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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궁극적 목적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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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궁극적 목적

 

(1) 법화경의 일불승설

 

대개의 종교는 궁극적인 실재나 원리로부터 시작하여 세계와 인간을 설명해 내려오는 방법을 취한다. 그러나 불교는 이와는 정반대로 현실세계(一切)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궁극적인 원리나 실재를 탐구해 들어가 마침내 그것을 스스로 깨닫게 하는 방법을 취한다. 불교가 일어날 무렵의 인도는 여러 가지 종교가 난립하여 심한 사상적 혼란을 빚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각 종교가 설하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진위성 문제는 각자가 스스로 판단하고 깨닫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고타마 싯달타(Gautama Siddhartha)가 구도 시에 취한 방법은 바로 이것이었으며, 진리를 깨달은 뒤에 사람들에게 전법할 때도 바로 이 방법에 의했었다.

 

이러한 방법을 불교에서는 방편(upaya)이라고 하는데, 궁극적 진리에 대한 깨달음(bodhi)을 행해 점진적으로 접근시켜 간다는 뜻이다. 지금까지 소개해 온 여러 가지 교리는 전부가 그러한 방편에 의해 시설된 것들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삼법인 설로부터 연기, 사제, 육바라밀설에 이르는 여러 법문은 우리 현실 세계의 관찰로부터 시작하여 점차로 심화되어 간 것을 느낄 수가 있다. 그렇다면 불교에서 말하는 궁극적인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그러한 깨달음을 불교에서는 무상정등각(珷上正等覺, anyttara-sanyak-sanbodhi.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라고 한다. 삼법인설로부터 육바라밀에 이르는 각 법문은 그 나름대로 각각 깨달음을 갖고 있다. 그렇게 심화되어 가는 깨달음에서 이제 그 이상이 없는 최상의 깨달음이라고 해서 무상(anuttara) 이라고 부르며, 이 깨달음이야말로 궁극적 진리에 대해 가장 바르고 평등한 것 이라는 뜻에서 정등각(正等覺, 正遍覺, samryak-sambodhi) 이라고 부른다.

 

과거, 현재, 미래의 삼세에 머문 모든 부처님이 이룬 깨달음은 바로 이 무상정등각이며, 그들이 세상에 나가 법을 설하는 궁극적인 목적도 중생들에게 바로 이 무상정등각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법화경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제불세존(諸佛世尊)은 오직 일대사인연(一大事因緣)으로 세상에 출현하나니, 어떤 것을 이르되 오직 일대사인연으로 세상에 출현한다고 하는가. 제불세존은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열어(開) 청정케 하고자 세상에 출현 하나니라. 중생들에게 부처의 지견을 보이고자(示) 세상에 출현하나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부처의 지견을 깨치게(悟) 하고자 세상에 출현 하나니라. 중생들로 하여금 불지견의 길에 들게(入) 하고자 세상에 출현 하나니라.<법화경 권 1 방편품>

 

그러나 부처님이 이룬 그 깨달음은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부처가 이룬 법은 가장 희유하고 난해한 법이니, 오직 부처와 부처만이 제법의 실상을 구진(究盡)할 수 있을 뿐이다. 이른바 모든 법은 그러한(如是) 상(相), 그러한 성(性), 그러한 체(體), 그러한 역(力), 그러한 작(作), 그러한 인(因), 그러한 연(緣), 그러한 과(果), 그러한 보(報), 그러한 본말구경(本末究竟)등이다.<법화경 권 2> 모든 존재의 진실한 모습은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한 모습(如是相) 이라고 시사하는 정도밖에. 더구나 모든 부처는 겁(劫, kalpa)이 흐리고, 번뇌(klesa)가 흐리고, 중생(sattva)이 흐리고, 견해(drsti)가 흐리고, 수명(ayus)이 짧아진 오탁악세(五濁惡世)에 출현한다. 이러한 악세의 중생들은 마음의 때(垢)가 무겁고 간탐, 질투로 말미암아 선한 일을 할 수가 없다. 어찌 부처가 이룬 희유난해(希有難解)한 법을 깨달을 수가 있겠는가?

 

깨달음을 이룬 석가모니께서는 이런 문제로 해서 보리좌에서 깊은 사념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가 이룬 법은 너무나도 심심(甚深)하여 애탐(愛貪)에 가린 중생들에게 도저히 신수(信受)되지 않을 것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전법(傳法)을 단념하려는 석가모니께 범천은 법륜을 굴려 줄 것을 지극한 마음으로 권청하였다고 한다.<장아함 권 1> 이때 그는 과거 부처님들은 어떤 방편을 쓰셨을까 생각해 보았다. 나도 그들처럼 내가 얻은 법을 삼승(三乘)으로 설하리라. <법화경 권 1 방편품>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러한 확신이 선 다음 비로소 석가모니께서는 바라나시(Baranasi)를 향해 떠나셨다고 한다.

