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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元曉)와 의상(義湘)|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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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효(元曉)와 의상(義湘)|

 

1. 元曉(617-684)와 義湘(625-702)

 

 김상현 (성천아카데미 고전강좌 / 동국대 역사학부 교수)

 

1. 신라불교사는 中古期의 수용과 토착화, 中代의 불교학 융성, 下代의 禪敎 공존으로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토착화와 교학융성의 교차기에 활동한 원효와 의상은 한국불교사에 우뚝 솟은 봉우리다. 이들이 살았던 7세기는 삼국의 항쟁과 통합으로 이어지는 격변기였다.

 

2. 원효와 의상은 道伴이었지만 다른 면도 많았다.

 

a. 원효는 薛씨, 압량군에서 출생, 15세경에 출가했다. 學不從士했다고 하지만 惠空, 郞智, 普德으로부터 영향을 받기도 했다. 의상은 金씨, 19세에 皇福寺에서 낙발했다. 원효 8세 연상.

 

b. 2차의 渡唐留學 시도. 1차(650년)는 요동까지 진출했지만 실패(원효 34세, 의상 26세). 2차(661년)는 직산에서 원효 悟道, 의상은 홀로 입당.   (元曉曰 ; 我聞佛言三界唯心萬法唯識 故知美惡在我實非水乎)

 

3. a. 원효는 어느 날 길거리에서 사랑을 구했다. "雖許沒柯斧 我斫支天柱" 그는 37세-43세에 해당하는 武烈王(654-660) 때에 요석궁의 寡公主와 결혼, 薛聰을 낳고 小性居士라 함.

 

b. 소성거사 세속의 광야로 돌아오다. 出世法을 對治하는 법은 出出世法이다. 원효의 말. 그는 千村萬落을 다니며 歌舞로 大衆을 교화. 둔하거나 재간이 적은 사람은 글이 많고 뜻이 광범하면 어렵다고 생각한다. 하나의 게송을 외워 항상 생각하게 한다면 마침내 일체의 불법을 두루 알 수 있다. 이 또한 원효의 가르침이다.

 

c. 원효는 경 율 논 三藏에 두루 통하여 萬人의 敵으로 불림.그는 80여부 200 여권의 저서를 남긴 저술가. 대표적인 저서로는 十門和諍論, 金剛三昧經論, 大乘起信論疏 등이 있음.


d. 원효는 화려하고 웅혼한 문장을 구사하던 대문호다. 또한 그는 陳那菩薩의 後身으로 불릴만큼 因明學에도 뛰어났었다. 원효의 사상에는 和諍的 성격이 강하다.

 

4. a. 義湘은 처음 楊州의 州將 劉至仁의 집에 잠시 머뭄. 그 집의 딸 善妙가 의상에 귀의.


b. 長安 終南山 至相寺 智儼門下에서 수업. 지엄은 의상에게 義持, 法藏에게 文持의 號를 줌.


c. 671년 귀국. 洛山寺 창건. 浮石寺(문무왕 16) 창건. 新羅華嚴初祖.


d. 敎團을 통한 조직적 傳敎. 十大弟子(表訓, 眞定, 智通, 良圓, 相源, 道身 등) 華嚴十刹(浮石, 梵魚, 海印, 華嚴, 甲寺 등)


e. 相源의 제자 神琳(8세기 중엽)은 浮石嫡孫. 그가 주재하던 부석사에는 1000명 대중 운집. 신림의 문하에서 法融 등 배출. 표훈과 신림은 불국사 창건에 영향. 緣起는 755년경(경덕왕 14) 화엄사 창건. 順應은 802년에 海印寺 창건.


f. 화엄종의 세력은 토함산, 금정산, 가야산, 태백산, 금강산, 계룡산, 지리산, 천관산, 월악산 등 전국적으로 확산.


g. 著作 ; 華嚴一乘法界圖, 白花道場發願文, 一乘發願文, 投師禮, 西方歌 등 偈頌類가 대부분임.


h. 淨土信仰 ; 專求安養 平生坐不背西. (부석사의 특이한 가람 배치) 普賢行願 ; 惟願世世生生處 三種世間爲三業 化作無量供養具 充滿十方諸世界人間의 尊嚴과 平等을 강조. 吾五尺凡身卽是法身自體 (오체불) 我法平等 高下共均 貴賤同揆


i. 문무왕 21년 6월. 王欲新京城 問浮屠義湘 對曰雖在草野茅屋 行正道卽福業長 苟爲不然 雖勞人作城亦無所益 王乃止役.

