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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철학(medieval philosophy)

西洋哲學

by 巡禮者 2010. 5. 3.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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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철학(medieval philosophy)


4∼5세기 로마 제국 몰락부터 15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의 철학적 사변. 좁은 의미의 중세철학은 서(西)로마 제국의 멸망을 고대의 종말로 보고 그 이후를 중세로 보는 역사학상의 시대구분을 따라 5세기 말에서 15∼16세기에 이르는 약 1000년간의 서양철학을 말한다. 이 좁은 의미의 중세철학은 스콜라 철학과 거의 같은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중세철학은 그리스도교 철학이라고도 할 만큼 그리스도교 신학과 밀접한 관계에 있으므로 교부시대(敎父時代)를 더 거슬러 올라가 원시 그리스도교 시대까지 중세철학에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중세철학과 그리스도교】 그리스도교와 밀접한 관계에 있는 중세철학은 그리스·로마 초기의 고대 철학과는 당연히 이질적인 관심과 요구에서 출발하였다. 그 발단은 그리스도의 탄생과 복음의 선포, 사도들의 선교활동, 초대교회의 형성이라는 종교적 사건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따라서 중세철학의 근본 주체는 그리스도교와 그 모태가 된 유대교의 종교적 세계관 속에 그 싹을 볼 수 있다. 이 세계관은 이미 구약성서의 《창세기》 가운데 신화적인 표현으로 기술되어 있었다. 그에 따르면 신(神)은 유일(唯一)의 절대자요, 세계와 그 안의 만물은 ‘무(無)에서 창조(creatio ex nihilo)’하고 인간에게 ‘신의 모습(imago Dei)’으로서의 특별한 지위를 주었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특한 세계관은 헬레니즘 세계에서 그리스적 문화와의 만남을 통해 명확히 자각되면서 처음에는 ‘이 세상의 지혜’인 그리스적 자연관이나 합리주의와의 대립으로서 나타났다.


이 자각은 그의 논리적 심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그리스 철학을 방법으로서 채용하게 되고, 신앙적 세계의 이해는 점차 신학의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교부철학에서 스콜라철학에 이르는 중세철학의 걸음은 이러한 신앙적 세계관의 논리화, 체계화라고 볼 수 있다.


【중세철학의 방법】 중세철학은 우선 그리스도교가 자기의 신앙이 진리임을 증명하고 지적인 반대자의 공격이나 비웃음으로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한 변증(辨證)의 도구로서 출발하였다. 역사의 진전과 더불어 철학의 자립성이 더욱 증대되었는데, 이러한 입장은 중세철학의 어떤 시기에도 해당된다. 이것은 그리스도교와 나란히 중세철학에 중요한 구실을 한 유대교와 이슬람교에도 공통된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중세철학은 그리스적 논리나 이성만을 논증의 유일한 방법으로 삼지 않고 대체로 다음 세 가지 방법을 병용하였다. ① 인간이성에 보편적으로 승인되어야 하는 논리학적인 제원리, ② 세계나 인간에 대한 경험이나 관찰에 근거한 지식, ③ 종교상의 권위에 의하여 진리로 인정된 계시나 교의이다. 이 중에서 첫째 원리는 그리스 철학에 의존했는데, 교부시대에는 주로 플라톤 철학을 규범으로 삼았으며, 이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論理學)이 이에 덧붙여졌다. 그 후에는 신(新)플라톤적인 절충주의가, 13세기 후에는 주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사고가 주류를 이루었다.


【중세철학의 전개】 그리스철학을 최초로 교부학(敎父學)과 결부시킨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의 철학자 필론이다. 플라톤 철학은 그를 중개로 하여 알렉산드리아학파의 공통사상이 되어 아우구스티누스까지 계승되었다. 보이티우스는 그리스도교적은 아니었으나 플라톤 이외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적 제저작을 번역·해설하여 그것을 서유럽에 소개함으로써 다가올 스콜라철학의 준비를 갖추었다. 최고 존재자인 신으로부터 질료적 피조물(質料的被造物)에 이르는 세계의 제존재의 질서를 신플라톤적 색채가 짙은 신비주의적 세계상(世界像)으로 종합 정리한 위(僞)디오니시우스는 그 후의 중세적·세계적 세계관의 윤곽을 제공하였다. 스콜라 철학 시대가 되자 논리적 요구가 더욱 고조되고 신앙에 가능한 한 합리적 기초를 부여하기 위한 신학의 학적 정비(學的整備)가 적극적으로 행해지게 되었다. ‘화해(和解)를 구하는 신앙(fides quaderens intellectum)’이라는 안셀무스의 입장은 이러한 사정을 잘 나타낸다.