 

승(乘, yana) 이라는 말은 타고 가는 것 을 가리킨다. 삼승으로 설한다는 것은 부처의 깨달음에 이르는 하나의 길(一乘)을 셋으로 분별하여 삼승을 설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삼승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법일까? 법화경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첫째는 성문승(聲聞乘, sravaka-yana)이니 사제 팔정도를 닦아 열반을 증득하는 길이다. 둘째는 벽지불승(pratyeka-buddha-yana)이니 십이연기를 닦아 모든 법의 인연을 잘 아는 길이요, 셋째는 보살승(菩薩乘, bodhisatttva-yana 또는 대승)이니 육바라밀을 닦아 깨달음을 구하는 길이다. 지금까지 소개해 온 여러 가지 교리가 그대로 삼승의 내용이라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십이연기, 사제, 육바라밀의 순서로 서술하여, 법화경의 순서와는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것은 서술의 편의상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삼승 중에서 성문승과 벽지불승은 소승에 해당되고 보살승은 대승에 해당된다. 이 두 승은 전혀 차원을 달리하고 있다. 소승은 열반과 생사를 분별하지 않고는 성립할 수가 없으며, 대승은 열반과 생사를 분별해서는 성립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교 경전이 결집되는 과정에서도 아함경(小乘)은 불멸 직후에 열린 제 1 결집 때 편성된 것으로 보이지만, 당시에 대승경전이 결집된 기록은 찾아볼 수가 없다. 그 뒤 부파불교를 거치는 동안 대승경전이 편찬되는데, 보수적인 교단에서는 그것을 비불설(非佛說)이라고 배격하였으며 오늘에 이르기까지 대승과 소승은 하나로 융합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법화경에서 모든 부처는 오직 하나의 불승(佛乘)을 설할 뿐, 이 하나의 불승에서 방편으로 삼승을 설한 것이니, 삼승은 방편(權)이요 일승은 진실(實)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일승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법화경은 대승과 소승이 심한 대립을 일으켰을 때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 출현한 경전이라는 해석이 있다. 그렇게 볼 만한 점이 없지 않다. 그러나 단순히 교단의 분열,대립을 지양하기 위해 출현한 경전에 불과한 것일까? 그렇게 만은 해석할 수 없는 근본적인 면이 있다. 대승 반야 사상이 아함의 교설과는 차원이 다르지만, 그러나 그것이 분별망집을 부정하는 그 논리적 근거는 아함의 인연, 연기설에 입각한 것이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아함의 입장에서는 생사와 열반, 번뇌와 보리 등은 뚜렷하게 분별되어야만 한다. 그러나 그 두 법을 새로운 차원에서 바라보면 그들은 서로 연이 되는 상의상관의 관계 속에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독자적 존재성(自性)은 부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승의 반야 사상을 깊이 연구하여 중론, 대지도론 등의 저술을 남긴 용수(Nagarjuna A.D. 150 - 250)도 반야개공의 논리적 근거를 아함의 연기중도설에서 찾았던 것은 이 때문이다. 즉 그는 유의법(생사)이 있음으로써 무위법(열반)이 있다. <중론 권 1>고 말하고, 여러 인연으로 생한 법(연기)은 공이요 가명이요 중도라. <중론 권 4>고 논하고 있는 것이다.

 

대승의 반야개공설이 이렇게 아함의 인연, 연기설에 논리적 근거를 둔 것이라면, 아함의 교설은 조금만 입장을 바꾸면 곧 대승의 반야교설로 전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법화경의 삼승은 곧 일불승 이라는 교설은 단순히 대소승의 교단적 분열, 대립을 지양하기 위해 출현한 것에 불과하다기 보다는, 석가모니께서 옛날 전법에 나섰을 때의 본회(本懷)를 서술한 것이요, 대소승의 분별은 그런 본원(本願)에 입각한 방편시설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이에 대한 학자들의 견해야 어떻든 간에 적어도 법화경만은 이러한 뜻을 우리에게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2) 불자의 사명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이렇게 열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무상정등각의 획득에 있다면, 다시 말해서 성불에 있다면 모든 불자는 마땅히 그러한 뜻을 향해 발심하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아라한이나 벽지불임을 자처하면서, 모든 부처가 오로지 보살을 교화한다는 사실을 모른다면 이는 불자가 아니며, 또 스스로 이르기를 구경열반을 얻었다고 하면서 무상정등각을 다시 지구(志求)하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증상만자(增上慢者)인 것이다. <법화경 권 1 방편품> 오늘날 서구학자 중에는 불교의 궁극적 목적을 열반에 있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다. 이런 견해 또한 시정되어야 할 것이 명백하다. 일불승설의 뜻을 더욱 뚜렷이 하기 위해 석가모니께서는 다음과 같은 화택(火宅)의 비유를 들고 계신다.