 

5. a. 신라인들 원효를 陳那菩薩의 後身, 靑丘의 龍, 의상을 寶盖如來로 인식. 800-808년경에는 高仙寺에 원효의 塑像을 봉안하고 誓幢和上碑를 세움.깨달음을 얻은 직산의 옛무덤은 기념할만한 유적지로 알려졌고, 낙산사 근처의 觀音松과 冷泉은 조선초까지도 유적지로 남아 있었다. 의상의 법계도는 그 후계자들에 의해 꾸준히 연구되어, 훗날 法界圖記叢髓錄에 집대성되었다. 崔致遠은 浮石尊者傳을 지었다.


b. 1101년(숙종 5) 원효에게 和諍國師, 의상에게 圓敎國師 호를 추증하고, 분황사와 부석사에 각각 비를 세웠다. 특히 義天은 원효를 재인식하고, "元曉聖師의 오른쪽에 가는 先哲이 없다"고 했다. 12세기말 13세기 전반에 芬皇宗은 원효의 遺法을 繼承 闡明했다.

 

6. a. 의상에 의해 비롯된 신라의 화엄종은 중국의 경우와는 달리 실천신앙의 성격이 강했다. 존경의 마음을 가득 담아 의상에게 보낸 賢首國師 法藏의 편지가 일본 天理大 도서관에 전한다. 원효의 華嚴經疏는 중국에 전해져 賢首, 혜원,징관 등에 영향을 주었고, 起信論疏는 海東疏로 애칭되고, 金剛三昧經疏는 論으로 존칭되었다. 十門和諍論은 天竺에 까지 전해짐. 혜원은 원효를 두고 "東夷 변방에서 났을망정 그 학덕은 당나라를 덮었다"고 했다.


 b. 원효의 대부분 저서가 일찍부터 일본에 유통, 曉(728-798),常騰(740-815), 善珠(723-797), 凝然(1240-1321) 등에 많은 영향을 줌. 원효의 현손 薛仲業 이 사신으로 일본에 갔을 때 금강삼매경논을 읽었던 일본의 上宰가 원효를 讚頌하는 글을 주어 신라에 전해짐. 12-13세기경 일본에는 원효의 전기인 元曉和上緣起, 元曉事抄등 유포. 高山寺의 明惠(1173-1232)는 특히 원효와 의상을 존경함. 1206년경 華嚴緣起 6권 제작.(일본국보) 善妙의 外護紳化.

 

2. 元曉와 義湘은 道伴

 

원효와 의상은 진정 좋은 벗이었다. 원효의 전기에는 의상에 관한 이야기가 붙어 다니고, 의상의 경우도 마찬가지인 것은 이들의 그만큼 깊은 인연 때문이었다. 원효와 의상이 함께 살았다는 사찰도 적지 않은데 이 중에는 훗날 꾸며진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조선 후기에 이르면 원효와 의상이 형제간이었다는 설과 사제지간이었다는 설이 생겨날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강조된다. 이 또한 사실이 아니겠지만, 두 사람을 그토록 가까이 묶어놓고 싶었던 후대인의 생각까지를 탓할 필요는 없다.

 

두 사람은 참으로 좋은 친구인 까닭에 의상을 아는 것은 곧 원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원효와 헤어져 홀로 당나라에 들어갔던 의상은 장안에 있는 종남산에 위치한 지상사로 갔었다. 그 곳의 지엄(智儼) 문하에서 화엄학을 수업한 8년 동안을 하루 같이 했다. 중국 화엄종의 제2조로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지엄으로부터 배운 의상의 화엄학은 스승이 감탄할 정도로 깊은 것이었다.