중세 최고의 예리한 변론가인 아벨라르는 이와 같은 논리적 요구를 한층 더 정밀하고 체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한 촉진제가 되었다. 13세기에는 풍부한 그리스 철학의 문헌을 가진 아라비아 문화권 철학자들의 영향으로 스콜라 철학은 전통적인 신학적 형이상학에 더하여 자연철학(自然哲學)에의 확대를 필요로 하였다. 이 때 T.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적 방법을 채용함으로써 이 방면의 가능성을 여는 동시에 그때까지의 그리스도교적 철학의 성과를 종합하는 일대 체계를 완성하여 중세철학에 불멸의 업적을 남겼다. 중세철학이 사용한 제2의 논거인 관찰·경험에 의거한 지식은, 예컨대 아우구스티누스가 키케로를 통하여 배웠다고 하더라도 본질적으로는 그리스도교 자체의 내면성이 이것을 더욱 풍부하게 만든 것은 틀림없는 일이다. 계시(啓示)나 종교상의 권위를 논증의 근거로 하는 경우에는 대개 교회가 승인한 사항이 증거로 제시되었는데, 스콜라 철학 시대에는 교부, 그 중에서도 아우구스티누스의 권위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세철학의 의의】 중세철학은 이와 같은 몇가지 근거로 나타나는 진리를 상호 모순되는 일 없이 조화시키려 함으로써 고대와 근대철학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독자적인 정신적 세계를 구축하고, 그 논증법을 개발하였다. 거기에는 여러 가지 종교적 제약도 있었고, 또 철학이 ‘신학의 시녀(ancilla theologiae)’로서의 역할도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기 때문에 중세철학은 그 독자성과 심원성(深遠性)을 지닌다. 신과 세계와 인간에 관한 통일적인 질서와, 인간의 자유와 존엄의 확실한 근거를 추구해 온 점은 중세철학의 두드러진 특징이다. 르네상스 이후 경시되었던 중세철학은 19세기 후반부터 급속하게 재인식되기 시작하여 오늘날에는 C.보임커, M.울프, M.그라프만, E.H.질송 등의 연구로 점점 더 높이 평가되고 있다.


교부 철학(patristic philosophy)


고대 그리스도교의 교부들의 철학·사상 등을 주된 연구 대상으로 삼는 학문. 고대 그리스도 교회에서는 교회의 정통교리를 저술로써 설명하고, 성스러운 생활을 함으로써 신도의 모범이 된 사람들을 교부라는 이름으로 존중하였다. 가톨릭에서는 이들 교부의 저술이 정통교리의 권위로서 후대에서도 인용되었다. 넓은 뜻으로는 고대 그리스도교 저술가를 통틀어 교부라고 하기도 하는데, 교부의 저술에 대한 연구는 교부학(敎父學)이라고 한다. 교부는 대개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예에 정통한 사람들로서 그 중에는 어려서부터 그리스도교도인 사람도 있고 커서 개종한 사람도 있지만, 어느 경우이든 고대문명의 유산, 특히 시인과 철학가의 학설이 사도들의 가르침과 어떠한 관계에 있는가 하는 문제에 흥미를 가졌다.


그리스도교는 처음,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단일성 때문에 고대 이교문명과는 전혀 이질적인 원천에서 나온 종교로 등장하였지만, 차차 고대 이교세계까지 교세를 넓힘에 따라 고대문명, 특히 그리스 철학사상과 대립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러한 요구를 충족시킨 사람들이 교부인데, 이들 교부들이 고대문명 속에서 불멸의 위치를 확보하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준비하고 사람들을 진리 그 자체인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하여, 그리스도 사상에 이를 섭취하였다. 한편, 그리스도교의 교리는 궁극적으로 이성으로써는 해명될 수 없는 신비이기는 하지만, 이성으로 파악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는 교리 그 자체도 이성적인 구조(構造)를 갖추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에 그리스도 사상이 하나의 종합적인 세계관으로 형성되고, 그 위에 중세 그리스도교의 신학체계가 세워진 것이다. 교부시대는 2~7세기 또는 8세기까지에 이른다.


