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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철학

西洋哲學

by 巡禮者 2010. 5. 3.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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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철학

 

그리스 철학(Greek philosophy)


고대 그리스에서 이루어진 철학. BC 585년 밀레토스의 탈레스가 활동을 시작한 때부터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명령으로 아카데미학원이 폐쇄된 529년까지 1000년 이상 지속된 고대의 철학을 말한다. 그리스 철학의 절정은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가 속했던 시기, 즉 아테네가 ‘헬라스의 학원’이었던 고전기인데, 그리스 철학은 이 시기를 전후하여 3기로 나눌 수 있다.


제1기는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이라고 불리는 필로소피아(愛知學)의 형성기이다. 이 때의 관심은 인간을 둘러싼 자연의 근원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데 있었는데, 이오니아 식민지의 그리스 사상가들이 동방에서 습득한 기술에서 ‘원리와 원인에 관한 지식’으로 전환하여 철학의 정초를 이루었다.


제2기는 아테네 철학이라고 불리는 것으로, 원래 아티카에는 독창적인  철학자들이  없었는데, 페르시아 전쟁(1차 BC 490, 2차 BC 480) 이후 아테네가 그리스 문화의 중심이 되면서 명성이 있는 사상가들이 대거 아테네에 몰려들어 여기에 그리스 철학이 꽃피우게 되었다. 이 때 대우주(자연)에 쏠렸던 관심이 소우주인 인간에게 돌려졌다.


제3기는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시기를 말한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BC 336∼BC 323)에 의한 헬라스(Hellas, 고대(古代) 그리스인(人)이 그리스를 자칭하는 경우의 이름. 현대 그리스인도 마찬가지로 자국칭(自國稱)으로 사용하고 있는데, ‘엘라스’라 발음하고 있다. 그리스인은 그들의 나라는 전설적인 영웅 헬렌(Hellen)이 만든 것이며, 그들은 모두 헬렌의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이렇게 일컫는다.) 통일과 동방원정이 있은 후 그리스 철학은 순수한 그리스인이 아닌 사람들에 의해 그리스의 특색을 상실함과 동시에 세계의 그리스화를 꾀하는 헬레니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이상의 3시기를 살펴보면 그리스 철학은 지역적으로도 지중해 전역에 걸쳐 있어 그리스 본토뿐만 아니라 아시아·남이탈리아·아프리카의 북동쪽에 이른다. 민족적으로도 그리스인뿐만 아니라 로마인·유대인·이집트인까지 포함되어 있다. 사용어도 그리스어 외에 라틴어가 사용되었다. 이렇게 광범위한 그리스의 철학을 한마디로 특징짓기는 힘들다.


《순수이성비판》 서문에서  I.칸트가 표현한 대로 그리스 철학은 ‘하나의 학문의 확실한 진로’를 보여주었다. 인류의 긴 암중모색 이후 그리스인은 인류가 더 이상 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확실한 진로를 발견했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철학은 그리스를 제외하고는 성립할 수 없다.


【소크라테스 이전의 철학】 만물의 원리와 원인을 추구했던 최초의 철학자들이 탄생한 곳은 이오니아 식민지의 밀레토스이다. 식민지에 나온 사람들은 타향살이에서 전통적인 풍습에 사로잡히지 않고, 새로 닦은 생활지반에서 오는 여유로 모든 편견에서 벗어나 자연에 대해 활기 있는 질문을 하였다. 만물이 그것으로 이루어지고 최초로 그것에서 생성되고, 또 마침내 그것에서 소멸되는 것, 실체는 변하지 않고 모습만 변하는 것, 그런 근원이 무엇인지를 추구하였다. 이오니아학파에 속했던 탈레스·아낙시만드로스·아낙시메네스는 각각 그것을 ‘물’ ‘무한한 것’ ‘공기’라고 하였다. 이들의 탐구방식은 자연에 대한 최초의 과학적 설명이었다. 한편, 이오니아 지방에서 태어나 남이탈리아로 이민한 사상가들이 있다.


