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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 ‘성령의 힘’을 한껏 사용합시다 / 장재봉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3. 2. 4. 17: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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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 ‘성령의 힘’을 한껏 사용합시다 / 장재봉 신부

연중 제3주일, 해외원조주일(루카 1,1~4,14-21)
발행일 : 2013-01-27 [제2830호, 18면]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사람들을 향한 루카 사도의 남다른 애정을 느끼게 합니다. 아울러 독서 말씀에서 건지는 느헤미야의 동족 사랑과 코린토 교우들을 향한 바오로 사도의 애타는 호소에 감전되어, 마음이 찌릿해집니다.

당시 예루살렘과 갈릴래아는 시쳇말로 양극화 현상이 뚜렷했던 곳입니다. 특권층의 고장 예루살렘과 소외당한 사람들이 척박한 삶을 이어가던 갈릴래아….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 낙후된 갈릴래아에서 공생활을 시작하십니다. 루카 사도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힘을 지니고” 갈릴래아로 가셨다는 표현을 사용하여 그날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기록을 읽으신 것이 성령께서 골라주신 것임을 넌지시 일러줍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그리도 원하시는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어떠한 난관과 역경도 이겨내리라 속 깊이 다짐했으리라 싶습니다. 두루마리를 펴시던 예수님의 손끝이 떨렸을 것만 같습니다.

사실 다 가졌다고 여기는 기득권층들에게 예수님의 존재 가치는 절실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복음은 자기네 삶의 기반을 흔들어버리는 불편한 것일 수 있습니다. 이야말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여 버리고 ‘제거하는’ 일에 거침이 없었던 이유일 터입니다. 때문일까요? 복음은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과 낮고 어둡고 소외된 곳에서 외로이 살아가는 이들에게는 빛이며 희망이며 기쁨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1독서말씀이 “그 무렵”이라고 줄여놓은 부분이 아쉽습니다. 그 안에는 너무나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겼기 때문입니다.

느헤미야는 당시 수사 궁에서 아르타크세르크세스 임금의 ‘술 시중을 담당’했던 인물입니다. 그가 왕에게 얼마나 큰 신임을 얻고 있었는지는 예루살렘 도성을 다시 세우겠다는 계획을 흔쾌히 수락하고 필요한 재원까지 후히 제공할 것을 윤허한 임금의 처사에서 감지하게 됩니다(느헤 2장 참조). 한마디로 그는 기득권이고 특권층이며 세상 영화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예루살렘 성벽이 무너지고 그곳에서 살고 있는 동족들이 ‘큰 불행과 수치’를 당한다는 소식에 ‘주저앉아 울며 여러 날을 슬퍼’하며 하느님께 기도하고 간청하였다니 그는 결코 자신의 안락에 안주하지 않았던 참 신앙인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묵상하고 싶은 구절은 “그때에 온 백성이 일제히 ‘물문’ 앞 광장에 모여 율법 학자 에즈라에게 주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서를 가져오도록 청하였다”(8,1)라는 부분입니다.

그날 백성들이 먼저, 주님의 말씀을 읽어 줄 것을 청했다는 사실, 무엇보다 ‘먼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원했다는 사실이 감동적인 까닭입니다. 그들의 삶은 열악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밭도 포도원도 집도 저당’ 잡혀야 했고 그것도 모자라 ‘아들딸들을 종으로 짓밟히게’ 내어주어야 했던 엄청난 비극을 겪었습니다. 겨우 타국에서 포로생활을 하다 돌아온 그들에게는 도무지 ‘손쓸 힘’조차 없었습니다. 속수무책으로 한탄하고 울부짖을 수밖에 없는 빈민이었습니다. 그 처지에서 누구의 명령이나 권유에 의한 것이 아닌 스스로 선택한 그들의 원의가 너무 곱다는 얘깁니다.

주님을 직접 뵙지 못했지만 주님 사랑을 온 삶으로 이해했던 루카 사도, “복음을 위하여 이 모든 일을 합니다”(1코린 9,23)라며 끝까지 당당했던 바오로 사도, 주님의 계명에 담긴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놓치지 않고 실천했던 느헤미야의 삶이 한데 뭉쳐 선포되는 오늘이기에 울림이 큽니다.

우리는 주님의 자녀입니다. 그날 그분처럼 ‘성령의 힘을 지니고’ 살아가는 빛의 존재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읽고 그분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말씀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기도를 ‘내 뜻’으로 도배하고 있습니다. 그분께 세상의 복만 구걸하고 기적의 순간을 낚아채게 해달라고 조릅니다. 주님을 크고 멋진 도성, 높고 화려하고 웅장한 곳에서 만나기만을 고대합니다. 이 때문에 세상 가장 낮은 곳, 갈릴래아에 계신 예수님과 뚝 떨어져 지냅니다. 도무지 만나지를 못합니다.

죽음의 문화가 판치는 세상을 구하기 위해서 부디 느헤미야처럼 기도하고 사랑하기 원합니다. 바오로와 루카 사도처럼 철저하게 복음을 살기 바랍니다. ‘성령의 힘’을 지니고 “하느님의 집과 그분을 섬기는 일을 위한 덕행”(13,14)을 온전히 살아내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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