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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가톨릭으로 개종했는가 ?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 육당

신학 자료

by 巡禮者 2010. 5. 25.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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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가톨릭으로 개종했는가 ?         육당 최남선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육당 최남선 선생은 오랫 동안 불교를 믿고 일제에 타협하기도 했으나  해방과 육이오를 지나고 개인적 국가적으로 여러 아픈 체험을 한 끝에  마침내 가톨릭으로 개종하였습니다.  개종 직후 그가 1955년 12월 17일자 한국일보에 발표한 이 글은 당시 많은 이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안겨 준 글로 유명합니다.

원문을 전부 싣되 일부 어설프나마 요즘 말투로 바꾸었음에 이해를 구합니다.


[나는 왜 가톨릭으로 개종하였는가?]


인생과 종교의 관계는 마치 인체와 공기의 관계와 같으니 특히 둘이 잠깐이라도 떠나 있을 수 없는 점에서 그러하다. 종교는 무엇인가?  우선 일반적인 통설을 따라 신과 인간의 관계라고 하자. 그러면 인간은 신이라는 개념을 어디서 얻어 왔겠는가? 신학적 철학적으로 다 어려운 문제이지만, 우리는 학자의 여러 이론을 떠나서 솔직이 말해서 우주에 충만한 신의 광명이 자연히 인간의 마음속에 촉발하여 신이라는 계시가 된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므로 우리에게는 유신론과 무신론의 갈등을 느낄 까닭이 없다. (저의 부연: 상당히 주목할 만한 견해 같음.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라너의 이론을 연상시키면서도 현대적 한국적 상황도 고려하고서 신 개념을 이끌어 낸 것으로 보임. 신의 광명은 우주에 충만한 것이고  인간의 마음속까지 촉발하는 것인 만큼,  자칭 무신론자라고 해도 신의 광명에 속하는 것인 셈이다. 여기서 익명의 그리스도인과 유사한 개념도 도출될 수 있을 것임)


신의 광명이 인간 마음에 들어가서 갖가지의 신앙 형태를 만들어 내므로 이에 세상에는 많은 종교가 병행한다. 어느 종교든지 궁극 목적은 인생 구제에 있으니 구제란 무엇인가? 우주의 큰 생명과 자기의 작은 생명이 하나가 되도록 인격을 통일하여 나가는 생활 태도의 확립이다.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짧다는 것을 생각할 때 무한한 생명욕을 일으키고, 자기의 능력이 미약함을 인식할 때 무한한 권능에 귀의할 욕망이 일어나니 이 생명욕과 권능욕을 합하여 인간의 향상심(向上心)이라고 한다. 사람이 무한한 생명과 능력을 아무 데서도 찾지 못하다가 마지막 그것을 우주의 신에게서 얻고, 열렬한 희망과 동경으로써 신과 합일되기를 원하고, 이것을 향하여 최대한의 정성을 쏟으면, 신인합일(神人合一)의 경지가 종교의 구제력(救濟力)으로서 인간 앞에 나타나게 된다.


인간으로 하여금 생명의 무한한 연장과 능력의 무한한 확대를 알아듣게 하는 것이 종교의 구제요 그 작용이 구제력이다. 이 구제력의 크고 작음에 따라 종교의 가치가 달라진다. 종교는 이론을 생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를 목적으로 한다. 세상에는 이론은 좋아도 구제력이 거기 따르지 못하고 또 일찌기 구제력을 크게 발휘한 적이 있어도 그 참 생명이 위축되어 이제 와서는 구제의 기능이 거의 상실된 것도 있다. 그런데 구제력 없는 종교는 효력이 없는 약품과도 같으니 다만 이익이 없을 뿐 아니라 왕왕 해독을 기치는 폐도 없지 않다.


종교의 구제는 참으로 개인적인 것이지만 또 때에 따라서는 국가 민족의 집단적 요구에 적응해야 할 경우도 있다. 오늘날 우리 대한이 요구하는 종교는 각 개인의 정신적인 미약을 보강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오늘날 우리 대한의 특수한 모든 문제 해결에 가장 유효적절한 기능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그 기백과 위력과 기구(機構)와 전통이 이러한 역량을 구비하여서 능히 오늘의 부패를 말소하고 무기력을 없애고 혼란 무절제한 이 세상의 기둥이 될 만한 것이어야 오늘 우리 대한의 종교일 것이다. 이상은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관인 바 이러한 정신으로부터 어려서부터 인생 문제, 신앙 문제에 자못 정신을 기울여 왔으나 겨우 부처의 이상이 이 혼탁한 세상을 구제할까 하여 마음을 불교에 붙여 왔으나, 여기서는 얻은 바가 하나도 없고, 늙어가는 몸을 껴안고 세상의 어지로움을 보고 한탄만 하는도다. 그러면 오늘 이 처지에 서서 이 백성을 구제할 만한 정신적인 지주가 무엇일까? 이것을 정확히 판단하는 것이 나의 중대한 과제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스스로 돌아볼 때 한국인이 기대를 가질 만한 족속인가?