사모스섬에서 크로토네에 갔던 피타고라스와 콜로폰에서 남이탈리아의 엘레아로 갔던 크세노파네스가 바로 그런 사상가들이다. 영혼의 불멸을 믿고 하느님과의 합일을 희구하는 남이탈리아의 종교적 분위기에서, 그들은 이오니아 사람들의 경험적 태도와는 달리 추상적이고 종교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피타고라스는 만물의 근원을 ‘수(數)’라고 하면서도 철학하는 목적을 영혼의 정화에 두고 종교 교단을 창설하였으며, 크세노파네스는 그리스 대중이 신봉하는 의인적인 신화를 비판하면서도 전체로서 보고 듣고 생각하는 인격적인 유일신을 소개하였다. 이탈리아학파라고 불리는 이들의 철학적 유산에 의해, 그리스철학에서 감각에 의해 알 수 있는 것과 정신에 의해 알 수 있는 것 2개의 세계로 구분된다. 엘레아 출신인 파르메니데스는 정신의 활동이 감각의 활동보다 더 훌륭하다는 것을 말하여 플라톤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실재는 부동·불변의 ‘있음’이라고 보았던 파르메니데스에 맞서 ‘만물은 유전(流轉)한다’고 말한 헤라클레이토스는 에페소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흐름을 받았다. 한편 파르메니데스가 존재의 생성과 소멸을 부정한 데서 초기의 자연철학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는데, 사물의 혼합과 분리라는 방향으로 추구하여 다원론(多元論)이 대두되었다. 여기에 엠페도클레스의 ‘4개의 뿌리’, 아낙사고라스의 ‘씨앗’, 그리고 데모크리토스의 ‘원자(原子)’가 나온다. 여기에도 이탈리아와 이오니아의 흐름의 특질이 있어, 엠페도클레스는 시칠리아 출신으로 이탈리아의 정열로써 혼의 정화를 외쳤고, 아낙사고라스는 클라조메나이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과학정신을 이어받아 태양은 신이 아니고 불붙은 돌덩이라고 외쳐 화를 입었으며, 데모크리토스는 아브데라 출신으로 이오니아의 흐름을 따라 기하학적으로 분할할 수 있으나, 물질적으로 더 분할할 수 없는 원자를 말하였다.【아테네의 철학】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도 급속한 발전을 하여 봉건적 귀족제도가 붕괴되고 민주제도가 형성되었다. 페리클레스의 문화정책(BC 460∼BC 429)으로 학자들이 각지에서 아테네에 모여들어 젊은이들에게 삶의 교양을 가르쳤다. 이들이 궤변론자라고 일컫는 소피스트들이다. 그들의 대표적 인물은 아브데라 출신인 프로타고라스, 레온티노이 출신인 고르기아스, 엘리스 출신인 히피아스, 케오스 출신인 프로디코스 등이다. 이들은 넓은 분야에 걸쳐 스스로 지자(知者)라고 말했으나, 진리를 구하기보다는 진리에서 생기는 이득을 얻는 데 더 관심을 가졌기 때문에, 플라톤은 그들을 ‘정신양육의 무역상인이나 소매업자’라고 비난하였다. 그들은 진리의 상대성을 주장하여, 사람은 판단하는 기준에 따라, 또 장소와 시간에 따라 동일한 것도 다르게 판단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참과 거짓, 선과 악이 없다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에 의하면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고, 각자의 감각에 의해 파악된 세계가 곧 그에게는 참된 세계이며, 각자가 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참이라는 것이다. 이런 진리의 상대론을 펴나가면 인간에게는 보편적인 진리가 없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 보편적인 진리를 수립하기 위해 악전고투한 사람이 소크라테스이다. 그는 소피스트의 주장이 참인지 아닌지를 검토하기 위해 물음과 답에 의한 대화방식을 택하였다. 이 방식으로 그는 서로의 의견을 교환하여 수정을 통해서 하나의 진리에 도달하게 하였다. 가령 ‘덕이란 무엇인가?’라는 논제를 놓고 개개의 덕행을 검토하여 귀납적으로 덕의 본질에 알맞은 정의(定義)를 구한다. 이 보편적인 정의를 얻어야 비로소 덕에 대한 지식이 확립된다. 소크라테스는 지식과 행위의 일치를 주장하였다. 하여야 할 것을 알면서 그 반대의 행위를 하는 자는 지자일 수 없다고 보았다. 그의 철학적 순교 역시 지행일치(知行一致)의 세계관에서 유래된 것이다.


플라톤은 그의 스승 소크라테스의 최후를 보고 자기 삶을 스승이 못다한 일을 완수하는 데 바치기로 결심하였다.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보편적인 것이란 인간의 감각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피타고라스학파가 사물을 ‘수의 모방’이라고 했던 것처럼, 감각적인 것은 그 본질과 떨어져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사람이 정신적인 눈을 떠서 볼 수 있는 것만이 참된 존재라고 보고, 그는 이것을 ‘이데아(idea)’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에게 20년 간 철학을 배웠는데, 나중에 독자적인 체계를 세웠다. 그는 이오니아의 흐름을 받아 경험의 세계를 중요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그의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이데아론(論)에 대하여 그는 같은 종류의 여러 사물 속에는 하나의 공통개념(이데아)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공통개념을 사물에서 독립시킬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물을 떠난 본질이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데아[形相]와 감각적 재질[質料]의 결합을 강조하여 ‘질료·형상설’을 내세웠다. 플라톤의 경우, 인간은 모름지기 이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갈망하여 감각의 세계를 떠나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충동, 즉 에로스(eros:사랑)를 목표로 하는 데 대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의 행복을 이성에 의한 영혼의 활동으로 규정짓고, 위로 향하여 올라가는 사랑이 아닌 시민의 상호협조로서의 필리아(philia:우정)를 강조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의 철학】 마케도니아의 왕 알렉산드로스의 출현은 그리스 철학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알렉산드로스가 건립한 대제국 밑에서 종래의 도시국가(폴리스) 중심의 정치철학이나 도덕철학이 그 의미를 잃고, 세계국가(코스모폴리스)의 성격을 띠게 되어 국가의 문제보다는 개인의 삶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또한, 로마의 J.카이사르의 세계 통일(BC 46)이 이루어진 후, 그리스 철학은 아테네에서 서쪽은 로마로, 동쪽은 알렉산드리아로 옮아갔다. 국운이 쇠잔해진 그리스인들로서는 이론적 추구의 여유가 없어지고 옛 철학이론을 현실에 적응시키는 실천철학으로 바꾸어 놓았다. BC 3세기에 아테네에서는 키프로스 출신인 제논이 붉은 주랑(柱廊)에서 창설한 스토아학파와, 에피쿠로스가 그의 정원에서 가르친 에피쿠로스학파가 대립되었다. 스토아학파는 헤라클레이토스의 철학과 ‘무욕의 생활’을 이상으로 했던 키니코스학파(소크라테스 추종학파)의 흐름을 받았고, 에피쿠로스학파는 데모크리토스의 철학과 ‘쾌락이 선이다’라는 키레네학파(역시 소크라테스 추종학파)의 흐름을 받았다.


