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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교회와 샤머니즘*

신학 자료

by 巡禮者 2010. 5. 27.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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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교회와 샤머니즘*



1. 머리말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인류는 과학과 기계기술의 경이로운 발달에 힘입어 과거와는 비할 수 없이 빠르게 미래를 향해 질주하고 있다. 서구사회에서 일기 시작한 세계의 세속화 과정은 오늘날 범세계적 현상이 되었다. 공업문명의 발달로 말미암아 세계의 경계는 점차적으로 단축되어 모든 인류는 폐쇄적인 과거의 정적 사회에서와는 달리 상호의존하고 협력해야 하는 공동 운명적인 하나의 세계를 지향하고 있다.1) 하나의 인간 가족을 지향하는 이 역사적 조류의 방향은 역전시킬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한국인들은 역사를 통하여 강대한 인접국가들에 의해 정치, 경제와 문화의 영향뿐만 아니라 간섭과 지배를 받으며 생활하여 왔다. 하지만 정치적 문화적 주체성을 보전하려는 노력 또한 포기하지 않았다. 타의에 의하여 개국조치를 취한 후 1세기가 지난 오늘날, 다시 폐쇄된 공산국가화한 북한을 제외한 자유 세계의 일부인 한국은 후진국의 낙후성(落後性)을 탈피하고 공업선진국의 대열에 나서기 위한 온갖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의 선진국화는 우리 모두에게 부여된 지상명령인 것처럼 보여진다.

  

국가의 공업화 내지 선진국화는 여러 문제점들을 부수물로 가지고 온다. 정적 사회로부터 개방된 약동사회로 변천하는 과정 속에서 의식구조에 변화가 일 뿐 아니라 전통적인 인습들이 의문시되고 있다. 인간들은 전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태도를 취하고 합리적인 행동양식을 추구한다. 이러한 과도기에는 당혹감이 일어날 수 있다. 이민족과의 협력과 유대를 통해서만 가능한 선진국화의 실현을 열망하면서도, 이로 말미암아 행여라도 민족의 주체성을 상실하게 되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날 수 있다. 오늘날 여러 생활분야에서 ‘주체성’ 문제가 자주 논의되는 사실이 이 점을 시사하고 있다. 최근 활발히 전개되는 ‘민족문화 재발굴’이나 ‘민족문화 연구 ’운동 등도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일어난 민족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겠다.

  

이러한 역사적 상황에서, 한국문화의 정통요소와는 이질적 요소를 지닌 종교로 간주될 수 있는 서방 전래의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우리가 ‘그리스도 신앙과 민간신앙'의 주제를 가지고 논의할 기회를 갖게 된 것은 의미 깊은 일이다. 이 주제가 한국인이라는 ‘특수성 내지 구체성'과 동시에 그리스도인이라는 ‘보편성'을 지닌 우리의 정체와 과제를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문제요인들을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 역사적 지평 속에서 제기된 이러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어, 주어진 논제인 ‘그리스도 신앙에서 본 샤머니즘’을 그리스도 신학적으로 간략하게 논의하려고 한다. 따라서 우리의 견해는 샤머니즘을 순전히 민속학적으로나, 일반 종교학적으로 보는 입장과는 상이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미리 밝힌다.

  

이하에서 샤머니즘(Shamanism)을, 불교, 유교, 도교 등 외래 종교들이 중국으로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오기 전까지 민족적 종교 구실을 해왔고, 그후 오늘날까지 다수(多數)의 대소(大小) 종교들이 교세를 확장해 가는 데 있어서도 민족의 대다수를 점하는 서민들 속에 뿌리박은 집단적 종교로 이해하면서,2) 이를 그리스도 신앙의 국면에서, 즉 시원론적(始原論的), 원죄론적 그리고  종말론적 국면에서 각기 관찰하기로 하겠다.



