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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신부 문정현 다시 길을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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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1. 8. 20.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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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신부. 문정현은 지난 7월 제주 강정 마을 주민이 되었다. 평택 미군 기지 후보지였던 대추리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예 주민 등록을 옮겨버렸다.

강정 마을은 정부가 일방적으로 해군 기지 건설을 발표한 2007년 이후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 되었다. 문정현은 "당하고만 사는 강정 주민과 함께하고자" 다시 길 위의 신부가 되었다. 명동성당에서 253일의 기도를 끝낸 지 채 석 달도 안 돼 다시 떠난 길이다. 문정현은 왜 또 길을 나섰을까.

문정현이 신부가 된 것은 1966년이다. 신부로 45년을 살았다. 매일 미사, 주일 미사에서의 강론은 물론, 숱한 모임에 참석해 한 말들도 많았을 거다. 그뿐인가.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으니, 집회 연설과 언론 인터뷰 등 누구보다 많은 말을 쏟아냈다. 삶과 죽음, 구원과 해방 그리고 공동체와 연대에 대해 그가 쏟아낸 말과 글은 차고 넘칠 만큼 많다.

천주교 신부로서 본래 사명 말고, 길 위의 신부가 되어 평택 대추리, 용산 참사 현장 등을 지키며 온 몸을 던지는 문정현의 실천은 아무래도 그가 했던 말에 대한 책임을 무겁게 생각한 탓이 아닐까.

말은 무겁다. 말에 대한 책임은 더 무겁다. 책임이 무겁다고 누구나 다 짊어지고 사는 건 아니다. 문정현의 존재는 그래서 남다르고 각별하다.

▲ <길 위의 신부 문정현 다시 길을 떠나다>(김중미 지음, 낮은산 펴냄). ⓒ낮은산
문정현이 지겠다는 책임은 그 범주가 나와 우리를 훌쩍 넘어선다. 보통의 사람들은 기껏해야 나 자신이나, 가족, 아무리 많이 나가도 뭔가 연고가 있는 사람들에서 멈추기 마련이다. 그러나 길 위의 신부 문정현의 책임감은 당최 종잡을 수 없다. 종횡무진, 천지사방이다. 운동권의 고전적 정파 구도 같은 것으로는 도저히 측량이 안 된다. 미군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는 NL(민족해방) 같기도 하지만, 용산 참사를 붙들고 있을 땐 전형적인 PD(민중민주)다.

까맣게 그을린 얼굴에 긴 수염 그리고 언제나 투쟁의 현장에서 크고 작은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투사의 이미지가 강해서 그렇지, 그는 전형적인 지식인이다. 똑똑한 사람이고, 많이 배운 사람이다. 외국 유학과 연수 그리고 다양한 행정과 인사 관리 경험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천주교회 내에서는 절대적 존경을 받는 신부다.

똑똑한 사람이니까 안다. 자신에게 맞는 '적당한' 자리가 어디쯤인지. 그 적당한 자리가 더 큰 힘과 더 많은 역할을 가능하게 할 것이란 것도 잘 안다. 이미 충분히 싸워왔기에, 원했다면 적당한 크기의 적당한 자리도 얼마든지 차지할 수 있었을 게다. 아무래도 신부에겐 직접 싸우는 것보다는 뜨거운 현안일수록 약간의 거리를 두는 게 좋다.

만약 역할이 주어진다면, 그건 싸움보다는 대화와 타협을 촉구하는 가치 중립적인 중재자나 조정자의 역할이 더 어울린다. 그런 게 바로 '적당한' 역할이다. 문정현은 적당한 자리, 누구에게나 적당한 크기의 존경을 받는 원로의 자리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쩌면 역사는 마땅히 문정현을 기억해야 할 그 자리에 다른 '적당한' 누군가를 둘 가능성이 크다.

ⓒ프레시안

<괭이부리말 아이들>(창비 펴냄)로 잘 알려진 베스트셀러 작가 김중미가 쓴 <길 위의 신부 문정현 다시 길을 떠나다>(낮은산 펴냄)는 각별하고 남다른 문정현의 삶 전반을 살피는 평전이다. 김중미는 '무작정' 문정현에 대해 쓰고 싶었단다. 그러고는 꼬박 4년의 작업 끝에 이 책을 내놓았다.

김중미의 책은 노인이 된 지금까지도 고단한 길 위에서의 삶을 고집하는 문정현이 도대체 어떤 사람인지를 추적하는 글이다. 그의 가정과 성장 과정, 신부로서의 삶 그리고 다양한 사회적 실천과 그 과정에 만났던 사람들, 그 사람들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김중미 특유의 따뜻한 문장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어쩌면 괴팍해 보일 수도 있는 문정현의 끊임없는 싸움은 말에 대한 책임에서 온 것이지만, 그것만으로 또는 성직자의 책임감만으로 그의 삶을 설명하긴 어렵다. 다른 뭔가가 있을 것이다. 답은 김중미의 책 곳곳에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목이 메었다. 툭하면 우는 울보 문정현 신부님. 고집불통이면서 마음은 또 얼마나 여린지……." (15쪽)

"잠이 안 와. 가슴이 미어져. 그 철거민들이 숯더미가 돼서 냉동고에 들어가 있는데……. 아무래도 유가족들한테 가 봐야겠어. (문정현의 육성, 32쪽)

"측은한 마음으로 울음을 참지 못하는 문정현 신부" (32쪽)

"문정현 신부 역시 울분으로 몸을 가눌 수조차 없었다." (59쪽)

"그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대성통곡을 했다." (72쪽)


문정현의 대성통곡은 감옥에서 나온 다음, 그의 장상(長上) 김재덕 주교 앞에서 였다. 김중미는 이를 두고 예수의 제자 베드로의 눈물과 같다고 했다.