이 두 학파는 모두 인간의 목적이 행복에 있고, 인생은 자연에 따르는 생활에서 그 행복이 획득된다고 믿었으나, 스토아학파는 그 행복이 자족생활(自足生活)에 있다고 보는 데 반하여, 에피쿠로스학파는 쾌락에 있다고 보고 대립하였다. 그러나 스토아학파의 ‘무감동(apatheia)’이나 에피쿠로스학파의 ‘혼의 평안(ataraxia)’은 다같이 인간의 정욕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하는 비슷한 입장이라 하겠다. 한편, 엘리스 출신인 피로가 체계화한 회의론은, 원래 인간이란 사물의 참된 본질을 알 수 없으므로 헛된 판단을 중지하는 것이 좋다는 ‘판단중지’를 내세워, 그것으로 혼의 평안을 얻는 것이 참된 행복이라는 입장이다. 스토아학파는 로마에 가서 네로 황제의 교사였던 세네카, 노예였던 에픽테토스, 로마의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등의 학자들로 이어졌고, 에피쿠로스학파는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어머니 플로티나 같은 신봉자를 로마에서 얻었다. 동쪽 알렉산드리아로 뻗어나간 그리스 철학은 동방의 헤브라이종교와 접촉하여 이른바 ‘구제(救濟)의 철학’으로 나타났다.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필론은 플라톤 철학과 헤브라이종교의 결합을 꾀하여 인간은 하나님 속에 머무는 행복을 위하여 자기 의식에서의 탈출(황홀)을 지향하였고, 세계와 하나님과의 중간자로서 ‘로고스신학’을 제창하였다. 신플라톤주의자라고 일컫는 플로티노스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육받은 이집트인으로 후에 로마에 가서 철학을 가르친 사람인데, 그는 플라톤에 따라 최고의 것은 존재를 초월하는 일자(一者)라고 보았다. 태양에서 광선이 비추어 나오듯, 이 일자에서 예지(nous)가 유출되고, 이 예지의 하부에서 영혼이 흘러나오고, 영혼 다음에 감각계가 뒤따라 유출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그는 완전한 것에서 불완전한 것으로 내려오는 길을 보여주었는데, 인간은 상고(上告)라는 기도와 주술의 작용에 의해 반대 방향으로 향할 수 있어 하느님과의 합일(合一)을 이상으로 생각하였다.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에 그리스도교 보호를 선포하고, 유스티니아누스황제가 플라톤의 학원을 폐쇄하자 고대의 그리스 철학은 그리스도교로 이어졌다.


소피스트(Sophist)

BC 5세기 무렵부터 BC 4세기에 걸쳐 그리스에서 활약한 지식인들의 호칭. 아테네를 중심으로 당시의 그리스 전역을 편력하면서 변론술과 입신출세에 필요한 백과사전적 지식을 가르쳐, 많은 보수를 받았다. 아브데라의 프로타고라스, 레온티니의 고르기아스, 엘리스의 히피아스, 케오스의 프로디쿠스 등이 유명하다. 소피스트란 원래 ‘현인(賢人)’ 또는 ‘지자(知者)’를 의미하였다. 그들은 거의가 지방출신 학자들로, 각기 자부하는 지식과 기술을 갖고 있어 개인이나 국가에서 돈을 받고 그것을 제공하였다. 민주주의 사회의 시대적 요청에 따라 가장 중요한 과목은 변론술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일신(一身)을 위해서나 국가를 위해서 선(善)을 도모하고, 언론이나 행위에서도 유능한 사람이 되는 길’을 청년들에게 가르친다고 자부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가르친 것은, 개인이나 국가에 대해 선이란 이런 것이라는 지혜가 아니라, 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선한 자인 체하는 기술만을 가진 데 불과하였다. 이 같은 사실을 밝힌 것이 철학자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등이다. 이후 ‘소피스트’란 말은 ‘궤변을 일삼는 무리’를 의미하게 되었고, 궤변학파라고도 불리었다.


프로타고라스(Protagoras, BC 485?∼BC 414?)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트라키아의 아브데라 출생. 소피스트로 자칭한 최초의 인물이다. 아테네를 여러 번 찾았고, 만년에는 시칠리아섬에 있으면서 명성을 떨쳤다. 아테네에서는 페리클레스와 친교를 맺었고, 새로이 건설된 남이탈리아의 식민지 투리오이(BC 441)의 헌법을 기초하였다. 그의 유명한 인간척도설(人間尺度說)은 플라톤에 의해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하여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하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라는 말로 전해진다. 이 말의 해석은 여러 갈래이나 일반적으로는 진리의 기준을 개개의 인간의 감각에서 찾으려는 것으로 보는 해석이 유력하며, 그 때문에 이 말은 절대적인 진리의 존재를 부인하고 상대주의를 표방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그는 우주의 이법(理法)에 관해서 과학이 주장하는 것에 회의를 품었고, 신의 존재에 대해서도 불가지론(不可知論)의 태도를 취하였다.


소크라테스(Socrates, BC 469∼BC 399)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아테네 출생. 자기 자신의 ‘혼(魂:psyche)’을 소중히 여겨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였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가를 물어, 거리의 사람들과 철학적 대화를 나누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그는 결국 고발되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재판 모습과 옥중 및 임종장면은, 제자 플라톤이 쓴 철학적 희곡(플라톤의 대화편) 《에우추풀론》 《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파이돈》 등 여러 작품에 자세히 그려졌다. 죽음 앞의 평정청랑(平靜淸朗)한 그의 태도는 중대사에 직면한 철학자의 진면목을 보여준다. 소크라테스는 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주변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그에 관하여 썼고, 우리들은 그 글을 통해서 그를 알 뿐이다. 그러나 그 가운데 누구를 얼마만큼 믿어야 할지는 문제이며, 이것을 철학사상 ‘소크라테스 문제’라고 일컫는다. 일반적으로 제자 가운데 가장 걸출한 철학자인 플라톤이 전하는 소크라테스상(像)을 골자로 하고, 여기에 다른 것을 보충하는 경우가 많다. 소크라테스의 젊었을 때의 일에 관하여 확실한 것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에게 낯익은 것은, 늙은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거리나 체육장에서 아름다운 청소년들을 상대로, 또는 마을의 유력한 사람들을 상대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착하다는 것은 무엇인가, 용기란 무엇인가에 관하여 묻고 있는 모습이다(이것을 소크라테스의 문답법이라 함).


