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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69) 토마스를 품어 주세요 / 장재봉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2. 4. 17.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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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생각 (769) 토마스를 품어 주세요 / 장재봉 신부

부활 제2주일(요한 20, 19-31)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발행일 : 2012-04-15 [제2791호, 18면]

 

 

오늘 독서는 초대교회의 모습을 통해서 공동체가 지향해야 할 바를 분명히 알려 줍니다. 바로 “한마음 한뜻이 되어” 모두 “큰 능력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세상에 “큰 은총”을 누리는 모습을 드러내는 일입니다. 이어 사도 요한은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설명하며 그리스도인은 “세상을 이길 것”임을 천명하는데요. 모두 그분의 자비 덕에 누리는 축복이기에 오늘 교회는 주님의 자비심을 높이 기리고 칭송하며 ‘자비 주일’을 지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그분의 자비가 얼마나 꼼꼼하고 다정한지를 뚜렷이 느낄 수 있는데요. 그날 주님께서 하필이면 토마스 사도가 없는 틈에 나타나신 까닭도 그분의 정겹고 다감한 자비를 ‘한 번 더’ 일깨우려하심이 아닐까 싶을 지경입니다.

그날 토마스는 동료들의 들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홀로 왕따 당한 기분이 들었을 것 같습니다. 이 때문에 퉁명스럽게 답을 했을 것도 같습니다. 이리 짐작하니 매우 극단적인 불신의 표현을 내뱉은 그가 동료들을 떠나지 않고 여드레를 함께 머무른 사실이 신기합니다. 이 때문에 그가 진짜, 주님 상처에 손가락을 들이댈 요량이었거나 동료들의 말을 철저히 의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하게 되는데요. 어쩌면 토마스에게는 그 여드레가 꼬박 자신이 함부로 지껄인 말을 통회했던 자숙의 기간이 아니었을까 짚어봅니다. 자신의 생각과 말을 다듬은 결과, “나의 주, 나의 하느님!”이라는 놀라운 고백을 바칠 수 있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아무려나 토마스 사도의 서운했을 마음을 살피니, 지금 우리 마음을 후비고 있는 갖은 의문과 의심들이 생각납니다. 우리도 하느님의 불공평하심에 불만을 품고서 마침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의심하는 ‘전과자’들이니까요. 신앙을 팽개치고 싶은 의구심에 영혼을 앓고 믿음에 한기를 느끼는 경우도 부지기수이니까요. 열심히 기도해도 “도무지 응답하지 않으신다고” 갑갑해 하며, 나를 미워하고 차별하는 하느님으로 착각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니까요. 마침내 이도 저도 성에 차지 않아서 이웃의 행복마저 눈꼴사나워서, 성당은 재미없고 외롭고 속상한 곳이 됩니다. 힘든 마음을 상의해 봤자 고작 “하느님만 보고 사람을 보지 말라”느니 “신앙을 재미로 생각하면 안 된다”는 뻔한 대답뿐이니, 약이 오릅니다. “나도 그런 거, 충분히 안다”고 토마스처럼 팩 토라져버립니다.

만약에 그날 열 제자가 토마스의 돼먹지 않은 말에 눈총을 쏘며 “뭔 말을 저리 막되게 지껄이냐?”며 ‘몹쓸 인간’ 취급을 했다면 토마스는 결코 그들 곁에 있지 못했을 것입니다. “통하는 저희끼리 잘 먹고 잘 살아라”는 생각에 열불이 나서 훌쩍 떠나버렸을지 모르겠다는 얘깁니다. 이 때문에 그날 열 제자가 토마스의 미심쩍은 마음을 다독이며 최선을 다했던 사랑의 모습을 느끼게 됩니다. ‘모자란’ 토마스의 불신을 지적하지 않고 끼리끼리 수군대지도 않고 살갑게 토마스를 대했을 것이라 짐작하게 됩니다.

가톨릭 신자의 50%가 냉담자랍니다. 그분을 믿고 그분의 자녀로 태어난 우리 가족 절반이 교회를 떠나 세상을 서성댄다는 통계이기에 참 아픕니다. 빨리 아물어야할 우리의 상처입니다. 물론 가장 큰 원인은 그들이 ‘아직 그분을 뵙지 못한’ 까닭일 터입니다. 그럼에도 형제들의 마음과 처지를 살펴 마음을 쓰고 함께 하려 애썼는지를 돌아보게 됩니다. 아직 모자란 그들의 신앙을 북돋워주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묻게 됩니다.

그날 토마스의 모자란 불평을 ‘틀렸다’ 하지 않고 ‘다르다’고 구별하지 않았던 열 제자의 사랑과 헌신이 돋보이는 이유입니다. 그 배려가 토마스의 발길을 꼭 붙잡았던 것이라 믿습니다. 주님께서는 오늘 세상을 두려워하며 희생을 미루고 사랑하기 힘들다고 마음을 꽉 잠가버린 우리에게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자유하라 당부하십니다. 부활인답게 자비를 베풀라 이르십니다. ‘참’을 얘기해도 ‘제멋대로’ 판단하여 함부로 말한 토마스를 품어 준 열 제자의 넉넉한 마음을 닮으라 일깨우십니다. 모든 냉담자들이 “그분의 계명은 결코 힘겹지 않다”는 진리를 깨닫기를 기도합니다. 아울러 우리 살핌과 사랑이 그들의 걸음을 재촉하기를 기도합니다. 마침내 모두 함께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고 찬미할 그날을 꿈꿉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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