그리스 교부란 그리스어(語)로 저술활동을 한 동방의 교부를 말하고, 라틴 교부란 라틴어로 저술활동을 한 서유럽의 교부를 말한다. 19세기에 J.P.미뉴가 편찬한 《그리스 교부집성》 162권과 《라틴 교부집성》 221권은 이 방면에서는 가장 총괄적인 것이다. 그리스 교부는 사변적(思辨的)이어서, 그리스도교를 하나의 궁극의 철학적 진리를 나타내는 것으로 해명하려 하였다. 그리스 철학과 그리스도교는 처음에는 통일성이 없이 혼재하고 있었지만, 얼마 후에는 조화된 그리스도 사상으로 통일되어 갔다. 그리스 철학의 여러 학파를 거친 다음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접촉한 유스티누스, 타티아누스·아테나고라스는 “이것만이 유일한 참된 철학”이라고 부르짖은 2세기의 교부이며 호교가였다. 3세기에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교의학교(敎義學校)를 지도한 클레멘스·오리게네스가 있고, 4세기에는 카파도키아 지방에서 활약한 그레고리우스, 바실리우스, 닛사의 그레고리우스 등이 그리스 교부의 대표적인 사람들이었다. 라틴 교부로는 그 유명한 “불합리하기 때문에 나는 믿는다.”라고 말한 테르툴리아누스와 키푸리아누스·암브로시우스·아우구스티누스 등이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이교도인 아버지와 그리스도교도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 유명한 로마의 변론가인 그는 이교도적 교양으로부터, 어렸을 때 어머니로부터 받은 그리스도교 신앙으로 돌아올 때까지의 과정을 기록한 《고백록》을 썼다. 이것은 이교문명으로부터 그리스도교 문명으로 옮겨가는 시대의 고뇌와 환희를 한 사람의 내면의 역사로 부각시킨 것으로서, 정신사에 있어서 중요한 기록이 되어 있다. 그가 여기에서 그려낸, 인간의 내면의 지주(支柱)가 되고 빛을 밝혀주는 ‘내면의 신(神)’의 사상은 그 후 서유럽 그리스도교 사상을 형성하는 힘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누스(Aurelius Augustinus, 354.11.13∼430.8.28)


초대 그리스도교 교회가 낳은 위대한 철학자·사상가. 누미디아(북아프리카) 타가스테(지금의 수크아라스로 당시 로마의 속지) 출생. 성인(聖人). 그의 생애는 주요저서라고 할 수 있는 《고백록(告白錄) Confessions》에 기술되어 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의 하급관리였고 어머니인 모니카는 열성적인 그리스도교도였다. 카르타고 등지로 유학하고 수사학(修辭學) 등을 공부하여, 당시로서는 최고의 교육을 받았다.


로마제국 말기 청년시절을 보내며 한때 타락생활에 빠지기도 하였으나, 19세 때 M.T.키케로의 《철학의 권유:Hortensius》를 읽고 지적 탐구에 강렬한 관심이 쏠려 마침내 선악이원론(善惡二元論)과, 체계화하기 시작한 우주론(宇宙論)을 주장하는 마니교로 기울어졌다. 그 후 그는 회의기를 보내며 신(新)플라톤주의에서 그리스도교에 이르기까지 정신적 편력을 하였다. 그의 그리스도교로의 개종에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384년에 만난 밀라노의 주교(主敎) 암브로시우스였다. 그는 개종에 앞서 친한 사람들과 밀라노 교외에서 수개월을 보내면서 토론을 벌였는데, 그 내용들이 초기의 저작으로 편찬되었다. 388년 고향으로 돌아가서 수도생활을 시작하려 하였으나 사제(司祭)의 직책을 맡게 되었고, 395년에는 히포의 주교가 되어 그곳에서 바쁜 직무를 수행하는 한편, 많은 저작을 발표하였다.