이와 같은 문답의 주제는 대부분 실천에 관한 것들이었다. 그리고 그 문답은 항상 ‘아직도 그것은 모른다’라고 하는 무지(無知)의 고백을 문답자가 상호간에 인정하는 것으로 끝났다. 이 때 상대방은 소크라테스가 말은 그렇게 하지만 사실은 자기는 알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는 경우가 많아(소크라테스의 아이러니), 여기에서 자기의 무지를 폭로당한 사람들은 때로는 소크라테스의 음흉한 수법에 분노하였다. 그러나 소크라테스의 참뜻은, 모든 사람이 자기의 존재 의미로 부여된 궁극의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 그것을 묻는 것이 무엇보다도 귀중하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촉구하는 데 있다. 물론 소크라테스가 이 근거를 안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궁극적인 근거에 대한 무지를 깨닫고(무지의 지), 그것에 대한 물음을 통하여 이 ‘막다른 벽’ 속에 머무는 데 소크라테스의 애지(愛知:철학)가 있다.


그것은 내 자신을 근원부터 질문당하는 곳에 놓아 두는 것이며, 이러한 방법으로 내 자신이 온통 근원에서부터 조명(照明)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두 눈이 튀어나왔으며, 코는 짜부러진 사자코로 그 용모는 추하였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은 그의 말에 매료되고 그의 내면에 사로잡혔다. 이렇듯 외면과 내면의 이율배반에 그의 존재의 본질이 있다. 그 때까지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우주의 원리를 묻곤 하였는데, 소크라테스에서 비로소 자신과 자기 근거에 대한 물음이 철학의 주제가 되었다. 이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는 내면(영혼의 차원) 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다. 또한 자신에 대한 물음은 자기를 지탱하고 있는 보이지 않는 것(초월)에 대한 물음이라는 의미에서 그는 형이상학의 시조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소크라테스에게 있어 내면은 근거에 의해 질문당하는 데서 생기는 막다른 벽 안에 끝까지 머무는 애지의 동반자로서만 제시되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소크라테스는 외부와 내면의 틈을 통해 개시(開示)되는 근원의 문제를 철학적 관심을 중심으로 그 생(生)과 사(死)의 증거를 가지고 정착시킴으로써 서양철학의 무게를 한몸에 짊어지는 사람이 되었다.


산파술(maieutike) 

소크라테스의 대화 방법. 여기에는 소극적 측면인 소크라테스적 반어(反語:eironeia)와 적극적 측면으로서의 산파술을 생각할 수 있다. 전자는 대화의 상대자로부터 로고스(論說)를 끌어내어 무지(無知)의 자각, 아포리아에로 유도하는 소크라테스의 독특한 무지를 가장(假裝)하는 태도이고, 후자는 상대방이 제출한 논설이나 질문을 거듭함으로써 개념규정을 음미하고 당사자가 의식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상을 낳게 하는 문답법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스스로 이제 새로운 지혜를 낳을 수 있는 능력은 없으나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낳는 것을 도와 그 지혜의 진위(眞僞)는 식별할 수 있다고 하면서, 자기의 활동을 어머니의 직업인 산파에 비유, 산파술이라고 불렀다.


아포리아(aporia) 

그리스어로 ‘통로가 없는 것’ ‘길이 막힌 것’이라는 뜻. 철학용어. 사물에 관하여 해결의 방도를 찾을 수 없는 난관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해결이 곤란한 문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는 대화의 상대를 아포리아에 빠뜨려 무지(無知)를 자각시켰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포리아에 의한 놀라움에서 철학이 시작된다”고 하였다. 플라톤의 경우에는 대화에서 로고스의 전개로부터 필연적으로 생기는 난관을 아포리아라고 하였다.



플라톤(Platon, BC 429?∼BC 347)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이상학의 수립자. 아테네 출생. 명문(名門) 출신으로 젊었을 때는 정치를 지망하였으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되는 것을 보고 정계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인간 존재의 참뜻이 될 수 있는 것을 추구, philosophia(愛知:철학)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BC 385년경 아테네의 근교에, 영웅 아카데모스를 모신 신역(神域)에 학원 아카데메이아(Akademeia)를 개설하고 각지에서 청년들을 모아 연구와 교육생활에 전념하는 사이 80에 이르렀다. 그 동안 두 번이나 시칠리아섬을 방문하여 시라쿠사의 참주(僭主) 디오니시오스 2세를 교육, 이상정치를 실현시키고자 했으나 좌절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시도는 그의 철학의 방향을 잘 말해 준다. 생전에 간행된 거의 30편에 이르는 저서는 그대로 현재까지 보존되었는데, 1편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일종의 희곡작품으로서 여러 가지 논제(論題)를 둘러싸고 철학적인 논의가 오간 것이므로 《대화편(對話篇)》이라 불린다. 소크라테스가 주요 등장인물이다. 연대에 따라 ① 소크라테스를 중심으로 주로 ‘덕(德)이란 무엇인가?’를 논하고, 대체로 아포리아(aporia)에 빠진 채 끝나는 전기 대화편(前期對話篇:《소크라테스의 변명》 《크리톤》 《메논》 《프로타고라스》 《고르기아스》 《라케스》 《카르미데스》 등), ② 영혼의 불멸에 관한 장려(壯麗)한 미토스(mythos:神話)로 꾸며지고 소크라테스에 의해 이데아론(論)이 펼쳐지는, 문예작품으로서는 가장 원숙한 중기 대화편(《파이돈》 《파이드로스》 《향연》 《국가론》  등), ③ 철학의 논리적 방법에 대한 관심이 농후하고, 영혼과 이데아설이 소크라테스의 모습과 함께 점차 사라지는 것처럼 보이는 후기 대화편(《파르메니데스》 《테아이테토스》 《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필레보스》 《티마이오스》 《노모이》 등)으로 나눈다. 