 

부유한 노년의 한 장자가 있었는데, 하루는 자기 저택을 바라보니 사방에서 불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집안에서는 많은 사람들과 자기 아들들이 그런 줄도 모르고 유희에 빠져 있다. 집에는 좁은 문이 하나밖에 없는데, 유희에 탐착(耽着)한 아이들은 불이 났다고 해도 믿으려고 하지 않는다. 여러 가지로 궁리하던 끝에 장자는 방편으로 애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너희들이 좋아하는 양거(羊車),녹거(鹿車),우거(牛車)와 같은 진기한 수레가 문 밖에 있으니 속히 나오너라. 바라는 대로 주겠다. 완구를 좋아하는 애들인지라 서로 밀치면서 모두 밖으로 빠져 나온다. 이때 장자는 애들이 모두 화택을 무사히 빠져나온 것을 확인한 뒤 그들에게 다같이 백우(白牛)를 맨 커다란 수레 백우거(白牛車) 를 나눠준다.

<법화경 권 2 비유품>

 

이 화택유(火宅喩)에서 양거,녹거,우거는 각각 성문승, 벽지불승, 보살승에 해당되고 백우거는 일불승에 해당된다. 처음에 삼승으로 유인하여(方便) 뒤에 다같이 일불승에 들게 하고 있는 것이다. 석가모니께서는 이렇게 불교의 궁극적 목적이 성불에 있음을 설한 다음, 제자들에게 무상정등각의 기(記, vyakarana)를 주고 계신다. 제자 가운데서 가장 지혜가 뛰어난 사리불(Sariputra)에게 수기한 것을 예로 들어보자.

 

그대 사리불은 미래 무량겁에 무수한 부처를 공양하고 정법을 봉지하여 보살행을 갖춘 뒤에 부처가 되리니, 이름을 화공여래, 응공, 정변지, 명행족, 선서, 세간해, 무상사, 조어장부, 천인사, 불세존이라 할 것이다. 나라 이름은 이구(離垢)요, 겁명은 대보장엄(大寶莊嚴)이요, 불수(佛壽)는 십이 소겁이며, 정법주세(正法住世)는 삼십이 소겁이요, 상법주세(像法住世) 또한 삼십이 소겁이리라.<법화경 권 2 비유품> 불명(佛名),국명(國名),겁명(劫名) 등을 낱낱이 분별해 주고 있으며, 불멸 후에 법화경을 읽고 발심하는 사람들에게도 그런 수기가 행해지는 것이라고 설해져 있다.

 

기(記, vyakarana)'라는 말은 분석, 대답, 문법 등의 뜻을 가진 말인데, 여기서는 장차 그런 일이 있을 것을 결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서구학자들은 이 술어를 예언(prophecy)으로 번역하고 있다. 그런데 모든 불자에게 성불에 대한 그러한 기(記)를 주는 까닭은 무엇일까? 수기설에 대한 의미는 여러 가지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가장 기본적인 뜻은 글자 그대로 불교를 신수(信受)하는 사람은 누구나 장차 부처가 될 것이며, 또 마땅히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요청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부처가 된 사람은 불국을 건설하지 않으면 안된다. 수기의 내용에 불명과 국명이 밝혀져 있는 데에는 그런 뜻을 엿볼 수가 있다. 또한 새로운 역사를 창조하지 않으면 안된다. 겁명이 명기되어 있는 데에서 짐작할 수가 있다. 그리하여 법화경은 반야경이 제법개공(諸法皆空)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과는 달리, 불국토 건설, 중생교화를 2대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불국토 건설은 불토정화(佛土淨化)라고도 말해지는데, 사회를 정화하여 정법이 행해지는 이상적인 복지국가를 건설하는 것을 뜻한다. 사리불의 수기에는 그 땅은 평정하고 청정엄식(淸淨嚴飾)하며 안은풍락(安隱豊樂)하여 천신과 인류가 치성(熾盛)하며 유리(琉璃)로 땅이 되고 팔교(八交)의 길이 있으며 황금의 줄이 그 경계를 표시하며 길가에는 칠보로 된 가로수가 있어 항상 꽃이 피고 열매가 맺는다. <법화경 권 2 비유품>고 묘사되고 있다.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와 미래불인 미륵의 용화세계(龍華世界)도 이런 불토의 일종이다. 중생 교화는 괴로움으로부터 중생을 제도하여 요익안락(饒益安樂)케 하는 것을 뜻한다. 지옥으로부터 천신에 이르는 모든 중생류는 생, 노, 병,사의 무량한 괴로움 속에 헤매고 있으므로, 선한 일은 할래야 할 수가 없다. 마음 속에는 탐 ,진, 치의 불길이 꺼질 날이 없고, 입으로 몸으로 갖은 악행을 범하고 있다. 이런 괴로움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길은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불보살은 그들에게 먼저 삼승을 설하여 괴로움으로부터 재도한 다음, 일불승으로써 무상의 깨달음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중생 교화라고 한다.