 

의상은 종남산에 머무르는 동안 도선율사(道宣律師)와 교류해서 예우를 받기도 했고, 동문인 현수 법장(賢首法藏;643~712)과 맺었던 친교는 오래 잊지 못할 만큼 우정 깊은 것이었다. 물론 법장은 18세 연하의 후배였지만, 훗날 법장은 중국 화엄종의 제3조가 되었고, 화엄학의 체계를 이룩했던 큰 그릇의 인물이었다. 국제도시로서의 면모를 자랑하고 있던 당시의 장안, 그 곳에서 10년 세월을 살았던 의상은 화엄학 이외에도 많은 것을 보고 배웠을 것이다.

 

원효와 의상이 헤어져 있었던 그 시절에도 서신의 왕래는 있었을 것이고, 특히 의상이 원효에게 새로운 서적 등을 보내고 있었을 것임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일이다. 의상이 신라로 돌아온 해는 문무왕 12년(672), 10여년을 떨어져 살았던 두 도반의 만남은 반갑고도 유익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원효가 의상을 만나 교리상의 의문 세 가지를 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화엄교학의 경우, 원효가 의상으로부터 새로운 이론을 배우는 입장에 있었을 것임은 짐작되는 일이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아무리 원효가 선배이고 불교학의 여러 분야에 두루 통했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학문 경향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기에 그렇다. 더구나 평소 당나라 불교학계의 동향에 대해 민감했던 원효의 학문적 태도에 유의할 때, 그가 의상을 통해 새로운 것을 배우고자 했을 것임은 당연한 것이었다고 하겠다.

 

 의상이 지엄으로부터 배웠던 數錢法을 원효가 옳은 것이라고 수용했던 것은 하나의 좋은 예다. 원효는 그의 {普法記}에서, "수전법은 지엄법사의 설인데, 의상법사가 전한 것으로써, 그 뜻을 헤아려 보니 도리가 있기에 서술하는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원효와 의상은 더없이 가까운 도반이었지만 그 인물됨은 서로 여러 면에서 판이했다. 이들은 우선 출신 배경부터 달랐다. 사랑의 방법도 달랐고, 학문적 경향도 달랐으며, 당연한 결과로 교화의 방식도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성격에 차이가 있었던 것도 물론이다. 원효가 지방에서 태어나고 6두품의 신분이었음에 비해, 金漢信의 아들로 태어난 의상은 진골 귀족에 속했다.

 

당시 신라사회는 골품제로 인해 모든 활동에 제약이 가해지고 있던 사실을 감안할 때, 이 점은 두 사람을 이해하는데 많은 시사를 준다.물론 출가 이후 불교 교단에서야 평등이 보장되고 있었지만, 젊은 시절의 인격 형성에는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수행자였던 이들에게도 사랑의 이야기는 있었다. 그런데 원효와 요석공주와의 사랑과 의상과 善妙와의 사랑은 크게 달랐다. 의상의 경우를 보자. 험한 뱃길을 헤치고 당나라 등주에 도착한 젊은 의상은 그 곳의 신도인 劉至仁의 집에서 며칠 동안 머문 적이 있다. 그 때 그 집의 아리따운 아가씨 선묘가 의상에게 첫눈에 반해 버렸다. 그러나 차돌처럼 단단한 구도자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었다.

 

선묘는 의상과의 현실적인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음을 알고 구도심을 발하여 원을 세웠다. "世世生生토록 스님에게 귀의하여 대승을 배우고 큰 일을 이룩하겠습니다. 제자는 시주가 되어 필요한 생활용품을 바치겠습니다."고. 10년 세월 짝사랑으로 보낸 선묘는 의상이 신라로 가는 배를 탔다는 소식을 듣고 해변으로 달려갔다. 저만큼 배는 떠나고 있었다. 선묘는 바다로 뛰어들어 한 마리 큰 용으로 변하여 이역 만리 신라에까지 따라왔다. 그리고는 부석사의  우물에서 그 용은 살았다.