플라톤에게 필로소피아란 소크라테스의 필로소피아이며 소크라테스야말로 진정한 ‘철학자’였다. 전기에서 중기에 걸친 대화편의 대부분이 소크라테스의 추억을 간직하고, 소크라테스 속에 구현(具現)되는 ‘철학자’를 변호·찬양하려 한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재판 장면을 적은 《소크라테스의 변명》, 죽음에 직면한 철학자의 태도를 묘사한 《파이돈》은 말할 나위도 없고, 《향연》이나 《국가론》도 또한 그와 같은 뜻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의 하나이다. 소크라테스에게 필로소피아란, 가장 중요한 것을 모른다는 자신의 무지(無知)를 깨닫는 데 있었다. 이 ‘무지를 깨닫는 일’ 속에 머물며 아포리아 속에 있으면서 근원으로부터의 물음에 스스로를 맡기는 일이 바로 필로소피아이다. 전기 대화론에서, 대화가 항시 아포리아에 수렴(收斂)되고 무지의 고백으로 끝나는 것은 이와 같은 사실을 말해 준다. 아포리아에서 빠져 나오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포리아에 머물기 위한 필로소피아의 술책이 미토스와 디알렉티케(dialektike:問答法)이다.


시간과 더불어 변하는 일 없이 동일한 것으로서 머무는 영원불변한 것을 플라톤은 이데아(idea:形相)라 불렀다. 이데아는 생성(生成)에 대한 존재, 다(多)에 대한 하나, 타(他)에 대한 동(同)이며, 육체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고, 영혼의 눈[目]인 이성에 의해서만 관찰할 수 있다. 생성의 세계 가시계(可視界)는 존재의 세계(불가시계)를 분유(分有)하며, 모방하는 데에서만 이에 입각하여 존재하고, 두 세계 사이에는 실물과 그림자, 실물과 모상(模像)의 비례가 있다(《국가론》의 선분(線分)·동굴·태양의 비유, 《티마이오스》의 우주창성론(宇宙創成論) 등). 인간이 탄생과 죽음에 의해서 한계지어진 ‘이 세상(여기)’과 ‘저 세상(저기)’의 구별을 플라톤은 이 두 세계를 따로 상대하는 것으로 구상하였고(《파이돈》 《파이드로스》 등), 이 양계(兩界)를 편력하는 불멸의 영혼에 관한 광채육리(光彩陸離)한 미토스로써 이를 장식하였다. 영혼은 원래 천상(天上)에 있으면서 참 실재(實在)의 관조(觀照)를 즐겼으나 사악한 생각 때문에 지상에 전락하고 땅(육체) 속에 매몰되어 생물이 되었다(‘육체=묘표(墓標)’설). 애지는 영혼이 지상의 사물 속에서 천상의 사물과의 유사점을 발견하고, 참 실재를 상기하여(‘상기설(想起說)’), 이를 간절히 소망하는 일이다(‘에로스설’)라고 설명할 수 있다(《파이드로스》 《향연》 《메논》). 그러나 미토스를 도그마로 하고 거기에서 고정된 철학설을 구성하는 일은 플라톤이 뜻하는 것이 아니다. 미토스는 오히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자기가 놓여 있는 위치를 확인하기 위하여 아포리아 밖에 내던진 자기 존재의 겨냥도이며, 아포리아로서 응축된 ‘근원에의 관련’을 형상으로 하여 우주론적인 규모 속에 틀을 만들고 투영하는 것이다. 아포리아에 있는 자가 미토스의 형상을 거부 배척하고, 아포리아에서 묻고 있는 존재 그 자체에 대해서 그 ‘무엇인가’를 ‘말’ 속에서 질문하는 데에 디알렉티케가 성립된다. 아포리아 속에 있는 자는 질문 속에 놓이게 된다. 질문은 사물이 ‘무엇(A)인가, 아닌가’를 질문하나, 그것은 그 무엇인가(A)를 그것과 다른 것(A가 아닌 것)으로부터 분리하게 됨으로써 가능하며, 이 질문에 대답함으로써 인간은 이 양자(A와 A가 아닌 것)를 포괄하는 전체와의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 전체와 부분과의 뒤얽힘에서 다(多)를 꿰뚫는 하나를 보는 것이 애지자(愛知者)이다(《소피스테스》 《폴리티코스》). 플라톤은 지식을 고정된 체계로서 문자로 표시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근원을 묻는 애지의 진행에서 이 물음을 묻게 하고, 이 진행을 배후에서 떠받치는 것이 이데아이다. 이데아는 애지의 진행(흐름) 속에 어느 때 갑자기 보이게 된다.

哲人政治(rule of philosophers)

플라톤의 정치사상으로 대표되는 이상정치. 플라톤은 저서 《국가》에서, 이상국가의 실현을 위해서는, 진정한 학문이며 인생지도의 지침, 인간형성의 힘으로서의 철학으로 국가지배가 통일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실현방법은, 선(善)의 이데아의 인식과 올바른 인간의 개념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지배한다는 것 그 자체에 대한 반성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배자에게 있어서의 ‘지배의 논리’로만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단지 ‘이상정치(理想政治)’만을 의미할 때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Aristoteles, BC 384∼BC 322)

고대 그리스 최대의 철학자. 스타게이로스 출생. 17세 때 아테네에 진출, 플라톤의 학원(아카데미아)에 들어가, 스승이 죽을 때까지 거기에 머물렀다. 그 후 여러 곳에서 연구와 교수를 거쳐(이 동안에 알렉산드로스대왕도 교육), BC 335년에 다시 아테네로 돌아와, 리케이온에서 직접 학원을 열었다. 지금 남아 있는 저작의 대부분은 이 시대의 강의노트이다. 스승 플라톤이 초감각적인 이데아의 세계를 존중한 것에 대해,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에게 가까운, 감각되는 자연물을 존중하고 이를 지배하는 원인들의 인식을 구하는 현실주의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 두 철학자가 대립되었다는 생각은 피해야 한다. 왜냐 하면,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에서 깊은 영향을 받아 출발하였고, 뒤에 독자적인 체계를 구축하는 데도 플라톤의 철학적 범주 안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의 사상적 특징은 소여(所與)에서 출발하는 경험주의와 궁극적인 근거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근원성, 지식의 전부분에 걸친 종합성에 있다.


