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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6> 제주 교육의 별 최정숙

프란치스칸

by 巡禮者 2011. 5. 19.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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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

<6> 제주 교육의 별 최정숙

독립운동가, 교육자, 의사 등 모두 주님 향한 길... 신성여학교 시절에 영세한 뒤 진명여고 등서 독립 만세 외치다 감옥생활... 고향서 교육자의 길 걷다가 의학 공부해 빈민들 도와... 재속 프란치스코회 입회해 동정 지키며 단식과 기도... 초대 제주도 교육감 등 지내며 늘 겸손하고 가난한 삶


 
▲ '제주 교육의 별'이 된 최정숙 선생.
 

 
▲ 1964년 여성으로는 전국에서 최초로 제주도 교육감에 취임하고나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는 최정숙(앞줄 가운데) 교육감.
 

 
▲ 동정녀로서 제주교육의 선구자가 된 최정숙 초대 제주도 교육감.
사진출처=「수도자의 삶을 살다간 독립운동가 제주교육의 선구자 최정숙」(도서출판 각 펴냄)
 

 
제주가 낳은 독립운동가, 여성 계몽운동가,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 출신 의사, 초대 신성여중ㆍ고 교장, 대한적십자사 제주도지사 부지사장, 초대 제주도 교육감 등으로 평생 애덕의 삶을 산 선각자. 그러나 그에 앞서 자신의 온 생애를 하느님께 봉헌하며 성 프란치스코를 따른 제주의 첫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 바로 최정숙(베아트리체) 선생이다.

 유교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가족 중 맨 먼저 천주교에 입교해 가족을 복음화하고, 인술을 통해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살고, 신앙심을 기반으로 육영, 특히 여성교육에 헌신했으며, 나아가 평신도 그리스도인의 빛나는 사표가 된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간다.

 
   수도자 꿈 꾸다가 독립운동가로

 최정숙은 1902년 생이다. 대한제국 광무 6년에 태어나 일제강점기에 성장했다면, 여성이 신학문을 공부한다는 자체가 쉽지 않았던 시절이다. 그런데 법조인이던 아버지 최원순씨, 어머니 박효원씨 사이 6남매 가운데 맏딸로 태어난 그는 9살에 제주 신성여학교에 입학, 샬트르 성 바오로수녀회 수도자들에게서 교육을 받고 1913년에 세례를 받는다. 세례를 받기에 앞서 미사 참례와 기도생활에 열심했던 그는 세례를 받으면서 자신의 일생을 주님께 바치기로 약속한다.

 이듬해 신성여학교를 졸업한 그는 서울 진명여자고등보통학교를 거쳐 경성관립여자고등보통학교 사업과에 들어갔다. 2년간 교육과정을 마칠 무렵에 3ㆍ1운동이 일어났다. 18살이던 그도 교문을 나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걷고 걸었다. 그렇게 조선총독부로 향하던 중 진고개(현 충무로)에서 일본 관헌에 잡혀 남산 정무총감부로 끌려가 주동자를 캐내려는 일본 헌병의 무자비한 고문과 매질을 감수해야 했다. 서대문형무소로 옮겨져 있던 그는 일왕을 위해 교육에 힘을 쏟으라는 말을 듣고 느닷없이 석방된다.

 하지만 일왕을 찬양하는 졸업장을 받을 수 없었던 그는 졸업식에 참석치 않고 고향 제주로 내려간다. 그런데도 담임 교사는 그에게 졸업장과 교사 자격증을 보내줬다. 그 기쁨도 잠시, 그는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돼 서울로 압송됐으며 79소녀결사대 주모자로 서대문형무소에 갇힌다.

 고문과 고통 중에서도 그는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다. "천주님, 우리 민족에게 해방의 빛을 주십시오. 성모님, 저희를 위해 빌어 주십시오." 유관순 열사와 함께 갇혀있던 그는 진명여고 교사들의 노력으로 석방됐지만, 재판에서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는다.

 이로써 최정숙은 수녀회에 입회하려던 꿈을 접어야 했다. 광복을 위해 나선 애국의 길이었지만, 사상범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수녀회에 들어갈 수 없게 됐다. 수도의 길은 막혔으나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동정녀로서 일생을 주님께 몸 바치기로 한 결심은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성 계몽운동에 이어 애덕의 길로

 감옥에서 시달린 최정숙은 고향 제주로 돌아오자마자 여성 계몽에 앞장서기로 했다. 때마침 일본에서 절친한 친구 강평국이 귀국하자 그와 함께 1922년 여수원을 열어 여성들을 가르쳤다. 밤낮없이 학생들을 불러 모으고 지역 유지들과 천주교 신자들을 대상으로 여학교 설립을 위한 기금을 모았지만, 제주에서 여학생들을 모으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하는 수없이 남학생도 함께 공부할 수 있는 명신학교를 설립했다. 200여 명을 헤아리는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노심초사하던 그는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건강을 잃은 그가 서울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명신학교는 일제 간섭으로 제주공립보통학교에 흡수 통합되고 만다.

