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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의 대화

신학 자료

by 巡禮者 2010. 5. 25.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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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 재 일치운동 개요   


Christian Forster 신부는 프랑스 주교회의의 그리스도교 일치 위원회의 비서였다 (1997-2003). 현재 교구 내 교육국의 책임자이며, 본당신부를 역임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서로가 갈라져 있음에 대해 물음을 던지기 시작한 것은 1910년  에딘버그에서 있었던 개신교 선교 연합회의 한 모임에서 부터였다. 성령의 영감을 받은 한 아시아인 대표는 아시아인들이 그리스도를 알게 되는 일이 큰 기쁨이라 하면서, 한편으론 그리스도교가 여러 분파로 쪼개어져 들어온다는 사실을 아쉬움을 담아 역설하였다.

이를 계기로 1948년 일련의 움직임이 일게 되었고, 백여 개의  다른 그리스도교 분파들이 모여서 시작된  ‘교회 일치 모임’은 오늘날 340개에 이른다.


이 새로운 움직임에 대해, 스스로를 유일한 교회라 여기로 있던 가톨릭 교회는 그리 긍정적 자세를 취하지 않았으며, 단지 다른 교회들의 ‘회개’만을 기다릴 뿐이었다. 하지만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했던 (바티칸 제2차) 공의회는 교회에 큰 변화를 제공하게 된다. 교회의 본질에 관한 재 검토를 통해 가톨릭 교회는 문제를 대하는 새로운 시작을 갖게 된 것이다.

 가톨릭 교회가 그 안에 그리스도를 통해 주어진 구원의 모든 방법을 보유했었는지를 묻고, 또 그리스도의 교회가 ‘그분 안에 현존한다’고 정당하게 말한다 할 지라도, 현재 상황에서 ‘그러했다고’, 또 가톨릭 교회만 ‘홀로’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그리스도가 세우고자 했던 하나인 교회’(요한 17,21)인 가톨릭 교회와 충만한 관계를 이루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미 가톨릭 교회 밖에는 구원의 길을 잃지 않은 그리스도교 공동체들이 있어왔던 것이다.  한편으로 이 관계의 ‘불충만함’은 어느 정도 중요성을 가지는데, 이를 바탕으로 공의회는 개신교와 정교회와의 차이를 구분하였다. 공의회는 정교회에 대해 특별히 구분이 된 ‘교회’라는 인정을 하였고, 다른 공동체들은 (참고인으로 참가한 그들 대표들의 조언을 따라) ‘교회적 공동체’라는 표현을 쓰게 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다시 논하기로 하겠다. 이렇게, 구원의 은총이 다른 공동체 안에서도 이루어져 왔음을 인정함은, 가톨릭 교회가 ‘내가 중심이다’ 라는 과거의 자세에서 벗어나, 가톨릭 교회 역시 (공의회 문헌에서 밝히 듯) 늘 정화의 역사를 거쳐 왔으며, 또한 일치의 노력에 예외 없이 동참해야 함을 인정한 것이다.     


모두에게 열린 대화


 바로 그 순간부터, 가톨릭교회는 대화에 참여, 즉 다른 공동체들과의 대화의 문을 열게 되었다. 요한 23세의 뒤를 이은 바오로 6세는 말한다. “가톨릭 교회는 대화에 힘을 쏟습니다.”  1967년, 이 새로운 (대화의) 상황을 처음으로 맞아 들인 이들은 다름아닌 루터교였고, 이어 성공회와 다른 개혁파 공동체들이, 1980년에 이르러서는 정교회 역시 이를 따르게 된다.  그 후로 이 대화가 단절된 것은 없었다. 비록 여러 어려움이 있고, 여러 다른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1972년 루터교와 가톨릭 교회와의 대화에서는 서로가 매우 가깝다라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고, 반면2000년 볼티모어 회의 에서는 가톨릭 교회와 정교회 간의 대화가 거의 격렬 직전 까지 가기도 했었다.

 