《고백록》도 그 중의 하나이지만, 대작으로서는 《삼위일체론(三位一體論)》 《신국론(神國論)》 등이 널리 알려졌다. 만족(蠻族) 침입의 위험을 직접 당하면서 죽어간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대문화 최후의 위인이었으며, 동시에 중세의 새로운 문화를 탄생하게 한 선구자였다. 그의 사상은 단순한 이론을 위한 이론이 아니라, 참된 행복을 찾고자 하는 활기있는 탐구를 위한 것으로서, 그가 살아온 생애에서 그것을 떼어놓을 수는 없다. 그 체험을 통하여 찾아낸 결론은 《고백록》의 유명한 구절 “주여, 당신께서는 나를 당신에게로 향하도록 만드셨나이다. 내 영혼은 당신 품에서 휴식을 취할 때까지 편안하지 못할 것입니다”라는 말 속에 잘 나타나 있다. 즉, 인간의 참된 행복은 신을 사랑하는 그 자체에 있다는 것이다. 신을 사랑하려면 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신이 잠재해 있다는 우리의 영혼도 알아야만 한다. 그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철학의 대상으로 특히 관심을 가졌던 것은 신과 영혼이었다. 신은 우리 영혼에 내재하는 진리의 근원이므로, 신을 찾고자 한다면 굳이 외계로 눈을 돌리려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영혼 속으로 통찰의 눈을 돌려야 한다. 윤리에서는 모든 인간행위의 원동력이 사랑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간은 결코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존재이며, 윤리적인 선악은 그 사랑이 무엇으로 향했는가에 따라 결정된다 하였고, 마땅히 사랑해야 할 신을 사랑하는 자가 의인(義人)이고, 신을 미워하면서까지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악인(惡人)이라고 하였다.



스콜라 철학(Scholasticism)


그리스도교의 교의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하려는 철학. 중세 초기에 샤를 대제(大帝)는 유럽 각지에 신학원(神學院)을 설립하고 학문육성에 진력하였다. 스콜라학의 명칭은 이 신학원 교수(doctores scholastici)에서 유래하며, 그 후 중세의 신학원과 대학에서 연구되는 학문을 널리 스콜라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스콜라 철학은 그 가운데 한 부문인 철학 분야이다. 스콜라학은 이 때문에 중세의 신학(神學)·철학 연구 전반을 총괄하는 것으로 매우 다방면에 걸친 것이지만 거기에는 전체적으로 공통되는 몇 가지 특징도 있다. 그것은 중세의 학문연구방법(스콜라학적 방법)에서 오는 것인데 이것에 의하여 중세철학의 본연의 자세가 근본적으로 규정되었다.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① 중세의 학문 연구는 대체로 성서와 교부(敎父)의 저서,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철학자, 기타 저술가의 저서에 대한 문헌적 연구에서 시작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 저서의 독해·주석·해석이 그 첫째 작업이었다. 이 무렵 성서는 신(神)의 말을 전하는 것으로서 가장 중시되었다(성서의 권위).

② 신의 말은 먼저 신앙에 의하여 인간에게 받아들여지지만 ‘신앙’은 인간이 거기에 내포되는 신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새 사람으로 재생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신앙의 이해’라는 것이 스콜라학이 지향하는 목표였다. 이 때 신앙과 이해(또는 이성)는 서로 한쪽이 다른 한쪽을 요구하면서도 한쪽이 다른 한쪽에 용해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긴장관계에 있으며 이것은 바로 중세철학을 구성하는 두 요인이다. 따라서 중세철학을 ‘신학의 하녀’라 하여 한편에 대한 예속관계로서만 보는 것은 일면적이다. 스콜라철학은 한쪽이 다른 한쪽에 예속되는 곳에서는 상실되며, 긴장관계에 있는 양자의 종합에 의해서만 스콜라학이 성립된다. 스콜라학의 다양성은 이 종합의 다양성에 있다.