한국 민족의 정신 생활사를 검토해 보건대 과거 수 천년간 두 번 빛난 시기가 있었으니 앞서서는 신라 통일기에 찬연히 발현된 화랑도의 순국 정신이요, 가깝게는 서양 문화가 이 땅에 들어올 때 천주교 신자들의 순교 정신이다. (저의 부연: 한국 정신사에 크게 두 차례의 문화 충격이 있었다.

첫째는 삼국시대 초기에 유교 불교 등이 중국을 통해 전래된 일.

둘째는 조선 후기에 그리스도교가 역시 중국을 통해 전래된 일.

 

육당 최남선의 이 언급은 이 한국 정신사상의 양대 문화 충격과 관련지을 수 있는 것으로 주목할 만한 것이다.) 전자는 진작 민족 통일의 위대한 성과를 보였거니와 후자는 아직도 진행 도상에 있어서 능히 얼마만한 공헌을 이룰지 오히려 미지수에 속하는 것이다. (저의 부연: 육당이 민족 통일을 의식하고 있음도 주목할 일. 우리 민족은 지금도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가장 큰 과제로 안고 있다. 천주교가 과연 이 민족 화해와 통일이라는 대과업에 얼마나 그 가톨릭 본연의 역량을 발휘해서 특유의 일조를 할지는

우리에게 맡겨진 큰 시험 무대와 같을 것이다.)


한국 역사의 현 단계는 부패한 인습을 탈피하고 예리한 정신을 진작하여 근대 생활의 자각으로써 세계 문화사에서의 후진성을 극복 지양하고 인류 발전 대로에 당당히 행진하는 능력을 소지함에 있다고 할 때, 어떻게 하면 이것이 가능하게 될 것인가? 이 가능 여부는 진실로 민족 생사의 문제요 확고한 정신적 기반 위에서만 기대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한국의 문화가 기계 산업에서 뒤지고 항해 발전에서 뒤졌다 하여 무턱대고 기계를 만들고 함정을 만들려고 하여서 이 후진성이 얼른 극복될 것인가?

(저의 부연: 아주 긴 안목에서 나온 중요한 언급이 아닐까? 그러나 아쉽게도 우리는 물질적인 근대화만을 서둘렀고 지금도 그렇다. 그래서 정신적인 근대화 또는 문화적인 성숙이 뒤쳐져 지금도 전근대적인 정치 감각과 지역 정서, 비합리적인 인맥에의 뿌리 깊은 의존, 늘어난 부와 자유를 감당할 만한 정신적 자질의 미비 등으로 나라의 앞날이 안심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는 것은 아닐까?)


이렇게 간단한 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어리석음을 한 번 웃지 않을 수 없을지니라. 얼른 말할진대 서양 근세의 문화는 결코 단순한 물질과 이욕의 위에 성립된 것이 아니라, 실로 그 기반 위에는

위대한 정신적 바탕이 있음을 알아야 할지니 그 정신적 바탕이란 무엇이뇨?

(저의 부연: 역시 역사학자로서의 깊은 안목이 돋보이는 대목이다)

 

그 하나는 희랍(그리이스) 시대의 정신 문화와 과학의 기초 작업이요 또 문예 부흥(르네상스) 이래는 인문 정신과 중세기 스콜라 철학의 시작에서부터 생성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며, 그 중에서도 2천년 가까운 카톨릭의 확고한 진리의 힘이 불가사의한 위신력(威神力)으로 말미암았음을 인정하지 않고는

서양 문화의 진상을 파악하였다고 말하지 못할 것이다.(저의 부연: 많은 이들이 이 점을 간과한다. 저는 개인적으로 종교사를 공부한 것에 비추어 이 통찰을 귀하게 여긴다. 근대의 많은 개념들은 중세 그리스도교 개념에서 신을 슬쩍 빼버리고 세속화시킨 형태인 경우가 의외로 많다. 예컨대 막시즘의 경우 그것을 그리스도교의 세속화된 형태로 분석한 예를 볼 수 있는데 수긍할 대목이 적지 않다.)


이제 서양 문명을 배운다 하면서 그 근본의 바탕을 보지 않고 외형만 본다면 그러한 사람에게는 정당한 성과을 기대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저 중국의 유교 및 도교 사상과 인도의 바라문(힌두교) 및 열반 정신(불교)에서 근대 문화가 산출하지 못한 것이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많은 논쟁이 있을 수 있다. 나는 육당의 견해에서 생각할 점이 많다고 본다. 지면 관계상 이만 줄임을 유감으로 생각하면서...)