 

(3) 불타의 위력

 

국토를 장엄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이러한 불타(Buddha)는 어떠한 존재일까? 한 마디로 말하면 무상정등각을 얻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가 있다. 그래서 깨달은 사람 곧 불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오탁악세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는 일에 몸을 바치므로, 그에게는 다음과 같이 좀더 자세히 수식하는 이름이 붙는다.

 

1. 여래(如來, tathagata) : 그렇게 온

2. 응공(應供, arhat) : 동등한

3. 정변지(samyak-sambuddha) :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

4. 명행족(明行足, vidya-carana-sampanna) : 명(明)에의 행을 완성한

5. 선서(善逝, sugata) : 잘 간

6. 세간해(世間解, loka-vid) : 세간을 아는

7. 무상사(無上士, an-uttara) : 더 이상 없는

8. 조어장부(調御丈夫, purusa-damya-sarathin) : 사람을 길들이는

9. 천인사(天人師, deva-manusanam-sastr) : 천신과 인간의 스승인

10.불세존(佛世尊, buddha-bhagavat) : 깨달은 어른


이것을 여래십호라고 하는데 그 말뜻은 위에 소개한 바와 같다. 그러나 그러한 말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는 개론서의 범위를 넘는다고 생각되므로 설명을 생략코자 한다. 다만 그 중에서 맨 앞의 여래(그렇게 온 자)는 부처의 특히 중요한 속성을 표현해 주고 있다. 왜 그러냐면 그 개념은 보살의 반야바라밀다(智到彼岸)와 방향상의 좋은 대조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즉 반야바라밀이 아직도 피안 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 데에 대해서 여래는 차안 에 회향(廻向)하는 방향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세간해,조어장부,천인사 등은 모두가 중생 교화의 활동을 뜻하는 표현들이다. 여래십호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가가 어렴풋이나마 느껴질 것이다.

 

역사적 인물로서의 부처는 지금으로부터 2,500여년 전 인도 카필라(kapila)성 정반왕(Suddhadana)의 태자로 태어나 출가 수도하여 깨달음을 이룬 고타마 붓다 또는 석가모니(釋迦牟尼, Sakyamuni) 를 가리킨다. 그러나 누구든 보살의 길을 걸어 무상정등각을 얻으면 부처가 되는 것이므로, 부처는 석가모니 한 사람에 한정될 수는 없을 것이다. 부처는 과거에도 미래에도 출현할 가능성이 있으며, 현재에도 광대한 우주의 어느 세계에서 부처가 설법을 하고 있을지 모른다. 따라서 아함경에는 과거 칠불(七佛)과 미래불로서의 미륵불이 서술되고, 불전문학(佛傳文學)에는 훨씬 더 많은 수의 과거불이 등장하고 있다. 대승경전에 이르면 부처님의 수는 시방삼세무량제불(十方三世無量諸佛) 로 확대되어 연등, 미타, 아촉, 약사 등을 포함한 많은 부처가 자세하게 소개된다. 그리하여 석가모니는 옛날 무량겁 전에 연등불(燃燈佛)의 수기를 받아 현겁의 사바세계(娑婆世界, sahaloka)에서 성불한 부처로 서술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부처들은 신이 아닌 인간이지만, 무량한 겁에 선업을 닦고 번뇌를 멸하고 우주의 궁극적인 진리를 가장 정확하게 깨달은 것이므로 범부중생이나 다른 종교사상가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위대한 지덕(智德)을 갖추고 있다. 부처만이 갖는 그러한 능력을 경전은 여러 가지로 설해 주고 있는데,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십팔불공법(十八不共法, astadasa-avenika-buddha-dharma)이다. 불공법 이라는 말은 범부는 말할 것도 없고 아라한이나 벽지불 또는 보살과도 공통되지 않는 부처 특유의 법이란 뜻으로서, 십력(十力), 사무소외(四無所畏), 삼념주(三念住), 대비(大悲)의 18을 포함한다.

