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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성당과 콘클라베 역사

주교회의 소식

by 巡禮者 2013. 3. 22.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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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스티나성당과 콘클라베 역사

선거인 추기경들만 입장, 모든 문 닫고 투표


교황 선출권을 가진 선거인 추기경들이 12일 시스티나 성당에 모여 콘클라베(교황 선출)를 시작하면서 세계의 이목은 콘클라베가 열리는 시스티나 성당에 집중되고 있다. 시스티나 성당과 콘클라베 역사 등에 대해 알아본다.

 
 ▨시스티나 성당

 시스티나 성당은 15세기에 성모 마리아께 봉헌된 성당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 화가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같은 걸작으로 유명한 시스티나 성당이 교황 선거를 위한 콘클라베로 장소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레오 13세(재위 1878~1903) 교황을 선출한 1878년부터다.

 평소에는 박물관을 찾는 관람객들의 마지막 관람 장소로 사용되지만 콘클라베를 비롯해 중요한 행사가 열릴 때는 통제된다. 교황청은 5일 오후부터 시스티나 성당에 대한 관람객 방문을 통제하고, 콘클라베에 대비한 점검에 들어갔다.

 콘클라베가 시작돼 선거인 추기경들이 시스티나 성당에 도착해 품계와 나이에 따라 서열 순으로 선거와 관련한 비밀 준수 서약을 하고 나면, 교황 전례처장은 "외부인 전원 퇴장"(Extra omnes)을 라틴어로 명령한다. 그러면 선거인 추기경 115명을 제외한 전원이 퇴장해야 한다. 이어 시스티나 성당의 모든 문들과 창문들이 닫힌다.

 
 ▨콘클라베 역사

 콘클라베(conclave)는 '열쇠를 가지고'(cum clave)라는 라틴어에서 유래하는 이탈리아어로, 교황선거를 가리키는 말이다. 추기경들을 한 곳에 모아놓고 열쇠로 문을 잠근 후 교황을 선출하도록 했다고 해서 유래하는 단어다.

 로마의 주교인 교황이 처음부터 콘클라베로 선출된 것은 아니다. 기록에 의하면 콘클라베에 의한 최초 교황은 제179대 첼레스티노 4세(1241~1241)다. 전임 교황 그레고리오 9세(1227~1241)가 1241년 8월 22일 선종한 후 추기경들은 누구를 후임 교황으로 선출할 것인지를 놓고 의견이 일치하지 않았다.

 후임 교황 선출이 끝없이 늦춰지자 원로들과 백성들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로마 시내 팔라티노 언덕에 낡은 궁전 셉티조니움에 추기경들을 가둬 버리고는 교황을 뽑을 때까지는 아무도 들어가거나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더위와 열악한 환경에 지친 추기경들은 병이 나고 더러 죽기까지 했다. 견디다 못한 추기경들은 연로한 고프레도 추기경을 선출했는데, 그가 바로 첼레스티노 4세다. 하지만 고령에다 콘클라베로 시달린 탓인지 첼레스티노 4세 교황은 불과 17일 만에 사망했다.

 오늘날과 같은 형태의 콘클라베가 시행되기 시작한 것은 제184대 교황 그레고리오 10세(재위 1271~1276) 때다. 전임 교황 클레멘스 4세가 로마 북서쪽 비테르보에 있는 교황궁에서 지내다가 1268년 사망한 후 후임 교황 선출을 위한 콘클라베가 비테르보에서 열렸다.

 하지만 만 3년이 거의 다 될 때까지 추기경들은 후임 교황을 선출하지 못했다. 비테르보 시 당국과 시민들은 추기경들을 가둬놓고는 교황을 선출할 때까지 빵과 물만 제공했다. 이렇게 해서 3년 만에 선출된 교황이 그레고리오 10세다. 그레고리오 10세는 이 방법이 좋다고 여겨 1274년에 제도화했는데, 8일이 지나도 교황을 뽑지 못하면 그때부터는 추기경들에게 빵과 물과 포도주만 제공토록 했다고 한다.
 
 ▨최근의 콘클라베 기간
 최근에 열린 다섯 번의 콘클라베 가운데서 교황 선출이 가장 오래 걸린 것은 1958년 비오 12세가 선종하고 요한 23세 교황을 선출했을 때였다. 콘클라베는 1958년 10월 25일에 시작, 28일에 끝났으며 11번째 투표에서 새 교황이 선출됐다.

 반면 지난 2005년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했을 때는 4월 18일 콘클라베가 시작돼 다음날 4번째 투표에서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에 선출됐다. 최근 열린 콘클라베 기간은 다음과 같다.<표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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