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영심·이해득실, 극복해야할 장애”
자신을 가장하여 자신을 좀 더 그럴듯하게 드러내 보이고 싶어하는 마음이 허영심입니다. 이러한 허영심이 병적으로 발전하면 자기도취적 성격장애를 가져옵니다. 자신에 대한 과대망상으로 대인관계에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입니다. 이러한 장애의 특징은 인정에 집착하게 되고,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에 잠겨 타인의 찬사와 존경을 요구합니다. 성격장애 중 가장 흔하며 또 겉으로 보기에는 별로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일수도 있습니다만 문제는 타인을 사랑할 수 없게 되고 결국은 자신보다 우월하다고 보이는 사람과는 인간관계를 맺지 못하게 됩니다.
물론 허영심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우리 삶에 좋은 결과를 가져오는 강력하고 생산적인 힘이요, 최소한의 허영심은 우리를 죄책감에 빠지지 않고 활동하게 하는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전히 허영심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는 허영심이 삶의 중심을 외부로 옮기기 때문입니다.
삶의 중심이 외부로 옮겨지면 우리는 자신에 대한 평가를 다른 사람의 독단적인 평가에 맡기게 되고, 그 결과 인간의 욕심은 끝없이 다른 사람의 찬양을 갈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욕구가 성취되지 않을 때 우리는 타인보다 낫다는 사실을 강요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헐뜯게 되는 우를 범함으로 결국 타인을 사랑할 수 없는 삶을 살게 되는 비 복음적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전반부는 자리다툼을 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비판하는 내용입니다.
자리다툼. 2000년 전의 모습일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모습입니다. 현재 필자는 자치단체로부터 사회 복지시설을 위탁받아 운영하고 있기에 가끔 외부 행사를 하게 됩니다. 이때 가장 신경을 쓰는 부분 중에 하나가 바로 이 부분입니다. 누가 언제 축사를 해야 하고, 누구를 어디에 앉혀야 결례가 되지 않는지 등등의 문제입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예수님은 윗자리에 앉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말라는 말이지요.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는다. 말은 쉽습니다만 실제 생활에서는 너무나 어렵습니다. 실제 생활에서 어려운 이유는 인간은 자신의 것에 대해서는 맹목적인 애정을 가지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더러운 오물도 자신의 것이라면 달라지는 것이 자신에 대해 가지는 인간의 근본 태도입니다. 그러기에 『과대평가를 하지 않는다』란 말은 객관적이란 말과 함께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말일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자신을 과대평가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의 눈」을 벗어난 눈, 「나와 너의 관계」를 벗어난 제3의 눈, 즉, 하느님을 의식함이 필요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잔치에서 자리를 정하는 이는 초대한 사람이 자리를 정한다는 평범한 사실을 이야기함으로 이점을 분명히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초대자, 하느님을 의식할 때 우리는 매일 우리를 유혹하는 허영심에서 벗어나 겸손이란 그리스도인의 처세술을 실천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질 수 있을 것이요, 하느님을 자각하고 그분의 권리를 인정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자기비하 없는 사랑의 삶을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후반부에서 예수님은 식사에 사람들을 초대할 때는 되갚을 능력이 없는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초대하라고 요구합니다.
한마디로 이해득실에 따른 대인관계를 넘어서라는 말입니다. 이해득실을 따진다. 계산적이다. 이 말들은 분명 우리의 머리에서는 부정적으로 쓰고 있는 말입니다만, 그러나 실제 생활에서는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는 말입니다. 즉, 『이해득실을 따진다』란 말은 머리에서는 『아니다』라고 부정하는 선택의 기준입니다만 실제 생활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적용하는 기준이 바로 이 말이요, 때로는 정의와 공평이란 가면으로 많은 사람을 쓰러뜨리는 유혹의 마음입니다. 특히 시장 경제를 우선으로 하는 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해득실에는 물질적인 것을 넘어서는 정신적인 부분도 포함하는 말이겠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이 이해득실에서 우리는 자유로워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 이해득실을 넘어서야 하는가.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실망과 우울 등 부정적인 감정의 대부분의 원인이 바로 이 이해득실에 있기 때문이고, 또 인간이 사기나 도박 등 각종 헛된 욕심에 빠져 삶을 탕진하게 되는 것도 결국 비용과 보상을 따지는 이해득실이기 때문입니다. 「성실하고 의지적인 삶」, 이해득실을 극복해야하는 당위입니다.
요약해 봅니다. 허영심과 이해를 따지는 마음. 모두가 극복해야할 대표적인 장애물입니다.
물질과 인간을 통해 이해득실과 인정을 추구하는 우리 삶의 자리에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하는 것, 그리고 이해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을 하느님께 맡겨 드리는 연습,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장애물에서 해방하는 길이 아닐까 오늘 복음을 보면서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