대화의 결실


이 대화의 모임은 우선 서로를 알고, 이해하며, 서로가 바로 한 그리스도의 제자라고 인정하며 마침내는 서로에 대한 신뢰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교회 일치 운동을 통해 보다 특별히 강조되는 점이 바로 ‘친교’이다. 우리가 서로 함께 한다는 사실이, 그리고 비록 대화가 늘 화목한 분위기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지라도 서로 형제로써 의견을 나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늘 대화 참가자들이 행복해 할 수 있는 이유가 된다. 이 신뢰는 다른 형제들의 신앙에 대해  품고 있었던 의혹을 풀 수 있는 밑바탕이다.  예를 들어 동방 정교회와의 대화에서, 유일본성설(그리스도의 인성이 신성에 흡수 되었다고 주장하며, 칼케돈 공의회 정식인 ‘그리스도의 한 위격안에 신성과 인성이 온전히 일치한다’에 반대했던 주장)이 가져온 문제를 보다 명확히 보게 되었고 오늘날 이 문제는 해결되었다. 실상 교의 자체보다는 아직 신학 용어가 신앙의 개념을 표현하는데에 있어서 모호함이 많았던 시대적 한계가 깊은 분열을 가져온 것이라는 데에 서로가 의견의 일치를 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의견의 교환은 역사안에 ‘신앙’ 이외의 분열의 원인들을 짚어 볼 수 있게 해 준다. 실제 정치적 분열이 거의 모든 교회 분열 역사에 깊이 관계를 하고 있는데, 우리의 시대는, 그리스도교인들의 역사 안에서 교회와 정치가 가장 분명하게 구분되는 우리의 시대는 바로 이러한 노력을 가능케 해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1204년, 제 4차 십자군 전쟁당시, 영광스러운 도시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약탈은 그리스도교인들의 관점에서보면 동방과 서방교회 분열의 결정적 사건이었지만, 실제로는 신학적 사건이기 이전에 정치적이고 경제적 이유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하지만 동방교회에 있어서 이 사건은 너무나 참담한 기억으로 남아있기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그리스 방문 당시 이 사건에 대해 사과를 해야 했다. 이런 노력이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이 대화의 실재이다.


현재 우리는 어디까지 와 있는가?

거시적 안목에서 볼 때 상당히 진전이 이루어 졌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문제는 상호이해, 신뢰, 현안이 되는 문제들에 대한 보다 정교한 신학, 보다 명확한 인식을 하는 것 뿐만 아니라 복음적 환경안에서  현시대의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증거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 일치를 이루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그리고 정직하게 살펴본다면, 일치를 향한 실질적인 합의는 또한 매우 드문 것도 사실이다. 사실 동방정교회와의 그리스도론에서 의견 일치를 이룬것과, 가톨릭 교회와 세계 루터교 연합회 간의 모임에서 ‘믿음안에서 은총에 의한 의화’에 서로 동의를 한 것(Augsburg, 독일, 1999년 10월: 1530년 분열을 막기위한 하나의 노력으로 1530년 바로 이 곳에서 ‘아우스부르그의 신앙고백’ 이 선언 되었었다.) 말고는 다른 포괄적인 합의의 모습들을 찾아볼 수 없다.


왜 일치를  아직까지 바라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것을 바탕으로 이제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교회에 대한 이해, 이미 잠시 언급 했었던 ‘교회론’에 대해 말이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고유 의미에 있어서 하나인 ‘교회’라 말하는 것에 동의 하지 않는다. 공의회에서 ‘교회적 공동체’로 언급했었던 그리스도교인들은 오늘날 그들이 역시 ‘교회’로 여겨지기를 원한다.     

먼저, 다음의 문제들이 교회에 대한 본질적인 것을 묻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 교회의 직무가 수품을 통해 사도들로부터 이어져온 것인가(사도성)? 마치 한 교구 혹은 지역교회에서 그들이 그러한 것처럼 이들에 대한 통치권(주교)자 또한 전 세계 교회 차원의 교계안에 종속되는가? 

이런한 것들이 교회의 본질에 해당하는가? 아니면 개신교의 표현처럼 ‘좋은 점들’ 즉 있으면 좋은 어떤 부가적 요소에 불과한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한다면 일치를 위한 어떠한 진전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현재 우리가 직면한 논제이다.

교회 일치 공의회(바티칸 제 2공의회의 정식명칭)의 정신안에서, 신학적 난제들을 연구하는 임무를 신앙교리성은 이와 관련하여 교회론에 대한 폭 넓은 연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결과는 단시일 안에 나오지 않을 것이다.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간의 대화에서 교회론적 논쟁의 핵심은 ‘수위권’이다. 이 문제에 대한 진전은 교회일치 공의회의 요구로 최근에 있었던 그리스 정교회 신학자들과 가톨릭 신학자들이 로마주교의 역할에 대한 역사적 재검토 작업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또한 성공회와 가톨릭간의 같은 주제에 관한 같은 의미의 진전으로, 이 대화의 결과물인 ‘권위의 선물’(1999) 이란 문헌을 찾아 볼 수 있다.   



어떠한 희망이 있는가?

우리는 교회가 단지 일종의 조직에 불과한 것이 아님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회는 구원의 성사이고 그리스도의 신비적 몸이다. 활발한 활동을 하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만남을 찾은 그 모든 것은 바로 성령께 봉사하는 것이고, 바로 그 성령께서 당신의 작용으로, 하느님의 선한 의지에 따라 이루시는 것이다. 성령은 놀라운 일을 하시고 우리가 기대하지도, 희망치도 못한 그런 업적을 이루신다. 꾸란 5장은 ‘하느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교와 함께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드러내시고자 그 신자들을 갈라놓았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 글을 읽으면서 무엇이 문제이고 어디에서 그리스도교 일치의 문을 다시 찾게 될지 헤아려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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