③ 교부와 철학자의 저작은 이를 위해 사용되었다. 하나하나의 문제점에 따라 참조되는 여러 전거(典據)에서 볼 수 있는 여러 설(說)이 수집·정리되었다. 12세기 초, 페트루스 롬발드스의 《명제론집(命題論集)》은 이런 종류의 대표적인 저작이다. 아벨라르두스는 이들 여러 견해를 하나하나의 논점에 대하여 긍정측과 부정측의 대립하는 양자로 분류하는 방법(그렇다와 아니다의 방법)을 도입하였다. 13세기의 슴마(완전한 단일로서 간결한 총괄)는 이들 대립하는 여러 견해 사이의 조화와 종합의 시도로서 여러 영역에 관하여 이루어진 여러 설의 집대성이며, 참으로 학술의 종합이라고 할 만하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神學大全)》은 그 중 가장 저명한 것이다.


【초기】 샤를 대제 시대부터 12세기까지이며 신(新)플라톤파 철학을 도입하여 가짜 디오니시오스(Dionysios)의 번역에 의하여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스코투스 에류게나, 신앙과 이성(理性)의 관계를 명확히 한정시키고 스콜라학의 방법을 확립하여 ‘스콜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켄터베리 대주교인 안셀무스가 그 대표적인 인물이다. 신(神)의 존재에 관한 안셀무스의 증명은 유명하다.


【전성기】 13세기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서(自然學書)를 아라비아 철학에서 이입함으로써 종래의 신학으로부터는 독립된 지적 연구(知的硏究)가 일어난다. 이 새로운 연구를 대폭적으로 채용하고 게다가 이것을 전통적인 스콜라학의 체계 속에 혼연히 융화시킨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신학에 대한 철학의 원리적인 독립성이 유지되면서 전체는 신학의 체계로서 종합되었다. 이에 비해 보나벤투라는 전통적인 아우구스티누스적·신비주의적 경향을 지켰다.【말기】 14세기로, 신앙과 이성과의 조화가 점차 상실되었다. 유명론자(唯名論者) W.오컴, 신비주의자(神秘主義者) M.J.에크하르트가 대표적이다.


神學의 侍女(ancilla theologiae)


중세 이탈리아의 신학자 P.다미아니가 신학에 대한 철학의 위상(位相)을 나타내는 데 사용한 명칭. 즉 철학이 신학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표현이었다. 당시 성서의 권위에 대하여 이성(理性)의 권위를 강조한 변증학(辯證學:dialectica)이라는 철학적 학문이 있었다. 이에 대하여 그는 변증학이 그리스도교의 신비를 해명하기 위하여 이용되는 경우의 기준을 만들고, 변증학은 여주인에게 봉사하는 시녀와 같이 신학에 예속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말은 철학이 신앙의 진리나 신학에 대하여 취해야 할 태도를 표현한 말이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1274. 3. 7)


중세 유럽의 스콜라 철학을 대표하는 이탈리아의 신학자. 로마와 나폴리 중간에 있는 로카세카 출생. 성주(城主)의 아들로 처음에 나폴리대학에 입학했으나 설교 및 학문연구를 사명으로 하는 도미니코회(會)에 들어가 파리와 쾰른에서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사사하였으며, 그 동안에 사제(司祭)가 되었다. 1252년 파리대학 신학부의 조수로 연구를 심화시키는 한편, 성서 및 《명제집(命題集)》의 주해에 종사하였고, 57년 신학교수가 되었다. 59년 이후 약 10년 간 이탈리아 각지에서 교수 및 저작에 종사, 68∼72년 재차 파리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후 나폴리로 옮겼다. 74년 리옹 공의회(公議會)에 가던 도중 포사노바의 시토회 수도원에서 병사하였다.