 

이것이 의상과 선묘에 얽힌 애틋한 사랑의 이야기이다. 길거리에 나서서 사랑을 구했던 원효에 비해 의상의 경우와는 이처럼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리고 이들의 학문적 태도 또한 크게 달랐다. 원효는 불교의 전 분야에 관심을 가졌다. 화엄도, 유식도, 대승도, 소승도, 심지어는 노장사상에 이르기까지 그의 관심은 광범위 했다. 그러나 의상은 오직 화엄학 하나에 전력을 기울였을 뿐, 다른 분야에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긴 말을 하지 마라. 다만 하나만 말하면 되니까". 이것은 의상이 스승 지엄으로부터 배운 교훈이다.

 

이처럼 의상은 많은 말이 필요 없음을 알았다. 의상은 많은 저서를 남기지 않았을 뿐 아니라 몇 안되는 저서도 짧은 게송류이다. '白花道場發願文'과 '一乘發願文', 그리고 '投師禮'는 모두 게송이다. 그의 7언30구 '法性偈'도 60권의 방대한 {화엄경}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었다. 이에 비해 원효는 말이 많은 편이었고 시끄러운 사람이기도 했다. 蛇福이 원효에게 말이 많다고 했던 까닭도 이 때문이리라. 따라서 원효는 저술 또한 의상과 대조적으로 방대한 양을 남겼다.

 

원효는 대중의 가슴에 불법의 씨앗을 뿌리기 위해 천촌만락을 누비며 다녔다. 그러나 의상은 태백산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채, 제자 교육에 온 정성을 쏟았다. 제자들이 그에게 도움을 청해 물어올 때면 그는 급히 서두르지 않았다. 제자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않기를 기다린 다음 가르쳐 주되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았다고 한다. 조용하고 진지한 의상의 모습이다.

 

의상은 제자들에게 자주 말했다. "너희들은 마땅히 마음을 잘 써야 한다". "이것은 참으로 중요하니 항상 생각하도록 하라". "탁본으로 하여 탁이 나오고, 도끼 자루를 가져야 나무를 베는 것이니, 각자는 힘써서 자기를 속이지 말도록 하라". 이처럼 제자 교육에 정성을 쏟은 결과, 의상으로부터 비롯된 신라의 화엄종은 전국적으로 그 세력을 키워갈 수 있었다. 부석사를 비롯하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등 화엄종의 큰 사찰이 전국에 세워졌던 것도 이같은 노력의 결과였다.

 

원효에게도 훌륭한 제자가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교단 조직을 통한 교화보다는 대중 교화에 더욱 노력했던 원효는 의상과는 달랐다. 원효의 교학을 계승한 제자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의상의 제자들과는 그 체계와 응집력이 아무래도 달랐다고 생각된다. 원효도 의상도 당대에 명성을 얻었음은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원효의 명성 뒤에는 언제나 구설수가 따라 다녔음에 반해 의상은 그렇지 않았다.

 

문무왕은 의상의 뛰어난 활동에 감사하며 토지와 노비를 하사하려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의상은 사양하며 말했다. "무엇 때문에 토지가 필요하고 어찌 노복을 거느리겠습니까? 저는 法界로 집을 짓고 바릿대로 농사지어 익기를 기다릴 뿐입니다"라고. 통일을 이룩한 후의 문무왕은 왕경을 일신했고, 또한 거대한 성곽을 쌓고자 했다.

 

이 소식을 들은 태백산의 의상이 왕에게 글을 보내 만류했다. "왕의 정치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서 성이라고 해도 백성이 감히 넘지 못하지만, 정치가 어지러우면 비록 거대한 성이 있더라도 재앙을 면키 어려울 것입니다"라고. 문무왕은 의상의 건의를 받아들여 축성 공사를 중단했다. 이처럼 의상의 영향력은 불교교단의 범위를 넘어 현실문제에 이르기까지 대단했던 것이다.