논리학】 학문적인 인식은 사물이 지닌 필연적인 관련을 그 원인에 따라 인식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하고, 그 방법으로서 3단논법의 형식을 확립하여 형식논리학의 기초를 닦았다. 그리고 3단논법이 이러한 논리에서 출발해야 하는 제1전제를 말한 공리론(公理論)도 뛰어났다. 그의 논리학서는 《오르가논:Organon》이라는 이름으로 후대에 전하여졌다.


【자연학】 운동·변화하는 감각적 사물의 원인연구가 자연학이라고 불린다. 그는 여기서 네종류의 원인[四因論]을 들었다.

① 질료인(質料因:사물이 ‘그것’에서 되어 있는 소재), ② 형상인(形相因:사물이 ‘그것’으로 형상되는 것으로, 사물의 정의가 되는 것), ③ 동력인(動力因:‘그것’에 ‘의하여’ 사물이 형성되는 원인이 되는 힘), ④ 목적인(目的因:그 사물 형성의 운동이 ‘그것’을 지향하여 이루어지는 목적)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②, ③, ④는 자연물에서는 하나이므로, 결국 질료와 형상으로 자연물은 이루어지고, 질료 내에서 형상이 자기를 실현해 가는 생성 발전의 과정으로서 자연의 존재는 파악된다. 질료는 거기서 형상을 수용할 수 있는 능력 디나미스[可能態]로, 최종 목적에 따라 파악되므로, 최종목적(텔로스)인 엔텔레케이아[完成態], 에네르게이아[現實態]야말로 자연 존재의 우월하는 원인이라고 한다(목적론적 자연관).


【형이상학】 존재자의 일부를 대상으로 하는 특수학에 대하여, 존재하는 모든 사물에서 으뜸되는 원인들을 탐구하는 학문을 소피아(지혜) 또는 제1철학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동시에 보다 고귀한 존재자를 다루는 학문으로서 신학이기도 하다. 신(神)은 으뜸되는 존재자이기 때문에 모든 사물의 존재 원인이기도 하다. 신은 질료에서 떠나, 영원 불변한 관조(觀照) 안에 머무는 자기사유자(自己思惟者)로서 최고의 현실태이고, 그것 자신은 부동이면서 ‘사랑을 받는 것’으로서 일체의 것을 움직이는 ‘부동의 제1동자(動者)’이다. 그것은 자연계를 초월하는 자연계의 근거로서의 종극목적이다. 이 학문은  뒤에 형이상학(메타피직스)이라고 불렸는데, 그 이름은 이 학문이 뒤의 전집 편집에서 주어진 위치에서 유래된 것이다.


【윤리학】 행위의 종극 목표는, 신의 자기사유의 활동을 모방하는 이성적 관조에 놓여 있으나, 이것은 약간의 사람에게 일시적으로 허용되는 것에 지나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이성적 질서를 실현하는 중용(中庸)으로서의 덕이 행위의 목적이다.


【정치학】 인간은 국가적 동물이다. 공공의 생활 가운데서 인간의 선(善)은 실현된다. 그런까닭에, 윤리학은 정치학의 일부를 이룬다고 생각되고 있다. 중산계급을 중심으로 하여 다스림을 받는 자가 교대로 다스리는 자가 되는 곳에서 실현될 수 있는 최선의 나라 제도가 있다고 한 정체론(政體論)은 온건한 민주주의의 뛰어난 이론적 뒷받침을 한다고 할 수 있다.【시학】 창작의 본질은 모방(模倣)에 있다. 비극은 숭고한 행위의 모방이며, 숭고한 인물이 불행에 빠져가는 과정을 모방함으로써, 관객 가운데서 일어나는 연민과 공포의 정을 이용하여 이와 같은 정서를 정화(淨化)하는 것을 본질로 한다.


中庸論 

아리스토텔레스 윤리학의 중심적인 사상의 하나로서 덕(德)은 과잉과 과소의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중간(mesotes)’에 존재한다는 설. 예를 들면, 쾌락에 관한 과잉과 과소는 방탕과 무감각이지만 그 중간에는 절제(節制)의 덕이 있다. 또한 금전의 수수(授受)에 관한 과잉과 과소는 낭비와 인색에 있지만 그 중간에는 대도(大度)의 덕이 있다. 여러 가지 덕목(德目) 중에서 그 중간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은 양 극단을 기준으로 하여 양적(量的)으로 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양 극단은 ‘적당한 정도(程度)’로서의 중간을 기준으로 하여 그 곳으로부터의 일탈(逸脫)로서 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적당한 정도는 행위자인 인간의 존재에 의거하여 규정되는 것이므로 중용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에 있어 한층 원리적인 존재론(存在論)에 의거하여 이해되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중용의 개념을 초과와 부족에 대한 균제(均齊)라 하고 또 산술적인 비례중항(比例中項)으로 대표되는 것과 같은 사항 그 자체에서의 중용과, ‘우리들(지식층)에게서의 중용’으로 구별하여 후자를 윤리적인 덕의 본질적 속성이라 하였다. 따라서 중용을 본성(本性)으로 하고 최선(最善)으로 하는 덕(진실)에 대하여는 초과(진실에 대한 虛飾)도 부족(卑下)도 악덕(惡德)이 된다.