2. 시원론적(始原論的) 국면에서 본 샤머니즘

그리스도 신앙에 따르면 하느님은 인간과 세상만물을 포함하는 모든 실재의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주(主)이시다. 이 고백은 그리스도교 창조신앙에서 명백히 나타난다. 존재하는 만물은 당신 자신을 선사하는 지혜(知慧)에 의하여 현존재에 이르게 되고 충만되고 관리된다. 그러나 이 하느님의 지혜는 추상적인 세계원리나 순수한 자연질서가 아니다. 이 지혜는 구체적 이름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만사가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질서를 지향하여 조성되었다. 그러기에 이 세계관에는 창조와 구원을 포함하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구원질서가 있을 뿐이다(1고린 8,6; 골로 1,16). 하느님은 당신과 인간들 사이의 유일한 중재자인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인류의 구원을 원하신다(1디모 2,4). 이러한 고백은 배타적이기도 하고 보편적이기도 하다.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처음부터 인간이 구원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동시에 그리스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구원을 원하시고, 이것을 위해 인간으로 태어나서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사업을 완성하였다고 믿어 왔다.

  

이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지구 역사상에 나타난 지 불과 2천여년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 민족에게 전파된 지는 아직 2백년이 채 되지 않았고, 이 신앙의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자유를 누리게 된 것은 1백년도 채 되지 못했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는 오늘날 5천년이 아니라 50만년, 학자들에 따라서는 200만년에 이른다고까지 추산되고 있다. 그리고 인류가 생존하는 곳 어디서나 초인간적 존재를 숭배하며, 이 존재의 듯을 따르고자 노력하고 이에 상응하는 의식행위를 한 종교적 활동이 있었다는 것이 연구결과로 드러났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 이전에 이미 출현한 다른 종교의 정당성 여부에 관한 문제는 신학적으로 중대한 문제로 나타난다.3)

  

그리스도교내에는 일체의 다른 비그리스도 종교들을 인간의 불신앙과 우상숭배와 교만행위의 표출로 단정하며, 순전한 인간의 시도로 낙인찍어버리는 세력들이 있다. 금세기 20년대이래 개신교에서 소위 신정통주의로 등장한 바르트에 의해 주도된 변증법적 신학노선이 바로 이 경향을 대표한다고 간주할 수 있다.

  

이 입장은 그리스도 신앙을 ‘위로부터의’ 하느님의 계시로 보아 타종교들과 대립시켜 그리스도 신앙을 ‘신 없는 자들의 소행인 종교’로부터 분리시켜서 ‘초자연적인 신앙’의 안전지대로 대피시킨다.4) 이 입장의 결과로 남는 것은 그리스도교의 고립이고 그리스도 신앙의 보편성과 공번성, 곧 가톨릭성의 상실일 뿐이다.


신․구약을 통틀어 성서는 이교도들이 구원상태나 종교에 관하여 명료한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 모든 커다란 역사적 현상들은 어쩔 수 없이 양의성(兩意性)을 지니고, 인간적 행위에 대해 궁극적 판결을 내릴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판결은 불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구약은 이미 아브라함과의 계약체결 이전에 생존하던 아벨, 노아 등이나 이스라엘인이 아니었던 욥이나 멜키세덱, 시바의 여왕 같은 우상숭배자였거나 구약종교가 아닌 다른 종교를 가졌던 이교도들 가운데 의로운 이교도들이 있었던 것을 증언하고 있다. 언급된 인물들이 구체적으로 생존했던 실제인물들이 아니고 특정한 유형의 인간형을 지시한다고 하여도 문제는 없다. 오히려 이로써 의로운 이교도인들의 생존가능성이 더욱 확대되기 때문이다.5) 그리스도에 의하면 이교도들도 그리스도 안에서 현시되는 하느님의 나라에 근본적으로 포함되어 있다(마르 4,32). 그리스도는 구원 메시지를 선포하는 가운데 민족과 출신과 교육수준의 경계를 두지 않고 이교도들도 유다인과 동등한 자격으로 구원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였으며(마태 25, 31- 45; 8,11 이하; 이사 25,66), 그리스도를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구원계시 속에서 이교도들도 그리스도의 주권 하에 놓여 있다.