그는 방대한 저작을 남겼는데, 그 종류는 그가 대학교수 및 수도회원으로서 행한 각종 활동을 반영하는 것이다. 우선 《신학대전(神學大全):Summa Theologiae》(1266∼73) 《대이교도대전(對異敎徒大全):Summa de Veritate Catholicae Fidei Contra Gentiles》(59∼64) 등의 교과서적·체계적 저작을 꼽을 수 있으며, 《진리에 대하여》 《신의 능력에 대하여》 등 그가 교수로서 지도한 토론의 기록과 성서의 주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요 저작, 그리고 프로클로스, 가짜 디오니시오스, 보에티우스 등의 저작 주해 및 신학과 철학의 갖가지 문제에 대하여 논한 소논집(小論集) 등이 있다. 그는 ‘스콜라철학의 왕’이라 불리고, ‘천사적 박사(Doctor angelicus)’ 또 ‘공동(共同)의 박사(Doctor Communis)’라는 존칭이 주어졌다. 그는 《대이교도대전》의 권두에서 예지(叡智)의 탐구는 모든 인간의 영위(營爲) 중에서도 가장 완전·고귀·유익하여 커다란 기쁨을 주는 것이라 찬미하였지만, 그의 일생을 한마디로 표현할 말을 고른다면 ‘끊임없는 예지의 탐구’ 바로 그것이다.


그에게 있어 예지의 탐구란 신학·철학의 어떤 말로 불리든 간에, 주체 외부에 체계 혹은 작품을 쌓아올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으며, 오히려 궁극목적을 향하여 전진하는 전인격적(全人格的)인 자기실현의 발걸음이었다. 거기에 토마스 철학의 ‘실존적’ 성격이 있다.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떠나서는 논할 수 없다. 그는 생애를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 연구에 몰두하였다. 그러나 그의 철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반복도, 그리스도교화도 아니며, 오히려 아우구스티누스와 안셀무스를 거쳐서 형성된 그리스도교 철학을 독창적으로 발전시킨 것이다. 그는 철저한 경험적 방법과 신학적 사변(思辨)을 양립시켰는데, 이와 같이 독자적인 종합을 가능하게 한 것은 창조(創造)의 가르침에 뿌리박은 존재(存在)의 형이상학이었다. 그는 거의 모든 학문영역에서 비길 데 없는 종합화를 이룩함으로써 중세사상의 완성자가 되었지만, 동시에 그가 신(神) 중심의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인간의 상대적 자율(相對的自律)을 확립한 일은 곧 신앙과 신학을 배제하는 인간중심적·세속적인 근대사상을 낳는 운동의 기점이 되었다. 그는 엄밀한 의미에서 최초의 근대인(近代人)이며, 그 영향은 그의 이름을 붙인 학파를 훨씬 초월하여 현대 사상 전역에 미치고 있다.


神學大典(Summa Theologiae)


중세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표적인 저작. 3부로 된 대작으로서 제자들에 의해서 보완되었다. 저작연대는 1272~73년까지이다. 제1부에서는 유일신의 존재와 본질 및 창조, 천사·인간, 신의 세계통치 등 즉 신론(神論) 119문제를, 제2부는 1·2편으로 나누어 189문제의 인간론을 다루었다. 1편에서는 인간의 목적·행위·죄·법 등 도덕의 근본문제, 2편에서는 신앙·희망·사랑·정의·용기·절제 등의 덕(德)에 관한 부분을 다루었다. 그리고 제3부에서는 그리스도론을 비롯한 신학적 문제 180문제를 서술하였다. 미완인 채로 죽자 제자 피페르노의 레지날도 등이 아퀴나스의 다른 작품을 인용하여 신학상의 문제 90개항을 보완하여 펴낸 것이다. 그 구성은 13세기에 완성한 대전의 전형으로 각 부는 많은 ‘문제(quaestio)’로 나누고, 문제는 다시 ‘항(articulus)’으로 세분하였다. 각 항은 문제형식으로 주제가 주어지고 여기에 대한 반론과 본문, 반론에 대한 응답 순서로 논지를 진행시키고 있다. 이러한 방법은 중세대학 특유의 수업방식인 ‘토론(討論)’에 입각하여 짜여진 체제이다.