오늘날 우리 한국은 동양의 작은 나라로서 스스로 정신적인 빈곤을 느껴오다가 중국으로부터 천주교가 전래되자 동양인으로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점이 없지 않으나 서학의 필요성을 모른 체 하지 못하고

그 중에 총명한 이 익, 이 승훈, 남 상교, 정 다산 삼형제 등 일대의 석학들이 여기에 정신을 쏟아 그리도 소중하게 하는 신주를 불살라버리고 제사를 폐기하여 즐겨 덕교상의 죄인이 되니 이 어찌 그네들의 어리석음에서 되었다 할 것인가!


서학의 박해가 시작된 지 백여 년에 일단 신앙의 자유가 생겼으나 그것이 이 국가를 언제나 구제할는지 실로 그 앞길이 요원한 감이 있다. 이제 한국이 정치적으로 해방을 보았다 하고 역사상으로 신국가를 건설하고 신문화를 창조한다 하나 그 입각점을 볼 때에 아무 믿을 만한 정신적 기반이 없음은 오히려 1세기 2세기 이전의 그때와 다름이 없고, 아직까지도 국가와 문화가 든든한 정신적 기반 위에서만

건립 전진이 가능한 것이라는 입문 초보의 지식도 없는 상태에 있음은 실로 통탄할 일이 아닌가!


설사 이만한 식견이 있다 할지라도 어떠한 종교와 사상이 우리의 건국 정신에 지주가 될 만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과연 드물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유교를 그것이라고 할까? 불교를 그것이라고 할까? 프로테스탄트를 그것이라고 할까? 칸트를 데려올까? 마르크스 레닌을 불러낼까? 그 어느 누구도 이만한 중책을 감당하리라고 믿어지지 않는다.


유교에서는 이퇴계가 났다. 그러나 이 퇴계가 몇 묶음으로 나온다 할지라도 오늘의 혼란을 다스리리라고 기대하겠는가? 불교에서는 원효가 났다. 그러나 원효가 떼지어 나온다 할지라도 오늘의 혼탁을 맑게 할 수 있다고 하겠는가? 여기서 우리 눈에는 2천년래 인류의 정신상 생활상 대기주(大支柱:큰기둥)를 문예부흥, 종교개혁, 과학발흥의 온갖 풍파를 치르면서 조금도 동요를 보이지 않고 하늘의 기둥처럼 위용을 보이고 있는 가톨릭이 우리의 시선을 끌지 않는가!

(저의 부연: 가톨릭은 이런 것들의 풍파를 거치면서 처음에는 반발하다가도 속으로는 천천히 그 좋은 점들, 가치 있는 것들을 수용하여 자기 것으로 취하는 모습을 보여 왔음. 그래서 카톨릭, 즉 보편적인 것으로 발전하는 모습을 지닐 수 있었다고 본다. 다음 단락에서 육당도 카톨릭의 이 중요한 면모를 간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가톨릭은 인류 문화의 종교 분야를 담당한 이스라엘 민족으로 말미암아 계시되고 연마되고 완성된 종교에 희랍의 철학과 로마의 조직력과 근세 사상의 정화(精華)까지 합성된 것이다.

(저의 부연: 바로 이 한 문장은 어쩌면 가톨릭의 핵심을 잘 지적한 명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가톨릭은 섬세하고 엄격하여 정신생활 원리로 거의 충족한 성능을 구비한 것 외에 다만 종교적인 진리 면에서도 화엄의 십현(十玄)과 법화의 삼주(三周)에서도 오히려 방불치 못하는 우주 인생의 비결을 명쾌히 설파한 점이 부족한 바가 없도다.


저 조물주로서 천지 만물의 제일 원인을 명시하고, 신의 권능과 섭리로써 만물 창조의 질서와 조화를 설명한 것이 그 일단이다. 이만할진대 개인의 구령으로나 민족의 부활 지도력으로나 아무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


나는 이에 유교, 불교, 모든 종교에서 찾아 얻지 못하던 바를 이제 가톨릭에서 얻은 느낌이 났다.

그리고 아울러 백여 년 전 선조들이 가톨릭을 도입한 그 정신을 깨달아 못내 기뻐하는 것이다.


