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전남 목포 생. 한 해 녹두는 800섬, 나락은 2만 섬씩 거둔 만석꾼 집안 출신. 서울 중앙고보와 일본 와세다대 예과를 거쳐 베이징대 언어학과에서 언어학 및 미학 전공. 한학은 물론 영어와 일어, 중국어, 프랑스어, 라틴어, 에스페란토어에 능통. 한때 베이징대 사서로 일하던 마오쩌둥 권유로 중국 공산당에 입당, 홍군과 함께 죽음의 대장정 참여….
약력만 보자면, 남부럽지 않은 집안 배경에 남 못지않은 학력과 재력을 갖췄고, 해서 누구 못지않게 편안히 살 수도 있었던 사람. 그럼에도 일제가 수탈하던 식민지 조선에서, 혼란한 대륙에서 목도한 세상의 불합리를 바라보며 '의롭고 뜨겁게' 살고자 했던 청년. 야인(也人) 김익진(프란치스코)이다.
그런데 3형제 중 막내인 자신을 애타게 찾던 아버지(김성규, 1864~1936)를 끝내 외면하지 못한 그는 1934년 초 조선으로 돌아온다. 장시(江西)성에서 산시(陝西)성에 이르는 1만2000㎞ 대장정을 걷던 혁명의 열정을 내려놓고 아버지의 땅에 돌아왔지만, 그는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하고 흔들린다.
#인생을 바꾼 한권의 책그러던 그의 삶이 1935년 초에 만난 책 한 권으로 뒤바뀐다. 그 책이 일본 도쿄 간다(神田) 헌책방 골목에서 우연히 접한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였다.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다가선 낡은 서가에 꽂힌 헌책 한 권이 그를 잡아당겼다. 결코 낯설지만은 않았던 성자 프란치스코를 떠올린 그는 책을 사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독서삼매경에 빠져든다.
비단 장사로 큰돈을 모아 아들이 기사가 되기를 바라는 아버지의 꿈, 아버지 뜻에 따라 기사가 돼 전쟁에 나갔으나 포로로 잡혀 죽을 고비를 넘기고 난 뒤 평생 거지가 돼 하느님 아버지 아들로 예수님 발자취만 따라 사는 길로 들어선 아들, 아버지의 꿈과 아들의 길이 엇갈리는 대목에서 그는 특히 전율을 느낀다.
모든 짐을 훌훌 벗어 던지고 하느님 아들로 새롭게 태어나는 프란치스코를 통해 그는 앞을 가로막고 있던 안개가 걷히듯 답답하던 가슴이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더 이상은 방황하며 일본에 머물 까닭이 사라졌다.
고향 목포로 돌아오니 가족이, 마을이, 이웃이 그리 정겨울 수가 없었다. 언덕 꼭대기 성당도 마음을 끌어당겼다. 혼자 성당을 찾아가 쉬어도 아늑했다.
그런데 막상 세례를 받기로 결심하자 마음 한구석이 다시 답답해졌다. 프란치스코도, 예수도 옳지만 가톨릭교회는 아니라는 내면의 소리가 자꾸 들렸다. 답답한 나머지 본당 회장을 하던 어린 시절 친구도 만나 토론도 해보고, 친구 안내로 본당 신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봐도 마찬가지였다.
그 때 만난 사제가 서울 약현(현 중림동 약현)본당에서 사목하던 오기선 신부다. 1935년 3월 친구와 함께 상경, 오 신부를 찾아간 그는 새벽미사를 집전하러 오 신부가 자리를 뜬 사이 책장을 둘러보다가 토마스 데 아퀴노의 철학과 역대 교황 회칙을 모아놓은 「가톨릭과 경제 문제」를 우연히 펴든다. 현세 사회문제에 빛을 던지는 이 책을 통해 그는 사회주의자에서 가톨릭 신자로 거듭난다.
다시 1년간 회개의 깊은 심연에 빠져들어 정화의 시기를 거친 그는 1936년 11월 병환이 깊던 아버지가 타계하자 그해 말 목포 산정동성당에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 패트릭 모나한 신부에게 세례를 받는다. 세례명은 '프란치스코'였다. 아내와 딸, 아들까지 일가족이 함께 하느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났고, 가족은 유산으로 상속받은 장성으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 부인 이신영씨와 함께 세례를 받은 지 1년 만인 1937년 11월 김익진씨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에 단독회원으로 입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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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처럼' 살기로하느님께로 나아가는 그의 달음질은 거칠 게 없었다. 세례를 받고나서 1937년 11월 서울 백동(현 혜화동) 성당에서 오 신부에게 청원, '레오'라는 수도명으로 재속 프란치스코회 단독회원으로 착복식을 가졌다. 평신도로는 국내에서 맨 먼저 재속 프란치스코회원으로 입회한 것이다.(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새 회칙에 따라 재속 프란치스코회원들은 이제 수도복을 입지 않는다.)