論理學(logic) 

인간의 지식활동에 관련된 특정한 종류의 원리들을 분석하고 명제화하며 이들을 체계화하는 분야의 학문. 이 지식은 일반적으로 두 종류로 나누어진다. 첫째는 ‘김씨의 큰 아이는 아들이다’와 같은 지식이다. 또한 ‘김씨의 큰 아이는 아들이고 그의 둘째 아이도 아들이고 셋째도 아들이다. 그리고 김씨는 현재 세 아이밖에 없다. 고로 김씨의 아이들은 모두 아들이다’와 같은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을 사실적 지식(事實的知識)이라고도 하고 귀납적 지식(歸納的知識)이라고도 한다. 둘째는 ‘모든 남자는 사람이다. 그리고 에디슨은 남자이다. 그러므로 에디슨은 사람이다’에서와 같은 지식이다. 이를 관계적 지식(關係的知識) 또는 연역적 지식(演繹的知識)이라고 한다. 두 경우의 지식은 모두 간단히 명시될 수 있다. 귀납적인 경우 ‘김씨의 아이들은 모두 아들이다’라는 주장과 연역적인 경우 ‘에디슨은 사람이다’라는 주장이다. 여기에서 논리학은 이러한 주장들에 대한 근거로서 제시된, 첫째 경우의 사실들과 둘째 경우의 명제(命題)들이 각기의 주장들에 대해 어떤 종류의 원리에 입각한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조사한다. 첫째의 근거와 주장의 추리관계를 귀납적이라 하고, 둘째의 근거와 주장의 추리관계를 연역적이라 한다. 논리학은 이러한 특수한 관계를 연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차원의 지식의 원리를 취급하는 물리학이나 사회학과 구별된다. 따라서 논리학은 크게 귀납논리학(歸納論理學)과 연역논리학(演繹論理學)으로 구분된다. 양자는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의 긴 역사를 가지고 있지만, 특히 후자는 19세기 말부터 크게 발전하였고 대부분의 논리학 교재는 이를 중점적으로 다룬다. 연역논리학은 연역적 추리에 관련된 많은 문제를 다룬다. 애매와 모호의 구조를 밝히고 오류의 유형을 나누며 추상·정의·분류의 개념을 명확히 한다. 의미의 표준을 제시하고 번역의 가능성을 논의한다.


사유(思惟)의 법칙과 추리(推理)의 개념, 그리고 체계에 대해서 간단히 서술하면 다음과 같다. 사유의 법칙으로 알려진 것들은 보통 3가지가 있다. 첫째는 ‘A는 A이다’라는 동일률(同一律)로서 참인 명제는 참이라는 것이다. 둘째는 모순율(矛盾律)로서 ‘어떠한 명제도 동시에 참이면서 또한 거짓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어떠한 명제도 참이거나 거짓일 뿐 그 중간치는 없다’라는 배중률(排中律)이다. 과거에는 이 세 명제들이 법칙으로 불렸고, 영원하며 절대적이라 믿었다. 그래서 논리적 법칙으로 불리기도 하면서 이에 근거한 논리학은 역사가 없다고도 하였다. 논리학은 수정할 수 없으므로 변할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치논리학(多値論理學)의 체계는 배중률을 거부하고, 시제논리나 직관주의 논리는 모순율을 수정한다. 그리고 양자논리는 동일률까지 재고하고 있다. 이 명제들을 받아들이는 체계에서는 법칙명제일 수 있지만 모든 체계에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그러나 체계에 따라서는 이 명제들이 추리의 원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추리에는 타당한 추리와 부당한 추리가 있다. 추리란 전제들과 결론의 관계이며 타당성은 이 관계의 어떤 성질이다. 그리고 전제들과 결론으로 이루어진 명제들의 집합을 논의라 하므로 타당성은 논의의 성질이 된다. 타당이란 전제들이 참일 때 결론이 거짓일 수 없는 논의의 성질이다. 앞의 에디슨의 논의가 그 예이다. 또한 ‘한국의 모든 대학들은 시골에 있다.


그리고 이화여자대학은 한국의 대학이다. 그러므로 이화여자대학도 시골에 있다’라는 논의도 그 전제와 결론이 실제로 거짓이지만 타당하다. 왜냐하면 전제들이 참이라면 결론이 거짓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당이란 전제들이 참이라 할지라도 결론이 거짓일 수 있는 논의이다. 예를 들면, ‘모든 프랑스 사람은 프랑스를 사랑한다. 그리고 드골은 키가 크다. 그러므로 드골은 프랑스를 사랑한다’라는 논의는 전제들과 결론이 모두 참이라 하더라도 부당하다. 왜냐하면 전제들이 참이라 하더라도 결론이 거짓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추리의 기술 및 그 장치에 대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삼단논법(三段論法)을 유형별로 논의한 데서 비롯되었고, 현대에 와서는 기호체계(記號體系)를 이루어 강력한 장치를 갖게 되었다. 이에 대해서는 ‘명제논리학’과 ‘기호논리학’을 참조할 수 있다. 현대에 와서는 어떤 논리학도 하나의 체계 안에서 제안된다. 예를 들면 B.A.W.러셀의 논리체계는 앞의 3개의 사유법칙 명제들 중 어느 하나도 그의 4개의 공리(公理)에 포함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그 명제들은 러셀의 체계 안에서 정리(定理)로서 유도될 수 있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어떤 체계 안에서는 그러한 어떤 명제가 유도될 수 없다. 그러면 어떤 명제는 이 체계에서 거짓이지만 러셀 체계에서는 참이 된다. 그러므로 이제 논리체계란 채택하는 공리들과 추리의 규칙에 따라 상대화한다. 그리고 어떤 비약에도 불구하고 이 점을 이용해 볼 수 있다.


