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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청산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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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2. 7. 23. 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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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야 청산 가자/   박계용


 

 
새벽부터 떠들썩한 인부들의 낯선 소리에 잠을 깼습니다. 역한 아스팔트 냄새를 풍기며 우리 집 지붕을 넘나들던 옆집 보수공사가 끝났는지 사방이 까만 먼지투성이였습니다.   깜장 가루가 닥지닥지 내려앉은 꽃망울을 씻어주고 돌아서는 발길에 하마터면 나비를 밟을 뻔했답니다. 시멘트 바닥에 죽은 듯이 앉아 있는 회색빛 작은 나비, 살짝 건드려보니 미세한 움직임이 감지되었습니다.

 

손가락을 타고 오르는 나비를 후리지아 꽃잎에 앉혀 놓았는데 눈 깜짝 할 사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 밀린 집안일이나 하자고 곧 잊어버렸습니다. 몸에 붙어 따라 왔는지 부엌 커튼에 나비가 달려 있었습니다.
다시 손가락에 앉혀 꽃잎에 대어주니 자꾸만 손등을 타고 오르는 나비
, 캐시미어 스웨터가 따스한지 아예 팔 한가운데 누워버렸습니다. 무게조차 느낄 수 없는 주홍 무늬가 선명한 부전나비 한 마리 찾아 들었습니다.

 

 
바람이 무섭게 불어대는 초저녁, 잎사귀 밑에 매달린 나비도 마구 흔들렸습니다거실 탁자에 놓인 화병으로 나비를 옮겨 놓았습니다밖에 있으면 추워 죽을까봐 마음 쓰이고 집안에 들이면 자연을 거슬려 죽는 것은 아닐까
이래저래 걱정이었습니다
.식구마다 검색에 들어갔습니다.
나비는 무얼 먹고 사나?’
꽃의 꿀이나 이슬을 먹고 살겠지 막연했던 생각에 수박이나 바나나의 과일즙을 먹는다는 정보를 얻었습니다. 이름을 지어 주자는 아이들이 저마다 다양한 언어의 나비 이름을 불러보다
그냥 나비라 부르기로 했습니다
.

 
가마타고 시집가는 새색시처럼 풀잎 하나 따서 낮이면 꽃밭으로 밤이면 집안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 볕바른 마당 한가운데 화사한 군자란 꽃방석에 앉혀 놓으면 날개를 활짝 펴서 맴을 돌곤 했습니다. 나비는 절로 날아다는 줄 알았는데 우리 집 나비는 아직 날지 못하고 살살 기어 다니다 툭 떨어져버렸습니다. 아픈 나비 한 마리, 빨리 나아서 청산가자고 창가를 읊어주었답니다.

 



 
나비야 청산 가자 범나비 너도 가자 黑蝶團飛共入山

가다가 저물거든 꽃에 들어 자고 가자 行行日暮花堪宿
꽃에서 푸대접하거든 잎에서나 자고 가자 花薄情時葉宿還

 -조선시대 무명씨-

 

 

바나나를 사들고 부지런히 집에 와보니 나비는 멀리 가지 못하고 딸기 잎에 앉아있었습니다
꽃 수술에 앉혀 놓고 잠시 꽃밭에 물주는 사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조심한다 했지만 물줄기에 쓸려 없어졌는지 꼭 내 탓만 같아 예상치 못한 아픔이 가슴을 훑어 내렸습니다.

 
아직 날은 춥고 어둠은 내리는데 날지도 못하는 나비는 어디로 갔을까
?
혹여 네가 구박했냐고 꽃에게 물어봐도 시침 뚝 떼고 향기만 가득 노란 바나나 한 덩이 댕그라니 앉아 있었지요자꾸만 나비야, 날아보라고 우리 청산 가자했더니 혼자서 갔나봅니다.날 밝기를 기다려 꽃밭을 샅샅이 찾아보았습니다.


눈부신 햇살 아래 이따금 새들이 날아다닐 뿐 담장너머 그 어디에도 나비는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드님을 잃으신 성모님의 고통이 가슴 저리게 느껴졌습니다.  사람이든 곤충이든 갑작스런 이별은 이렇게 아픈 것일까
새삼 놀라는 정을 달래보려 시 한 수 프린트하였습니다
.

 




 
 바람 잔잔한 한낮, 뜰에 앉아 바라보는 *‘종이학은 조용하고 깊은 하얀 눈이 내렸습니다. 마음눈이 내리니 모든 것이 고요했습니다.
그때 꽃밭 턱을 넘어 나비가 나를 향해 아장아장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
순간 갇혀있던 천 마리 학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환상에 빠졌습니다
.
빛나는 기쁨을 나비 등에 업고 온 것입니다
.

 

사흘 동안 어디에 숨어있었을까
?
내가 알지 못하는 생명의 신비 속에 그렇게 첫 이레가 지났습니다
.
때때로 치맛자락에 붙어 술래잡기하던 나비는 곧잘 풀섶에 숨어있다
돌 틈바구니에 쓰러져 있기도 했습니다
.
가만히 살펴보니 오른쪽 앞날개 비늘에 분가루가 매끄럽지 않은 상처가 있었습니다. 낮은 자리가 제자리라고 작은 꽃에 앉아있길 즐겨하던 나비는 두 이레 지난 어느 날 큰 아이의 배웅을 받으며 팔랑 날아갔답니다. 이젠 나도 아프지 않습니다. 걱정하지도 않습니다.
 

 

 청산은 어디에 있을까요
?
다다르기엔 힘들고 고단한 먼 길이기에 꽃잎에서 풀잎에서 쉬었다 가자합니다
. 고치라는 고독의 성에 들어앉아 허물을 벗어내어 몇 겹이고 완전한 변모의 시간이 지나야 나비의 날개가 돋아나는 것이라고 알려줍니다상처 난 날개로는 날수 없으니 기다리는 법을 배우라합니다.

 
게으른 나태에서 벗어나 이탈의 날개를 활짝 펴서 청산으로 날아오라고 홀연히 먼저 떠나버린 나비입니다. 청산은 다다를 수 없는 피안의 세계가 아니라 바로 오늘 하루를 잘 살아 내어조금씩 다가가는 것이라고 일깨어줍니다.
나의 사소한 언행이 생각지도 못한 커다란 결과를 낸다는 나비효과
(butterfly effect), 브라질에서 나비 한 마리의 날개짓이 텍사스의 돌풍을 일으킨다는 자연의 신비 인간의 지혜와 과학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창조의 신비를 어렴풋이 깨닫습니다. 신의 영역인 하늘의 섭리를 거스르지 않고 순응하며 살아가는 나비의 지혜를 배우는 사순의 날에 꿈을 꾸어 봅니다빛살 고운 부활의 아침이 밝아오면 하얀 나비 한 마리 청산 가는 길 날아오르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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