
제가 이 말을 실감하는 것은 미술작품을 대할 때입니다. 저는 미술에 대해 지식이 거의 없습니다. 그러기에 명작을 감상하는 것과 만화나 사진을 보는 것 사이의 차이를 거의 구분하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때로는 몇 억을 호가하는 미술작품보다도 몇 백원짜리 그럴싸한 사진이 저에게는 더 의미 있을 때도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미술작품을 이해하지 못할뿐 아니라 관심도 없고 사랑이란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행동은 미술의 맛을 아는 사람들에게는 안타까운 일이겠습니다만 나에게는 자연스러운 행위입니다.
아마 이러한 예는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 체험과 비체험, 하느님에 대한 사랑, 아마 그 차이도 어쩌면 우리 앞에 놓여진 외적인 조건이나 사건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에 대해 가지는 앎과 이해, 이해를 넘어서는 신앙이라는 인간의 내적 자세에 더 많이 의존할 수 밖에 없는데, 바로 오늘 복음이 이에 대해 하나의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오늘은 주님 공현대축일로서 동방박사들이 예수님께 경배하러 왔던 사건을 기념합니다.
복음에 의하면 동방에서 온 박사들, 멜키올 발타살 가스팔로 알려진 세 명의 점성가들은 별을 통해 왕의 탄생사실을 알고 그분을 찾아 경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바는 먼저 예수님은 유다인들만을 위한 구세주가 아니라 동방박사로 대표되는 전 인류의 공경을 받아야 하는 구세주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이야기는 구원의 결정적 시기가 예수님을 통해 성취됨을 보여줍니다.
구약의 예언에 의하면 장차 때가 되면(이때 때는 구원의 결정적 시기를 가리키는 때) 이방인들이 조공을 바치러 예루살렘에 모여 오리라는 예언이 있는데 바로 동방박사들의 예물을 증정하는 것은 그러한 시대의 도래로 복음사가는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을 보면서 같이 생각해 보고 싶은 점은 예수님을 경배한 동방박사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첫 번째 사실은 이들은 「별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동방박사들이 별의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평소 별에 대한 지식을 가지고 별을 연구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 예수님의 별을 본 사람은 동방박사들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 별을 통해 유다인 왕의 탄생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동방박사들뿐이었는데 이것은 이들이 별에 대한 특별한 지식과 이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사실은 동방박사들은 별을 쫓아 길을 떠난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을 통해 헤로데와 율법학자로 대표되는 유다인들과 동방박사로 대표되는 이방인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갈등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일반적인 조건으로 본다면 동방박사들 보다 먼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왜냐하면 유다인들은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구세주의 오심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인데 비해 동방박사들은 하느님과 구세주의 섭리에 대해 문외한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입니다.
그 이유는 동방박사들은 별을 쫓아 찾아 나선 사람들임에 비해 율사들과 헤로데는 알려주고 머물렀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신앙의 길은 결코 남에게 맡겨 놓을 수 없는 일이요, 이해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앎과 이해를 넘어서는 실천적인 일인데 유다인들은 앎에만 머물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머리에서만 머물고 몸으로 전달되지 않은 신앙이었기에 이들은 결국 구세주를 맞이하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그러기에 동방박사의 이 이야기는 인생의 문제에 해답을 얻기 위해서는 별이 상징하는 바대로 인간의 운명과 세상의 운명에 대해 좀더 적극적인 관심과 열정을 가질 것을 호소하면서 동시에 인생의 신비에 대해 깨달은 바가 있다면 동방박사들처럼 그것을 쫓아 나서는 실천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교훈으로 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홍금표 신부〈원주교구 삼척종합복지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