논리체계란 어떠한 이론에도 스며들어 있으므로 어떤 인식(認識)은 체계에 따라 참일 수도 있고 거짓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이론의 논리체계를 분명히 하는 경우 그 인식의 논리를 얻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근거로 ‘개념(槪念)의 논리’라는 표현이 가능하고 개념분석이 근본적으로 논리적 활동임을 알 수 있게 된다. 귀납논리학은 현재의 관찰된 사실로부터 어떤 보편적인 명제를 끌어내는 추리에 관한 연구를 한다. 이 보편적인 명제는 현재 아직 관찰되지 않은 경우도 포함하고, 아직 발생하지 않은 미래의 경우도 포함한다. 이것은 과거와 현재에 특정한 수의 황새가 빨간 다리를 가지고 있다는 관찰을 근거로 ‘모든 황새는 빨간 다리를 하고 있다’라는 보편적 명제를 주장하는 경우이다. 이때의 추리의 정당화에 대해 D.흄이 의문을 제기하였고, J.S.밀, 러셀, J.케인스, R.카르납이 확률이론(確率理論)을 통하여 여러 가지 설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C.S.퍼스, J.듀이, 그리고 K.R.포퍼는 이러한 귀납논리학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였다. 그것은 황새의 보편적 명제에 대하여 아직 반례(反例)가 나타나지 않았으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입장이다. 퍼스는 그 보편명제가 참이므로 받아들인다고 생각하지 않고 아직 거짓이 아니므로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 보편명제는 ‘법칙’이라기보다 ‘가설(假說)’이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므로 퍼스의 귀납성은 빨간 다리의 황새들을 열거하는 데서 찾지 않고 황새의 보편적 명제에 대한 있을 만한 반례의 경우들을 찾아보면서 아직 반례를 얻지 못하는 데서 설명될 수 있다.


키레네 학파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한 학파. 창시자는 북아프리카의 키레네에서 태어난 아리스티포스이다. 그가 소크라테스의 제자라고 하여 소(小)소크라테스학파의 하나로 꼽힌다. 이 학파의 특징은 쾌락주의로서, 쾌락을 선(善)으로 생각하고 따라서 쾌락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데 있다. 이 학파에 속하는 사람들로는 아리스티포스의 딸 아레테, 손자인 아리스티포스와 테오도로스, 헤게시아스, 안니케리스 등이 있으나, 그들이 주장하는 쾌락설은 다양하다. 창시자인 아리스티포스는 현재의 육체적인 쾌감을 쾌락이라고 하면서도 쾌락의 대부분은 불쾌를 초래하기 때문에 사려(思慮)로써 쾌락을 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테오도로스는 쾌락이란 것은 사려에 의한 즐거운 기분이라 하였고, 안니케리스는 우애나 조상에 대한 사랑, 조국애 등에서도 기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였다. 한편 헤게시아스는 불쾌를 수반하지 않는 쾌락은 없다고 생각하여 생활에 무관심한 태도를 현명한 것이라고 하였으나, 생활에 무관심할 수 없을 바에는 자살하는 편이 낫다고 주장하여 자살 권유자(페이시타나토스)라는 별명을 얻었다. 쾌락주의가 이와 같이 염세관으로 귀착한 사실은 역설적이며, 이 학파는 나중에 에피쿠로스학파에 영향을 주었다.

키니코스(Cynics/Kynikos) 학파

소크라테스의 제자 안티스테네스가 창설한 고대 그리스 철학의 학파. 견유학파(犬儒學派)·시니시즘이라고도 한다. 이 파 사람들은 소크라테스의 극기적인 철학의 일면을 계승하여 덕(德)만 있으면 족하다 하여 정신적·육체적인 단련을 중요시하였으며, 쾌락을 멀리하고 단순하고 간소한 생활을 추구하였다. 일반적으로 자족자제(自足自制),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의지의 우월성을 존중하였으며, 권력이나 세속적인 일에 속박되지 않는 자유를 원하였고, 세계시민으로 자칭하여 헬레니즘 세계로 설교여행을 다니기도 하였다. 키니코스라고 부르게 된 것은 안티스테네스가 교편을 잡았던 학교가 아테네 교외의 키노사르게스에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으나, 그보다는 시노페의 디오게네스(BC 412?∼BC 323)로 대표되는 ‘개와 같은 생활(kynicos bios)’에서 유래한 듯싶다. 가진 것이라곤 남루한 옷과 지팡이, 목에 거는 수도사의 주머니밖에 없으며, 나무통을 집으로 삼아 살아가는 거지 철학자는 스스로 ‘개와 같은 디오게네스’라고 이름하였다.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 신의 특징이며, 필요한 것이 적을수록 신에 가까운 자유로운 인간’이라는 것이 그들의 입버릇이었다. 그들은 사회적인 습관은 물론, 이론적 학문이나 예술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옛 사람은 그들의 이러한 점을 평하여, 키니코스주의라는 것은 ‘덕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하였다. 이 키니코스라는 말에 어원을 둔 cynical이라는 형용사는 ‘냉소적인’ ‘조롱적인’의 뜻을 가진다. 이것은 디오게네스의, 세상의 모든 질서에 대한 철저한 조소적 자세에서 유래한다. 대낮에 디오게네스는 등불을 켜 들고 ‘인간은 어디에 있는가’라고 외치면서 거리를 방황하였다고 한다. 이 학파의 생활방식은 나중에 스토아학파 등에도 영향을 주었다. 이 학파는 BC 3세기경에 융성하였고 그 이후에는 쇠퇴하였으나 로마제국이 도덕적으로 타락하였던 1세기경에 다시 융성하였다. 루키아누스(Lucianus)는 키니코스학파 사람들의 거지와 같은 생활 태도나 무교양을 비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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