 

교부들(Justinus, 알렉산드리아의 Clemens)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그리고 더할 나위없이 적절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말씀, 로고스(λογο ς )의 단편들이 창조 속에서 발견되며, 이교들의 진술과 의전 속에서도 발견된다고 보았다.6)

 

 인간의 구원 가능성에 대한 물음에 대해 대단히 엄격한 판결을 내리는 아우구스띠노까지 ‘아벨로부터의 교회’ 이론을 알고 있었다. 요컨대 교부들은 하느님의 선과, 구원은총이 만백성 속에서 작용하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7) 이제 창조 이래 인간에게 제공되는 하느님의 구원은총은 타인과 사회로부터 유리된 가운데 생활하는 고립된 인간의 양심 속에서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사회적 존재자인 인간의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 만나게 된다. 일반적으로 인간은 신을 숭배하고 그의 뜻에 부합하고자 하는 종교적 삶을 자신이 처해 있는 종교공동체를 통하여 제공되는 현실 속에서 영위하게 된다.8) 이 종교 속에서 인간은 양심의 절대적 요청을 만나게 된다.

  특히 교육을 받지 못한 무지하고 계몽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의 종교적 삶을 그가 실제로 몸담고 있는 사회에서 지배적인 세력을 지닌 종교형식 속에서 종교적 삶을 성취해야 할 뿐 다른 실존적 가능성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 이런 사람들은 헤어날 수 없는 그들의 상황 속에서도 그들에게 울려오는 절대적인 양심의 소리를 듣게 된다.

  

하느님의 보편적 구원의지에 따라 모든 인간들에게 선물로 주어진 구원은총은 그들이 몸담고 있는 종교 가운데에도 수용되어 그 안에서도 구원이 성취된다는 점이 시인되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는 이들이 생활하는 사회에서 지배적인 종교가 구원의 구체적인 장(場)이 되고 이러한 의미에서 이 종교가 하느님에 의하여 긍정적으로 허용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명제는 모든 종교가 모두 똑같이 옳으며, 따라서 어떠한 종교에서도 구원이 가능하다는 종교무구별(宗敎無區別)주장과는 다르다. 즉 임의의 모든 종교에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이 구체적으로 울려오는 양심 속에서 하느님의 소명이 일어나는 종교에서만 인간의 구원은 발견되고, 이러한 한에서 이 종교는 정당한 종교로 간주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비그리스도교의 정당성 문제를 추상적으로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역사적 상황을 고려하면서 논하려는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강조한다.9)

  

예수가 가파르나움의 백부장의 신앙을 보고 놀라며(루가 7, 9), 바울로가 아테네인들에게 “여러분이 미처 알지 못한 채 예배해온 그분을 이제 여러분에게 알려드리겠습니다”(사도 17,23)라고 할 때, 성서는 이교 속에서의 그릇된 하느님의 표상 하에서도 진정한 종교적 구원행위가 성취된다는 것을 증언한다고 볼수 있다. 인격적인 하느님의 숭경행위(崇敬行爲)가 순전한 개념적인 신인식에 의하여 좌우되지는 않는다. 개념적인 신인식이란 필설로 분명히 표현할 수 없는 하느님 체험에 뒤이어 생겨난 인식과정이다. 그러므로 그릇된 하느님 표상 하에서라도 구원에 필요한 양심을 따르는 생활이 가능하며, 하느님께 대한 건실한 숭경행위가 가능하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10) 그런데 명시적인 그리스도 신앙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체의 구원이 창조와 구원계획 속에서의 그리스도의 중심위치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 없이는 성취 불가능한 구원이어야 할 것이 결론적으로 따른다.

  

선사시대로부터 장구한 세월을 거쳐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전해져 온, 그래서  우리 민족의 정신과 생활을 전반적으로 지배하는 민족적인 종교집단으로 간주될 수도 있는 샤머니즘은 북방민족에 속하는 우리 민족의 주위민족들인 만주, 시베리아, 중국, 몽고와 일본 등지에서뿐만 아니라, 남북미의 인디언족과 에스키모족, 남양 또는 아프리카의 원주민들 사이에도 발견되는 범세계적인 종교집단임이 학술연구에 의하여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민속학적․종교학적으로 샤머니즘의 원시성이 그 신관과 우주관 그리고 인생관에서뿐만 아니라 의식행위 속에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현대의 비교 종교학적인 학술적 견해이고, 여기서 관심이 되고 있는 샤머니즘의 구원의미에 있어서는 결정적으로 부정적인 기준이 될 수 없다.