가톨릭은 교조 예수의 말씀과 같이 이 세상에 평화를 가지고 오지 않고 칼을 가지고 와서 불의를 없애고 의를 세우려 하는 종교이다. 그러므로 그 역사는 투쟁의 기록이요, 의로써 불의를 격멸하는 과정의 기록이며 또 그것이 자연에 맡긴 인간의 사실이 아니라 일대 경륜의 점차적 발전임을 속이지 못할 이다. 그리하여 그것이 이스라엘 땅에 발생하여 로마 즉 당시 세계의 주축으로 들어가서 사방으로 선포되고 중세를 거쳐 근대로 내려오면서 교세가 점점 왕성하고 16세기 초에 예수회원의 일부가 동양으로 와서 예수께서 지구 어디까지도 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부탁이 실현되었다. 그리고, 동양의 금단국조선은 교세의 침입을 기다리지 않고 세계의 전도사상 하나의 예외를 이룬 것의 어느 것이다. 이는 대섭리의 발현으로 볼 것이지 결코 우연의 역사적인 발전으로 보고 말 것이 아니다.


세상에 종교도 많지만 종교가 시작된 그때부터 교리가 조금도 변화됨이 없이 그대로 계속되는 종교가 어디 있으며 또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항상 통일된 생명력을 가지고 항구 불변의 활동성을 가지고 있는 종교가 몇이나 되는가? 이러하기 때문에 가톨릭은 인류 문화의 절대적인 보호 육성자로 유일한 권위의 소유자로서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닌가?


오늘날 우리는 동양의 작은 나라로서 숨겨진 존재로부터 어떻게 세계와 통로를 같이 할 수 있겠는가?

또한 밀려드는 아메리카니즘을 어떻게 방지하고 건전한 신흥 국민의 정도를 개척함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할 때에 우리는 일찌기 19세기 초엽 독일의 도덕 동맹 같은 것을 모방함이 필요함을 말하면서도 그 구체적인 방법을 언급하지 아니 하였다. 이제 가톨릭을 거론할진대 따로 이 도덕 동맹을 운운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또 가톨릭은 국내에 30만의(1955년 현재) 경건한 신앙체를 결성하고 있으며 전 세계에는 4억 7천만이라는 같은 신앙 단체가 있어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를 형성하였으니 이것이 어떻게 일조일석에 될 수 있었겠는가?


한국의 개화를 논함에 모름지기 먼저 정신적인 기반을 논하려면 냉정 공평하게 가톨릭으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가톨릭은 허무맹랑한 공중누각이 아니라 아무런 풍파에도 동요를 보이지 않는 반석 위에 세워진 큰 건물임이 오랫동안의 사실로써 증명되고 남음이 있다.


오늘날 이 정세에서 한국의 내일을 믿음직하게 맡길 곳이 이 가톨릭을 빼고 또 무엇이 있다 하랴!

1955년 11월 17일에 과거 5,60년간의 종교적 체험을 청산하고 가톨릭에 입교하여 영세하니 이것이 나에게 있어서는 개인적으로 구령(=영혼 구원)인 동시에 국가 민족에 대하여는 조국 근대화의 밑바탕이라고 생각한다.


이에 나의 개심을 천하 동료들에게 약술하여 비정(批正)을 청하기로 한다. 우둔한 나에게 이러한 식견을 열어주신 천주께 무한한 성총을 감사하면서 이 붓을 놓는다.

(저의 마지막 부연: 우리의 신앙이 개인적인 영혼 구원의 의의와 함께 우리나라와 민족 공동체를 위한 애국의 의의도 있다는 것을 이 글을 통해 깊이 마음에 새기는 기회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의 종교관이나 그리스도교 이해는 여러 면에서 주목할 점이 많음을 이미 언급했습니다만, 아직 한계와 문제로 지적될 만한 점도 많을 것입니다. 저로서 아쉬운 점은 그의 이 글에서는 예수의 위치나 비중이 너무 가볍게 취급되어 있다는 점, 그리고 카톨릭의 불변성이나 보편성만이 강조되고 그 역동성이나 적응성이 약화되어 있는 점, 정의 못지않은 사랑이나 가난, 겸손 등의 가치에 대한 간과 등입니다. 아직 영세 직후이니 그의 가톨릭 이해에 이러한 한계와 문제가 있음은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 우리의 주목을 끌기에 충분한 점도 많지요. 먼저 말씀드린 것처럼 신앙이나 종교란 것이 단순히 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공동체적인, 민족적인 생사의 문제이기도 하다는 것을 비롯해서... 또, 이 글을 통해 민족의 장래와 종교, 인생 문제에 누구보다도 숱한 경험과 고민을 거듭한 한국 근세사의 선구적인 대학자가 어떻게 입교 당시에 벌써 보석 같이 반짝이는 식견들을 우리에게 나눠주고 있는지, 그냥 지나칠 일은 아니겠지요. 우리도 우리 상황에 맞는 신앙 형태를 계속 발전시키고 또 특히 애국적인 종교를 이 땅에 뿌리내리는 데에도 힘쓰며 끝으로는 각자가 왜 가톨릭인인가 라는 근본 질문에 대한 진지한 탐색과 확고한 자기 확립을 위해 하나의 좋은 자극 같은 것이 되기를 바랍니다.)

 

펀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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