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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 내 원수도 소중한 피조물입니다/배광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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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0. 7. 30.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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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 내 원수도 소중한 피조물입니다/배광하 신부

연중 제31주일 (루카 19, 1~10) : 예수님과 자캐오
발행일 : 2007-11-04 [제2572호, 6면]

- 인간의 잣대와 하느님의 자비 -

타인의 허물에서

일본인 가톨릭 작가 엔도 슈사쿠(1923~1996)의 작품 ‘침묵’을 보면 인간의 마음을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는 장면이 나옵니다.

유럽에서 일본의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던 때에 두 명의 젊은 선교사제가 죽음을 무릅쓰고 일본에 입국합니다. 그러나 이내 붙잡혀 한 명의 사제는 순교하고 다른 한 명은 그 옛날 자신들의 신학교 스승이었던 교수 신부의 권고를 받아 배교하게 됩니다.

교수 신부 역시 먼저 배교한 뒤였습니다. 둘은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만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관아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만나지만 서로 고개를 돌려 애써 외면합니다. 그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증오감과 모멸감을 품고 있으며, 거울 속에 비치는 자신들의 추한 얼굴과 살기 위한 배교의 역겨움이 상대방을 통하여 보여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미워하고 경멸할 때, 타인에게서 발견되는 단점과 미움은 바로 내 자신에게도 있기에, 내가 나의 단점을 볼 수 없기 때문에 타인을 통해 비추어 지는 것입니다. 분명 내게도 있는 단점과 잘못을 우리는 덮어 주지 못하고 용서가 되지 않아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사제로 살아오면서 제 자신에게서도 같은 모습을 끊임없이 발견하게 됩니다. 고집이 센 교우들을 보면서 분노하게 되나, 그 고집이 제게도 있었고, 남의 험담을 하며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교우들을 보며 이해할 수 없어 하면서도 어느 사이 내 자신이 남의 험담을 늘어놓는 이중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교우들을 탓하면서 정작 제 자신이 남을 용서 못하여 분을 삭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포용하시는데 죄 많은 제가 그들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모두를 버리지 않으시는데, 감히 제가 버렸던 것입니다. 타인의 허물에서 제 허물을 발견 못하는 어리석은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인간의 그릇된 잣대가 남을 단죄하거나 혐오하는 것이라면 하느님의 자비는 끝없는 용서와 사랑인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지혜서의 저자는 이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당신께서는 존재하는 모든 것을 사랑하시며, 당신께서 만드신 것을 하나도 혐오하지 않으십니다. 당신께서 지어내신 것을 싫어하실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지혜 11, 24).



하느님의 자비

가끔은 손가락의 지문을 보며 경탄하게 됩니다. 그 작은 손가락에 어떤 문양을 그려 넣었기에 60억 인구가 모두 지문이 다를까 생각합니다. 생존하는 지구상의 인구뿐 아니라 이미 죽은 사람까지도 지문이 같은 사람은 없다고 합니다.

어쩌면 아담과 하와로부터 현존하는 모든 인류 중에 손가락의 지문이 같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하나밖에 없는 소중한 창조물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자신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여도 그 판단된 사람 역시 하느님께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존재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모두가 회개하여 구원되기를 너무도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들은 구원의 보편성과 하느님 사랑의 용서와는 달리 선을 긋고 자신이 심판관인양 처신하며 구원받을 사람과 그렇지 못할 사람을 무례히도 구분 짓곤 합니다.

오늘 복음의 키 작은 세관장 자케오의 이야기는 우리의 편협한 구원관에 일침을 놓으시는 예수님 사랑의 보편성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식민지 백성을 곤궁에 빠뜨린 것은 지나친 세금 포탈이었습니다.

가난한 백성의 고혈을 짜내며 세금 징수에 앞장섰던 세리들은 그야말로 백성의 지탄 대상이었습니다. 더구나 세리들의 우두머리인 세관장은 경멸과 저주의 죽일 놈들 취급을 받았습니다. 때문에 모든 단죄의 인간 무리를 꼽는 데에는 반드시 세리가 끼어 있기 마련이었습니다. ‘세리와 도둑’, ‘세리와 강도’, ‘세리와 죄인’, ‘세리와 창녀’, ‘세리와 이방인’ 처럼 말입니다.

그토록 경멸과 저주의 대상인 세리 마태오를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로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예수님 복음 전파의 가장 큰 치명타를 안겨줄 위험천만의 일이었음에도 예수님께서는 그 일을 감행 하셨습니다.

모두가 구원 받아야할 사랑의 자녀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군중들이 자캐오를 경멸하면서 못마땅해 할 때, 예수님께서는 당시로는 가히 혁명적인 발언을 선포하십니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루카 19, 9~10).

이것이 하느님 자비의 구원관이며, 우리는 그 사랑의 삶을 살아야할 그리스도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