普遍論爭(controversy of universal)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중세 유럽에서 ‘보편 문제’를 둘러싸고 전개된 존재론적·논리학적인 철학논쟁. ‘보편에 대한 문제’라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한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스승 플라톤의 이데아론에 대한 대결이라는 형태로 이미 논의한 문제였지만,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중세에 들어오자 다시 활발하게 논의되어 중세의 논리학·존재론의 정치(精緻)한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① 보편은 ‘명칭’ 또는 ‘음성의 흐름(flatos vocis)’에 지나지 않고 실재(實在) 안에는 개물(個物)만이 존재한다는 설(說)로 이것은 유명론(唯名論:nominalism)이라고 불리며 대표자는 로스켈리누스이다. 14세기에 오캄은 이 설을 다시 들고 나와 중세 스콜라 철학으로부터 근세 철학에의 이행(移行)을 준비하였다. ② 보편이 실재 안에 실체(實體)로서 존재한다는 설로 이것은 실재론(實在論:realism)이라고 하며, 대표자는 기욤(샹보의)이다. 이 설에 의하면, 예를 들어 ‘인간’이라는 공통된 실체에 우유성(偶有性)이 가해져서 개개의 인간이 존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③ 이 양극론(兩極論) 중간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그 중에서도 P.아벨라르의 설이 유명하다. 이에 의하면 보편은 ‘언어(sermo)’이다. 즉 그것은 음성이나 실체라는 존재자가 아니라 존재자(여기에선 개물)에 대하여 ‘말하여지는 것’이라 하였다. 이 설은 사고(思考)에 의해 파악되는 ‘뜻’의 영역을 ‘존재’의 영역과는 다른 영역으로서 확립한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중세의 의미론·존재론의 정밀한 전개는 그의 힘에 의한 바가 크다.


唯名論(nominalism) 


보편자(普遍者)는 명사(名辭)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며 그 실재(實在)를 부정하는 철학상의 입장. 명목론(名目論)이라고도 한다. 실재론(實在論)과 대립한다. 실재하는 것은 개체(個體)뿐으로, 예를 들면 빨강이라고 하는 보편개념은 많은 빨간 것을 갖는 빨강이라는 공통 성질에 대하여 주어진 말, 혹은 기호로서, 빨간 것을 떠나서 빨강이 실재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극단적인 유명론은 이 명사를 주어진 근거로 하여 사물간의 유사성(類似性)이라는 것마저 부정한다. 실재론·개념론과 함께 유럽 중세(中世)의 보편 논쟁으로 일파(一派)를 이루었다. 11세기 후반기에 로스켈리누스가 이 입장을 대표했으며, 14세기에는 W.오컴이 체계적 이론을 전개하였다. 17세기 때 영국의 경험론 속에서 부활하였는데 T.홉스가 그 대표자이다. 중세에서는 플라톤적 실재론과 결부하였던 정통신학(正統神學)에 위배되는 것이라 하여 위험사상시되었고, 명백히 유물론적 색채를 띠었다.

實在論(realism)


인식론(認識論)의 사고 방식으로 의식·주관과 독립된 객관적 존재를 인정하고 그것을 올바른 인식의 목적 또는 기준으로 삼는 입장. 관념론(觀念論)과 대립되는 입장이지만 보편개념의 실재를 인정하는 의미에서는 대립되지 않는다. 즉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중세의 스콜라신학의 정통파, F.브렌타노, B.볼차노, E.후설 등의 현상학(現象學)이나 A.마이농 등의 대상론(對象論)의 입장과 같이 개물(個物:하나하나의 책상이나 삼각형의 도형 등)의 실재를 인정하는 입장도 실재론이라 하는 경우가 있으나 그것은 경험적 실재로서의 개물과는 다른 초월적(超越的) 관념론적(觀念論的) 대상을 인정한다는 점에서 관념론적이다. 그 때문에 이 경향은 개물 이외에 보편의 실재를 인정하지 않는 유명론(唯名論)과 대립되고 용어로서의 ‘실념론(實念論)’이라는 명칭이 적절하다. 실재론에서는 보편적인 문제는 별도로 하고 다음 입장과 문제를 지적할 수 있다.


① 지각(知覺)·경험(經驗)을 그대로 실재라고 생각하는 소박실재론(素朴實在論)이다. 이것은 소박한 형이상학적 유물론에서 발견되는 경향이 있으나 직접 여건의 주관성(主觀性)·상대성은 예로부터 널리 알려졌으며 특히 심리학의 발달과 함께 예시(例示)되는 ‘착각(錯覺)’ 등에서도 명백하다.