 이에 그는 목포 사립학교 소화학원에서 교사로 재직하다가 전라도 감목대리 김양홍 신부를 만나 전주 해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됐다. 그런데 그 학교에서도 '조국의 산하'라는 노래를 가르쳤다는 이유로 다시 체포돼 형무소에 수감됐다.

 얼마 뒤 풀려나온 그는 다시 상경, 1939년 38살 늦깎이로 경성여자의과전문학교에 입학해 의학 공부를 하게 됐다. 그에 앞서 1938년은 최정숙에게 잊지 못할 한 해였다. 수도자로서 삶에 대한 꿈을 잃은 채 살아야 했던 그가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서 새 삶을 살게 된 것이다.

 서울 백동(현 혜화동)성당에 다니던 그는 오기선 신부에게 재속 프란치스코회를 소개받고 입회한 뒤 1940년 4월 30일 서약한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모범으로 삼아 동정을 지키며 단식과 기도생활을 철저히 하고 덕행을 닦는 일은 그에게 크나큰 즐거움이었다.

 1943년 9월 경성의전을 1회로 졸업, 의사 면허를 받은 그는 성모병원에서 일하다가 이듬해 고향에 정화의원을 개업, 극빈 환자들을 주로 보살폈다. 또 일제 탄압과 운영난으로 문을 닫았던 제주 유일 여성교육기관인 신성여학교 재개교에도 혼신을 기울였다. 이 학교가 다시 문을 열자 무보수 교원으로 일하던 그는 정식 중학교로 설립 인가가 나자 무보수 교장을 지냈으며, 1953년 신성여자고등학교를 신설해 초대 교장으로도 일했다.
 
 
   의사로서도, 교육자로서도 가난했던 삶

 6ㆍ25전쟁 중에는 제주도로 몰려든 피란민에게 구호 손길을 펴느라 그는 여념이 없었다. 서울 소신학교(성신중학교)와 대신학교가 제주로 옮겨오자 같은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인 노기남 대주교와 함께 신성여중에 피란 신학교를 개설하고 뒷바라지했다. 또 제주로 피란을 온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원들도 보살폈다.

 몰려든 피란민들에게 구호물자를 나눠주고, 병을 치료하고, 간호하는 법을 가르치느라 그는 늘 파김치가 되곤 했다. 특히 개업의였음에도 그는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서 피란민을 포함 극빈자들을 주로 치료, 재정적 어려움이 매우 컸다.

 그럼에도 그는 12살 영세 때 봉헌한 첫마음을 잃지 않았다. 당시 비망록을 보면 그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항상 천주께 감사하자. 천주 사업을 위해 몸 바친 이상 내 개인 문제로 고민하지 말자. 성경에도 있지 않은가. 재물을 세상에 쌓아두는 것보다 하늘에 쌓아두는 것이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는 의사로서도 가난했고, 교육자로서도 가난했다. 그래도 그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풍요로웠다. 재속 프란치스코회 입회 서약은 그에게 소유 없이 사는 가난에 대한 풍요로움을 늘 일깨웠다. 이같은 피란민과 빈민 구호 여정이 교황청에 알려져 그는 1955년 교황청에서 한국인으로는 네 번째로 십자훈장(교육ㆍ사회ㆍ의료 사업 부문)을 받았다.

 1960년 신성여중ㆍ고 교장직을 끝으로 퇴직하고 신앙생활에 전념하던 그는 대한적십자사 제주도지사 부지사장으로 활동하다가 1964년 교육자치제가 시행되면서 제주도 초대 교육감에 선출됐다. 전국 최초 여성 교육감이었다. 재직 중 도농간 학력 차를 극복하고자 대정여중ㆍ고, 한림여중ㆍ실업고 등을 설립했으며, 제주교육대학을 설립하기도 했다.

 열정적이었지만 조용했고 업적 또한 많았지만 겸손했던 그는 제주교구, 나아가 한국천주교회에 빛나는 모범이 됐다. 보이지 않는 사랑으로 참된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의 여정을 걸어간 그는 1977년 2월 하느님 품에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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