 

가) 부. 처의 십력(dasa-bala)은 다음과 같은 열 가지 힘을 말한다

 

1. 처비처지력(處非處枝力) : 바른 도리와 그렇지 않은 도리를 판별하는 지력(智力)

2. 업이숙지력(業異熟智力) : 선악업과 그 과보를 여실하게 아는 지력

3. 선정해탈지력(禪定解脫智力) : 사선(四禪),팔해탈(八解脫), 삼삼매(三三昧), 팔등지(八等持) 등을      여실히 아는 지력

4. 근상하지력(根上下智力) : 중생의 근기(根機)의 고하우열(高下優劣)을 여실히 아는 지력

5. 종종승해지력(種種勝解智力) : 중생의 여러 가지 의욕경향(意慾傾向)을 여실히 아는 지력

6. 종종계지력(種種界智力) : 중생계와 그 성류(性類)를 여실히 아는 지력

7. 변취행지력(遍趣行智力) : 어떤 수행에 의해 어떤 도가 나가는가를 여실히 아는 지력

8. 숙주수념지력(宿住隨念智力) : 중생의 숙명을 여실히 아는 지력

9. 사생지력(死生智力) : 중생의 미래를 여실히 아는 지력(天眼通)

10.누진지력(漏盡智力) : 일체의 번뇌(漏)가 다한 것을 여실히 아는 지력(漏盡通)

다시 말하면 부처는 중생심(衆生心)의 갖가지 번뇌, 성향, 수행 등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지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다.

 

나) 부처에게는 이렇게 십력이 있으므로 아무런 두려움이 없는데, 이러한 무소외(無所畏)에는 다음과 같은 네 가지(catur- vaisaradya)가 있다.

 

1. 일체지무소외(一切智無所畏) : 일체지자(一切智者)로서의 자신(自信)

2. 누진무소외(漏盡無所畏) : 일체의 번뇌를 극복하였다는 자신

3. 설장도무소외(說障道無所畏) : 수행에 장애 되는 길을 설할 수 있는 자신

4. 설진고도무소외(說盡苦道無所畏) : 괴로움을 멸하는 길을 설할 수 있는 자신

석가모니께서 사문,바라문,천신(天神),마(魔),인간 등의 가운데서 능히 법륜을 굴리고 사자후를 할 수 있는 것은 이러한 무소외가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다) 부처는 중생을 자식처럼 여기고 구제에 온갖 노력을 기울이지만, 모든 중생이 반드시 그러한 뜻에 응해 주는 것은 아니다. 신수(信受)하지 않을 때도 있고 심한 경우에는 비방, 가해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도 부처는 정념정지(正念正知)에 머물러 흔들림이 없으니, 이것을 염주(念住)라고 하고 다음과 같은 셋(tri-smrtyupasthana)을 든다.

 

1. 제일염주 : 중생이 부처를 신봉하여도 희심(喜心)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正念)에 머묾.

2. 제이염주 : 중생이 부처를 불신하여도 우심(憂心)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에 머묾.

3. 제삼염주 : 중생이 부처를 신봉하거나 비방해도 희심(喜心)과 우심(憂心)을 일으키지 않고 정념     에 머묾.

 

라) 부처의 대비(大悲, maha-karuna)에 대해서는 뒤에 3항에서 자세한 설명이 있을 것이다.

 

부처의 지력과 자신(自信),심정 등의 비범한 속성을 표현하는 이러한 정신적인 십팔불공법 외에 다시 부처의 육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도 그 수승함을 표현하는 삼십이상, 팔십종호 등의 설이 있다. 대승경전에 이르면 부처의 그렇한 위력은 더욱 강조되어 현대 학자들이 부처의 신격화라고 말할 정도로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으로 발전한다. 아미타불은 그렇게 신격화된 부처의 하나로 평해지고 있다. 그렇나 부처는 결코 신이 아니다. 깨달음을 이룬 인간인 것이다. 깨달음은 인간에게 그렇게 위대한 힘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배울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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