  

물신주의(物神主義)나 정령주의(精靈主義) 단계에서의 원시인들은 자기들이 일상생활 속에서 대하게 되는 자연사물들 안에 작용하는 초인간적이며 초월적인 ‘힘’에 외경을 느끼고, 지상에서의 삶 후에 영혼의 불멸을 믿으며 만물을 주재하는 신을 숭배하고 예배행위를 하였었다. 우리나라 고대사회에서 행해졌던 영고(迎鼓:부여), 동맹(東盟:고구려), 무천(舞天:동예) 등으로 불린 제천행사들이 그 좋은 예가 되며 이 의식들은 그 당시 우리 선조들의 역사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더 완전한 것을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진실한 예배행위였을 것이다. 이러한 제천행사들이 무당을 중심으로 하여 이루어지고, 이에 따라 부족사회가 형성되고 그들 나름의 종교적 생활을 영위하였을 것이다. 이들의 종교행위를 현대의 그리스도 신앙의 관점에서 볼 때 물론 비판의 여지가 있을 수 있으나, 저들의 신에 대한 외경행위 자체는 모든 인간을 구원하려는 하느님의 의지에 순응하는 신앙행위의 발로였다고 볼 수 있다. 어쨌든 4세기이래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도교 등 고등종교들의 전래로 말미암아 이조시대에 이르러서는 샤머니즘이 천시되었다. 그러나 서민들 사이에서, 특히 부녀자들 사이에서 그 기반을 확고히 하는 등 민족의 종교적 생활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우리 민족에게서 발견되는 샤머니즘은 보편적 구원을 원하시는 하느님에 의하여 허용된 긍정적 종교집단으로 간주해야 될 것으로 믿는다. 우리의 조상들은 그 당시 그들에게 주어진 샤머니즘적 종교 표상세계 속에서 생활하고 그 안에서 구원에 필요한 종교적 행위들을 실천하는 이외에 다른 실존적 가능성이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러한 견해는 불가피하다고 느껴진다.

  

3. 원죄론적 국면에서 본 샤머니즘


그리스도 신앙에 따르면, 인간의 구원에 대한 물음은 신앙에 대한 물음으로부터 분리되지 않는 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을 구속시키지 않고 완전한 자유에로 해방시킨다. 이에 이르기 위해 인간은 결단에로 호출되고 신앙행위를 실천해야 한다. 물론 하느님은 당신의 의화(義化, Justificatio)를 그리스도 신자이거나 비신자이거나 상관없이 이들의 신앙에 입각하여 구별없이 선사하신다. 문제는 여기서 구원에 필요 불가결한 신앙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 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명현적(明顯的)인 신앙만이 구원 가능한 신앙인가? 아니면 한 인간이 자기 현존재의 헤아릴 수 없는 신비를 모험하고 신뢰하면서 받아들이는 곳 어디서나, 드러나지 않는 익명적 형태의 신앙으로도 구원이 가능하지 않는가?11) 성서는 이 물음에 직접적인 해답을 하고 있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성서는, 복음이 선포된 사람들의 신앙에 관해서만 직접 언급하고 있다.

  

성서에서는 인간이 처해 있는 상황이 실제로 문제가 될 때, 낙관적인 판결을 하고 있지 않는 것 같다. 성서와 성전의 확신에 따르면 인간들은 하느님의 진리를 인식하기는 하였으나,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들은 진리를 파기하고 하느님의 위엄을 무상한 인간과 짐승들의 형상으로 교체하였다. 창조주의 자리에 피조물이 들어서서 공경과 흠숭을 받기에 이르렀다(로마 1, 18-25). 그 때문에 신구약과 교부들은 다른 종교들 안에서 미신과 기만과 진정한 종교의 악마적 모방과 악마적 현혹 그리고 교만과 도덕적 타락을 보고 있다. 여기서는 창조질서가 완전히 전도되었다. 이 상태에서는 인간이 하느님의 모상으로 이해되지 않고, 인간이 자기 모상과 형상에 따라 신을 제조해낸다.12)

  