"문정현 신부가 민주화 운동에서 농민, 노동자, 삶의 자리를 빼앗긴 철거민들의 현장으로 나아가게 된 것 역시 그때 흘렸던 '베드로의 눈물'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베드로의 눈물'은 세상의 약하고 보잘것없는 이,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을 위해 흘릴 수많은 눈물의 시작이었다." (73쪽)

문정현의 눈물은 계속 이어진다.

"그는 울보 신부였다. 삼보일배 행렬촬영할 때 울고, 그 동영상을 편집하면서 또 울었다."

"거리의 사람들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평화로웠다. 문정현 신부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던 날, 예루살렘 사람들 역시 그랬을 거라는 생각으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283쪽)


지식인 문정현은 이성의 힘으로 움직이는 사람이었지만, 눈물 많은 문정현은 감성의 힘으로 자신의 전 존재를 던져버렸다. 거기다 생사관마저 남다르다.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훌쩍 넘어섰다. 날 때부터 키워 온 신앙의 힘 때문이다. 제주도 강정 마을로 이사하면서 남긴 문자는 결코 허튼 소리가 아니다.

"시멘트에 파묻힐 위기에 있는 '구럼비'와 함께 묻힐 수 있기를……."

강정 마을 주민 중에서 단 한 명만 남더라도 함께하겠단다. 죽어도 함께하겠단다. 죽음을 넘어선 사람에게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은 의미 없다. 하물며 그를 처벌하겠다며 보낸 경찰의 소환장은 우습다. 체포도 구속도 실형도, 아니 국가마저 우습다. 문정현은 그런 면에서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정현이 첫 징역을 살 때나, 동생 문규현이 징역살 때, 면회 온 그의 어머니는 흔한 눈물도 없었단다. 환한 얼굴로 아들의 등을 두드리며 "우리 신부, 김대건 신부님처럼 되어야 해."(64쪽) 했단다. 김대건은 한국의 첫 번째 천주교 신부이기도 하지만, 가장 유명한 순교자이기도 하다.

다시 김중미의 말이다.

"순교자의 삶이란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하는 이들의 순수한 열망이다. 그는 독실한 천주교 집안에서 자연스럽게 순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사제의 길에 들어선 뒤, 선택의 기로에 있을 때 그는 항상 예수가 간 길을 선택했다.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 목숨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94쪽)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은 늘 현실 속에서, 어쩌면 현실의 장벽에 갇혀 살고 있다. 자본주의의 무서운 힘은 모든 문제의 핵심을 결국 돈으로 환치시켜 버렸다. 어떻게 사냐는 친구의 질문에 "그랜저"라고 답한다는 광고는 그래서 조금의 과장도 없는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는 그렇게 각자 얼마짜리 인생을 살고 있다.

인간이란 존재가 이렇게까지 초라하게 전락했던 적이 있었을까. 그래서 이 잡다하고 비본질적인, 그러나 어김없이 치명적인 삶의 굴레를 넘어선, 훌쩍 온몸을 내던지는 문정현 같은 존재가 우리 곁에 있다는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물론 문정현만은 아니다. 오늘의 문정현을 있게 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그 실천도 놀랍지만, 더 중요한 역할은 역사와 현장을 지킨 많은 신부들을 배출했다는 거다. 서울의 김택암·안충석, 인천의 김병상·황상근·호인수, 원주의 신현봉·안승길·최기식, 안동의 류강하·정호경, 광주의 조철현·정형달, 대전의 이계창, 전주의 리수현, 마산의 이응석, 부산의 송기인·박승원 등 대부분 이름조차 낯설지만, 이들은 배신도 변절도 없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키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이제는 대부분 칠십을 넘긴 문정현과 그의 동료들은 그 존재만으로도 힘이 된다. 앞으로 더 잘할 자신은 없어도, 적어도 더 나빠지진 않겠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그래서 문정현과 그의 동료들은 아픈 각성의 바늘이다. 아프지만 각성이 필요한 모든 사람에게 <길 위의 신부 문정현 다시 길을 떠나다>를 권한다.

아쉬운 점도 있다. 김중미 같은 빼어난 작가가 왜 문정현을 그저 천주교 신부로만 묶어두려 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신앙 고백을 문정현을 통해 하려는 것은 천주교 신자 김중미에게는 너무도 자연스러운 일이지만, 천주교 신자가 아닌 독자도 고려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마하트마 간디는 놀라운 힌두교도였지만, 그가 무슬림이나 시크교도 또는 기독교도였어도 우리에겐 별반 다르지 않았을 거다.

문정현은 신부다. 그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그의 신앙과 신부라는 직분이다. 그래도 천주교의 용어나 문화가 낯선 독자들을 위해서 신부든 뭐든 이름 앞뒤에 아무 것도 붙지 않는 그냥 문정현으로만 독자들과 만나게 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어쩔 수 없는 측면도 있겠지만, 종교적 색채 때문에 문정현이란 사람이 주는 감동이나, 책을 읽는 재미가 아주 조금 줄었다. 그래서 아주 조금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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