이 즈음 김익진의 삶을 오 신부는 이렇게 전한다.
"그는 늘 흰 띠를 두른 갈색 수도복을 입고 고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았다. 마치 비상하는 봉황과 같이 만사를 해탈한 듯 절대한 자유를 누렸다."
자신의 농토 4만2975㎡(1만3000여 평)를 광주지목구에 기증해 장성성당을 세우도록 도왔고, 신앙선조 유적들을 찾아다니며 순교의 얼을 새겼고, 멀리 성 베네딕도회 덕원수도원을 찾아가 수도 영성을 체험하며 세월을 보냈지만 전쟁은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1945년 초 예비검속에 걸린 그는 반일사상을 바탕으로 사회주의 운동에 뛰어들었던 전력 탓에 장성경찰서에 갇혀 갖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8ㆍ15 광복을 맞아 자유를 찾은 그는 '진작 벗지 못한 짐'을 마저 벗어던진다. 그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던 소작인 몇 백 명을 불러 모은 뒤 미리 준비해 놓은 등기문서에 도장을 찍어 그들에게 나눠 준다.
당시 그의 말이 지금도 전해져 온다.
"여러분, 그동안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저는 조상을 잘 둬 물려받은 땅으로 본의 아니게 지주 노릇을 해왔습니다. 하지만 오늘로 저는 지주가 아니라 여러분의 형제가 되고 싶습니다. 조국이 해방을 맞은 기쁨으로 여러분이 땀 흘려 농사짓던 농토를 여러분에게 온전히 돌려드리고자 합니다."
꿈조차 꾸지 못했던 일이 현실이 되자 농부들은 감격에 젖었다. 하지만 그의 이같은 결단에 부인과 일곱 아들딸의 반응이 어떠했을지는 가늠키 어렵다.
▲ 가족과 함께 1961년 무렵의 김익진(앞줄 왼쪽)씨.
사진출처=「야인 김익진 추모문집Ⅲ 야인정신향」(가톨릭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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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자로, 어려운 이웃의 벗으로, 문필가로 느닷없이 나락에 굴러 떨어진 여덟 식구를 거느린 김익진은 대구 남산동 132㎡(40평) 짜리 한옥으로 보금자리를 옮긴다. 부잣집 외아들의 자리를 버리고 거지의 삶으로 내려선 성 프란치스코처럼 그도 장성 일대 만석꾼 자리를 버리고 낯선 땅에서 서민으로 살아간다.
'진정성 짙은' 그 삶의 여정은 교육계로 이어진다. 1949년 왜관 순심중 교장으로 영어를 가르치던 중 6ㆍ25전쟁으로 학교가 문을 닫았지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그는 부산과 제주로 옮겨 다니며 피란민과 곤경에 빠진 이들을 돕는 데 안간힘을 썼다. 휴전 뒤에는 다시 김천 성의중, 경주 근화여중 등에서도 교감으로 일했다.
▲ 맏딸 우영(골룸바), 맏아들 효신(아우구스티노)의 첫영성체를 기념해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김익진(두 번째 줄 가운데)씨와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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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그의 삶을 오 신부는 이렇게 증언한다.
"6ㆍ25때 그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 제주도로 찾아갔더니 거적을 둘러치고 양재기에 밥을 해먹어가며 피란민 가운데 파묻혀 전교를 하고 있었지요. 그래도 그는 특유의 해학으로 이웃들을 위로하고 있었어요."
그런 틈바구니에서 가톨릭시보 편집동인으로 참여하기도 했고, 1956년 이후에는 문필가로서 삶을 살았다. 그가 만년에 교회매체에 발표한 글은 '민속과 서학'(성바오로, 1971)에 실려 있다.
또 「레지오 마리애 교본」(1956), 「상재상서」(1958), 「황사영 백서」(1959), 「동서의 피안」(1961), 「요셉」(1964), 「동방문화와 공교」(1965), 「내심낙원」(1966) 등을 번역했다.
이 서적들 번역에 그가 얼마나 큰 기쁨을 느꼈는지는 생전에 그가 "주님공현대축일에 동방박사들처럼 「레지오 마리애 교본」과 「동서의 피안」, 「내심 낙원」 등 3권을 들고 하느님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고 말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래서였는지 그는 1971년 1월 6일 주님공현대축일에 대구 대명동 66㎡(20평)짜리 허름한 한옥에서 '프란치스코처럼 산' 고귀한 삶을 마무리하고 하느님 품으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