종교현상 속에서의 이러한 원죄론적 측면들은 그리스도 신앙 외부에서의 구원 가능성의 국면과 함께 진지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보다 깊고, 보다 포괄적인 진리 때문에 성서적․예언자적 종교비판과 계몽사조 이래 일기 시작한 근세적 종교비판이 샤머니즘의 실재에 해당된다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근세적 종교비판은 바로 사회의 공업화와 연결된 세속화 과정을 통하여 세계적인 영향을 미치며 종교의 상황을 근본적으로 변혁시키고 있다. 이 근세적 종교비판과 함께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제(諸)세력으로부터의 인간해방과, 종교적으로 치장된 폭력과 인간의 진정한 행복을 저해하는 종교적 환상의 기만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

  한국 샤머니즘의 현 실태는 어떠한가? 샤머니즘에서는 무수한 신이 신봉되고 있다. 김태곤 교수의 발표에 따르면13) 현재까지 273종의 신이 조사되었고, 이것을 다시 계통별로 보면, 천상신(天上神, 日月星神), 지신(地神), 산신(山神), 토신(土神), 수신(水神), 화신(火神), 풍신(風神), 석신(石神), 방위신(方位神), 문신(門神), 신장신(神將神), 사귀신(邪鬼神), 명부신(冥府神), 역신(疫神), 동물신(動物神), 농신(農神) 등으로 자연신 계통이 분류될 수 있고, 인신(人神)계통으로는 왕신(王神), 장군신(將軍神), 대감신(大監神), 부인신(夫人神), 무조신(巫祖神), 불교신(佛敎神), 도교신(道敎神) 계통의 일반 인신 계통과 기타 계통으로 분류되는데, 신봉되는 신들 중 63.6%가 자연신 계통의 신이라는 것이다. 자연신 계통의 경우, 인간의 일상생활과 가장 밀접한 자연물인 지(地), 수(水), 산(山), 천(川)의 순서가 되고 인신(人神)일 경우, 장군신, 왕신, 불교신, 무조신의 순위로 신봉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관을 관찰하면, 신은 인간의 신화적 투사(投射, Projektion)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는 포이에르 바하의 종교비판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고 보아야겠다.14) 역사적 의식이 결여되었던 단계에서 자연에 무력하게 투기되었던 인간들이, 주위세계 속에서 만나게 되는 불가해적 실재를 신상으로 투사한 것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샤머니즘은 주술종교로서 주술(呪術)에 의하여 만사를 해결에 두고 행운, 초복(招福), 제염(除炎), 치병 등의 현실적 문제를 초월적인 신력에 의존하여 해결해 나가려 한다. 소원성취 방법이 윤리적인 실천행위보다는 영력(靈力)이 있는 무당들을 통하여 신에게 제물을 바치고, 그 제물의 양과 질에 비례하여 소원성취 여부가 결정된다는 공리적인 신앙관에 전적으로 의존되고 있다. 또한 의례행위 역시 자신이 범한 죄를 속죄하는 참회행위가 아니라 타부[禁忌]를 범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살(煞)을 풀이하는 데 목적을 둔다. 물론 권선징악의 내용이 없는 것은 아니나, 선신도 잘 대접하지 않으면 재앙을 줄 수 있고 악신도 대접만 잘 하면 복을 줄 수 있다고 믿는다. 결국 선악규범이 윤리적 규범이라기보다 물질적인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러한 신앙관은 한마디로 말하여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인간으로 하여금 허황한 환상 속에서 생활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 신앙관은 인간으로 하여금 미래를 지향하는 약동적인 역사적 과정에서 사회의 낙오자가 되게 한다. 이런 점에서 샤먼 신앙층은 종교의 주체를 찾는 데 외면하는 사람들이고 발전하는 일반문화에서 뒤진 사람들이며, 따라서 샤머니즘은 고대문화의 잔재문화이고 그런 만큼 하루속히 승화시켜야 할 신앙이라고 말 할 수 있다.15) 샤머니즘은 그리스도의 빛 안에서 정화되어야할 많은 요소들을 지니고 있다고 보겠다.