② 따라서 빛깔·냄새와 같은 주관적인 제2성질(性質) 배후에 실재하는 객관적 성질로서의 물리적인 연장(延長)·고체성(固體性)·운동과 같은 제1성질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데카르트, 가생디, 특히 로크), 이는 인식의 근대과학에 의한 설명과 물질의 기계적 고찰의 진전에 따라 유력하게 되었다. 그러나 경험적 실재로서는 심리적 착각 등의 예에서 제1성질이 제2성질과 마찬가지로 상대적인 것이 분명하며 연장이나 운동 그 자체는 경험에서의 추상(抽象)의 소산이다. 게다가 과학적 탐구는 실재적 성질의 정의를 부단히 변화시킨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입장도 결함이 있다.


③ 이 때문에 I.칸트는 제1성질을 포함한 경험적 인식의 모든 대상을 ‘현상(現象)’이라 하고 그 배후에 인식의 가능성을 초월한 ‘물자체(物自體:Ding an sich)’를 상징하였다. 칸트 이후의 다양한 실재론의 입장은 물자체라는 문제의 개념을 둘러싸고 생겨났다고 할 수도 있다.


④ 또 19~20세기에 걸쳐 G.W.F.헤겔을 정점으로 하는 독일 관념론에 대한 반동·비판으로서 전유럽에 다채로운 실재론과 실증주의의 입장이 생겼다. 칸트를 실재론적으로 해석하려고 하는 신칸트학파의 일원(A.릴, N.하르트만 등), 유물론·모사설(模寫說)을 주장하면서도 소박실재론과 객관의 정적(靜的)인 인식을 버리고 동적(動的)인 과학적 실재론(科學的實在論)의 입장을 취하는 변증법적 유물론(辨證法的唯物論) 등이 그 예이다.


⑤ 이상의 유럽 대륙,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한 흐름 외에, 영미(英美)에 유력한 현대실재론(現代實在論)이 있다. 즉 20세기 초에 영국 헤겔학파의 관념론에 대한 비판 세력으로 대두한 B.러셀, G.무어, L.비트겐슈타인등 케임브리지학파는 미국의 R.B.페리 등 현대실재론과 함께 신실재론(新實在論)이라고 한다. 프래그머티즘도 일종의 경험적 실재론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케임브리지학파의 영향을 받은 논리실증주의(論理實證主義), 또 이 학파의 무어, 그리고 후기의 L.비트겐슈타인과 흐름을 같이 하는 영국 일상언어학파(英國日常言語學派)의 경향은 경험적 실재론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논점을 내포한다. 논리실증주의는 실재론과 관념론 및 양자의 대립 그 자체가 언어 용법의 혼란에서 생기는 형이상학적 의사문제(形而上學的擬似問題)라고 생각하고 일상언어학파도 공통의 논점을 계승하지만 다시 철학용어에 의한 비일상적인 추상적 개괄화(抽象的槪括化)를 버리면 경험적 대상의 실재를 인정하는 상식적(常識的) 입장이 자연스럽다고 생각한다. 이 경향은 역사 및 문체 양면에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점을 내포한다.


첫째, 그것은 스코틀랜드 상식철학파에서 볼 수 있는 실재론 이론에 더욱 세련되고 면밀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둘째, 앞에 서술한 전통적인 여러 실재론은 어쨌든 경험적 여건의 배후에 제1성질이나 물자체를 가정하고 거기에 객관성과 올바른 인식의 근거를 찾는 모사설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비경험적인 실재의 성질에서 그것과 경험적 여건의 연관을 말하기에는 근본적으로 난점이 있으나 이들 현대실재론은 이와 같은 사고법을 배제한다.


셋째, 그 때문에 그것은 객관적으로 가정되는 실재의 과학적인 여러 성질이나 법칙도 구체적 경험에서 추상(抽象) 또는 구성된 기호체계(記號體系)로 생각한다. 더구나 그것들을 개념실재론(槪念實在論)과 같이 실체화하지 않고, 특히 프래그머티즘과 같이 경험해명(經驗解明)을 위한 도구나 수단으로 이해하고 경험적 실재론의 입장을 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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