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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잃었던 양·은전·아들의 비유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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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24주일-잃었던 양·은전·아들의 비유

발행일 : 2004-09-12 [제2415호]

"머리의 논리보다 가슴의 논리로 살자"



인간의 삶에는 가슴으로 접근해야 할 부분과 머리로 접근해야 할 부분이 있는데 가슴으로 접근해야할 대표적인 부분이 인간관계란 부분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가슴의 논리를 앞세우다보면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할 경우도 있습니다만 분명한 사실은 관계란 면에서는 머리의 논리가 차지하는 넓이 보다는 가슴의 논리가 차지하는 부분이 더 넓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왜 그래야 하는가 하면 가슴의 논리는 때로는 비합리적이고 충동적이란 약점은 가지고 있습니다만 그러한 약점에도 불구하고 가슴의 논리는 삶의 따스함을 불어 넣는 힘이요, 헌신적이고 이타적인 사랑이라는 우리 삶의 최고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동력이기 때문입니다.

경제의 발전과 인간의 행복이 비례하지 않고 오히려 역효과를 가져오는 현상이나 경제 발전이 인간관계에 악영향을 미치는 현상도 결국 경제 자체에 그러한 요소가 있기 보다는 경제를 지배하는 머리의 논리가 가슴으로 접근해야할 많은 부분을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우리는 하나의 삶의 숙제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것은 가슴의 논리의 고유성을 인정함으로써 가슴과 머리가 조화되는 삶, 그리고 나와 너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가슴의 영역을 넓혀 감이 바로 오늘의 숙제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오늘 복음은 3개의 비유입니다. 이 비유들은 모두 세리와 죄인들과 어울려 지내는 예수님에 대한 바라사이파 사람들의 공격에 대한 예수님의 자기변호로서 그 주제는 모두 잃은 것을 되찾는 기쁨으로 요약됩니다.

이 비유들은 실제 우리의 생활 속에서 경험하게 되는 가슴의 영역에 해당되는 이야기이기에 많은 면에서 쉽게 수긍이 갈 뿐 아니라 이야기의 흐름과 뜻에 쉽게 공감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순간의 감정을 자제하고 좀 더 차가운 머리의 논리로 생각해 본다면 이 이야기들은 많은 문제점을 가진 이야기들입니다.

먼저 잃은 양을 찾는 비유. 길 잃은 양 한 마리를 찾기 위해 아흔 아홉 마리를 무시하는 것, 이것은 욕심입니다. 맹수와 강도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한 마리 때문에 99마리를 포기하는 것보다는 오히려 잃어버린 양 한 마리에 대한 미련을 끊고 99마리를 잘 돌보는 것이 현명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잃어버린 은전 한 닢의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정확한 환산은 힘듭니다만 은전 한 닢은 대략 삼 백원(미화 18센트) 전후의 작은 돈입니다. 때문에 돈을 찾기 보다는 돈을 찾는 노력과 수고로 돈을 벌기 위해 노력함이 더 적극적인 행위요 칭찬받을 행동입니다.

그리고 신약성서에서 가장 감동적인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는 비유도 마찬가지입니다. 잃은 아들을 되찾고 기뻐하지 않을 부모는 아무도 없기에 사실 복음의 아버지처럼 잔치를 베풀고 자랑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좀 더 현명한 아버지였다면 어쩌면 그 기쁨을 속으로 삭여야 했습니다. 아들을 다시 찾은 기쁨이 크다 하여도, 큰 아들을 생각하고, 또 작은 아들의 소행을 알고 있는 종들과 이웃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작은 아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기 보다는 차갑게 대함으로 근신케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래야지만 작은 아들은 자신이 저지른 죄의 무게를 실감할 수 있을 것이고, 또 그러한 질책은 성실히 일한 큰 아들에게는 위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이 상을 받지 않고 질책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 때문입니다. 작은 아들의 행동이 지적을 받지 않고 상을 받는다면 탕자의 욕구를 가지고 있는 우리, 작은 아들처럼 행동하고자 하는 미래의 수많은 작은 아들들도 그러한 충동에 너무나 쉽게 빠져 들 위험이 있기에, 아버지의 기쁨이야 잔치를 베풀고도 남음이 있겠습니다만 잔치를 베풀고자 하는 욕구를 다른 이들을 생각하는 마음으로 삭이고, 좀 더 냉정하게 아들을 대하는 것이 좀 더 성숙하고 지혜로운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목자와 여인, 그리고 아버지는 모두 어리석은 행동을 했다는 점이고 예수님은 이를 교훈으로 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은 죄인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보여줌과 동시에 구체적인 대상에 대한 아낌의 마음으로 머리의 논리와 이익을 넘어서는 어리석은 사랑, 관계 때문에 모든 조건과 이유를 넘어서는 바보 같은 눈먼 사랑이 바로 하느님과 예수님이 가르치는 사랑이요, 신앙인이 추구해야할 사랑임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현명함을 찾고 사랑의 조건과 이유를 찾는 머리의 유혹을 자제하는 일, 구체적인 사랑의 대상에 대한 아낌없는 사랑 때문에 때로는 비웃음과 손해를 감수하는 가슴의 논리로 사는 일, 죄인을 감싸안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모습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삶이라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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