  

하나의 종교집단은 역사적 발전과정 속에서 이타적인 문화 종교적 요소들과의 조우(遭遇)를 통하여 본연의 자기 성격이 변모됨으로써 원초의 모습을 잃을 수가 있다. 오늘날 발견되는 한국 샤머니즘 속에서 불교, 유교 내지 도교적 요소가 발견되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고등종교의 요소뿐만 아니라 잡다한 민속적 풍습의 요인들마저 가미되어 복잡한 혼합종교 집단으로 형성된 것이 바로 오늘날의 한국 샤머니즘이라고 간주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교가 샤머니즘과 조우할 때 샤머니즘의 구세사적 상황과 합법성은 변화된다. 그런데 샤머니즘이 언제 그리스도교와 진정으로 만나는가 하는 물음은 역사적이고 구체적으로밖에 달리 대답할 수가 없다. 조우란 두 상대자들이 시공간적으로 만나는 것 그 이상을 의미한다. 조우는 상대자 상호간의 교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조우는 순전한 지적(知的) 경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진리를 실천적으로 드러내는 데서 일어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하겠다.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이 어둠에 가득찬 과거의 상태에서 벗어나, 자신의 죄악을 참회하고 하느님 나라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의 구현을 위하여 헌신할 것을 요청한다. 현세적 생명 보전에 집착하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여 모든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희생한 그리스도와 같이 위타자(爲他者)가 될 것을 요청한다. 인간을 사랑한 나머지 인간으로 태어나서, 인간이 하느님께 바쳐야 할 참된 신앙형태란, 부패하여 없어질 제물의 봉헌이 아니라 자기 헌신이라는 것을 구체적으로 명시한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인간을 부자연스럽게 만드는 모든 요인을 제거하는 데 기여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샤머니즘이 지닌 문제성들을 지적하여 무지와 빈곤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나약한 샤머니즘 신봉자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자녀로서의 자유로운 생활을 이미 이 현세에서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할 것이다.



4. 종말론적 국면에서 본 샤머니즘

그리스도 신앙공동체는  샤머니즘과 ‘예’와 ‘아니오’의 이중적 관계를 맺는다. 이 이중적인 입장은 종말론적 전망을 통하여 매개되어 있다. 성서에 따르면 전인류와 전세계는 하느님의 약속하에 서 있다(창세 3, 15). 구약은 종말론적 구원시기에 여러 민족들이 예루살렘에로 순례할 것으로 알고 있다(이사 2,2 ;미가 4,1 ;마태 8,11). 이 민족들은 주를 찬미하는 가운데 종말론적 평화를 이끌어 갈 것이다.16) 신약에 따르면 이 종말론적 구원시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속에서 다가왔다. 그리스도는 그의 한 몸에서 유다인들과 이교도들을 화해시켜 모든 인류를 위한 공동가정을 이룩하였다(에페2,14-19). 구약뿐만 아니라 전실재가 그리스도와 그의 역사 속에서 완성되기에 이른다(에페 1,10). 그리스도는 저들이 만나는 공동의 접합점이다. 이교도들과 유다인들로 구성된 그리스도 교회는 창조 속에서 이미 작용하는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원결의의 구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에 교회는 국경과 민족을 초월한 구원된 인류의 단일성의 장(場)이며 화해의 공간이다. 또한 교회는 하느님과의 가장 내밀한 일치이며 전체인류의 단일성을 드러내는 표징이다.17)

  

이 종말론적 전망 속에서 만민들의 문화와 종교들은 새로운 빛 안에서 보여진다. 이들은 교부들이 말하듯 복음의 준비이며 하느님의 교육의 표현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잠정적이기는 하지만 하느님의 보편적인 구세경륜에 긍정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하느님의 구원질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하였듯이 인간 자신의 과거로부터의 이탈 내지 회개의 법칙에 의하여 규정되어 있다. 전체의 구원역사는 십자가의 표징과 자기 생명을 구하기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치는, 자기 자신을 초극하는 사랑의 법칙을 통하여 표지되고 있다.18) 이런 점에서 볼 때 샤머니즘도 구세사의 과정 속에 여러 종교집단들과 함께 하느님의 종말론적 평화에 기여하고 있는 만큼 구원의미를 지닌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샤머니즘도 다른 종교집단들처럼 그리스도를 통하여서만 구원의미의 최종적 명료성과 보편성에 이르게 될 것이다.


물론 이러한 주장은 비그리스도인들에게는 납득할 수 없는 독선적 주장으로 여겨질 것이다. 종교학자 엘리아데(M. Eliade)는 역사의 차원이 강조되는 현대세계에서 역사와 긍정적 관계를 가지고 있는 역사적 종교로서의 그리스도교가 자유의 창조적 힘과 역사적 전진의 긍정적 가치를 발견한 인간들에게 삶의 의지와 의미를 부여하고, 인류의 보다 깊은 정신적인 일치와 화해를 일으키게 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19) 바로 이 점이 그리스도 교회를 오늘날 인류의 구원과 미래를 위한 세계적 과제에로 내세우고 있다. 교회는 완성된 하느님의 왕국이 아니라 이 왕국의 성사적 표징이며 순례하는 교회로서 십자가의 교회이다. 만민들의 회개는 교회와 신앙인들의 그릇된 획일적 사고와 우월감으로부터의 회개를 전제로 한다.20)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현현(顯現)을 위한 선교활동이 신학적 식민주의나 교회의 제국주의적 확장이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교회는 알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확장이 아니라 교회의 부식(扶植)에 관해 말하고 있다.21) 민족들의 일치를 위해서 필요한 선교활동은 그리스도의 육화를 세계 속에서 구현해야 한다. 하느님의 육화의 충만은 십자가와 부활의 빠스카 사건 속에서 발생한다. 구속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서만 이루어지고, 개종뿐만 아니라 재생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이 두 번째 탄생은 무로부터의 창조가 아니다. 부활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죽었던 존재이다. 교회가 이런 의미에서 샤머니즘의 재생의 성사가 될 때, 곧 이 샤머니즘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충만에로 이끌어 갈 때, 그리스도 교회는 만인의 종교적 재산의 상속자가 되고 자기 자신의 충만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교회는 이 나라에서도 항상 남을 위한 표징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인이듯, 그리스도 교회 역시 자기 자신을 비워서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다른 종교들-여기서는 샤머니즘-을 승화시켜 새로운 탄생에로 나아가도록 봉사할 때, 자신의 정체를 민족 앞에서 신빙성있게 증거할 수 있을 것이다.


  

 5. 맺는 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비그리스도 전승의 종교들과 그리스도 전승 사이의 연관성들이 연구되어야 하며, 선교활동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질서 안에서 수행(遂行)되기 위해서는 비그리스도 종교와 대화해야 한다고 촉구한 바 있다.22) 이 입장은 교회가 샤머니즘을 대할 때도 해당된다. 샤머니즘이 다른 세계적 대종교들처럼 조직화된 교리나 구조를 지니지 않은 것은 사실이나, 이들 대종교들과의 조우(遭遇)를 통하여 이들에 의하여 침식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이들을 변용시켜왔다. 샤머니즘이 한국 그리스도교를 샤머니즘화한다는 견해가 대두될 정도로 그리스도교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는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종교적 집단이라는 사실에 유의하여 진지한 대화를 포함하는 신중한 샤머니즘 연구작업이 한국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활발히 전개되어야 하겠다.

  

사실상, 한국 가톨릭 신학은 지금까지 서구의 사상적 지평 속에서 형성 발전된 소위 ‘서구신학’을 번역 소개하는 단계에 머무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이 보편요청을 내세우고, 그리스도 신학이 자신의 목표를 복음선포의 기여에 두는 한, 한국 가톨릭 신학이 일방적으로 서방전래의 신학에 의존하고 있을 수는 없다. 한국인이며 그리스도인이고자 하는 우리는 한국적 구체성을 띤 보편적 그리스도 신학을 계발하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인의 일반적 사상구조와 종교적 심성에 영향을 미치는 유․불교를 비롯한 동양적 내지 한국적 종교들과, 동양 내지 한국사상과의 허심탄회한 대화와 연구가 절실히 요청된다. 또한 이들 종교 및 사상들과 그리스도의 복음이 어떠한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는지, 그리고 이들 속에서 그리스도의 진리가 수용되도록 기여하는 어떠한 진리들이 발견되는지가 숙지(熟知)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작업들을 통해서 오늘날 절실히 요청되는 그리스도 신학 토착화의 취지가 올바르게 성취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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