 

원효는 노래와 춤으로 대중을 교화했고 그의 행동은 구애됨이 없었다. 의상은 철저히 수행자의 본분을 지켰다. 정토신앙에 투철했던 의상은 일생 동안 한 번도 서쪽을 등지고 앉는 법이 없었다. 오직 아미타불이 계시는 서쪽을 향해 앉았을 뿐. 의상은 무소유를 실천하여 의복과 바루와 물병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그는 언제나 온화하고 서늘했다고 한다.

 

말과 행동이 거칠기 이를 데 없었던 원효, 게다가 다시 세속의 거리로 돌아와 요석공주를 만나 아들을 낳고 거사의 형색으로 살았던 원효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어느 하루도 의상은 바루와 가사를 버린 적이 없고, 한 번도 함부로 앉는 법이 없었기에 더욱 그렇다. 훗날 의상은 보개여래(寶蓋如來)의 화신으로까지 추앙받았다. 원효도 물론 진나보살(陳那菩薩)의 後身, 청구(靑丘)의 龍, 보살, 성인 등으로 존경받았다.

 

이처럼 성격, 행동양식, 삶의 방식에 이르기까지 상이했던 원효와 의상, 하지만 이 두 분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진정으로 우정을 나누었던 도반이었다. 그 대조적인 모습에도 불구하고 함께 구도자의 길을 가고 불법의 등불을 전하고자 했던 염원은 조금도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의상은 단정한 수행자의 모습을 고수했고, 원효는 거사의 형색으로 거리로 나서기는 했지만, 세속의 먼지 속에 파묻히지는 않았다. 두 사람은 서로 달랐으면서도 친했다.

 

오히려 서로가 꼭 같지 않았기에 상대방의 부족함을 보완해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원효에게는 의상의 조용하고 단아한 모습이 좋았을 수 있고, 의상에게는 원효의 떠들썩하고 호방한 기품이 부러웠을 수도 있다.  두 사람은 누구보다도 상대방의 장점을 알았을 것이고 개성의 소중함을 아낄 줄도 알았을 것이다.

 

원효는 참으로 자유로운 무애도인의 길을, 의상은 철저한 수행자의 길을 갔다. 한 사람은 대단히 정밀한 자를 가지고, 한 사람은 잣대마저 버린 채 불법이라는 진리를 쟀다. 의상은 정밀했기에 통했고, 원효는 잣대보다도 더 큰 것을 가름했다.

 

3. 원효의 역사적 위치

 

(1) 원효의 성은 설씨이다. 아버지 담날(談捺)은 압량군(지금의 경북 경산)의 불등을촌에 살았던 11위인 내마(奈麻)였다. 어머니는 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했으며, 출산 때에는 오색 구름이 주위를 덮었다고 한다. 원효는 밤나무 밑에서 태어났는데, 진평왕 39년(617년)이었다. 담날은 아이의 이름을 서당(誓幢)이라고 지었다. 불등을촌은 원효를 배출한 인연으로 해서 불지촌(佛地村)으로 불렸다.

 

(2) 원효의 출가 시기는 15세쯤이었다. 그가 남긴 {發心修行章}에는 젊은 날 스스로를 채칙질하며 수행에 몰두하던 구도자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좋은 음식으로 길러도 이 몸은 무너질 것이고, 부드러운 옷으로 보호해도 목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 …… 수행이 없는 빈 몸은 길러도 이익이 없고, 덧없는 목숨은 아껴봐도 보전하지 못한다. …… 백년이 잠깐인데 어찌 배우지 아니하며, 일생이 얼마라고 닦지 않고 방종하랴. …… 四大는 흩어지니 내일 살기 기약없고, 오늘은 이미 저녁, 아침부터 서둘러야 하리로다. …… 龍象大德이기를 바랄진데, 긴 세월 고통을 참아야 하고, 사자좌에 앉기를 기약한다면 욕심과 향략 영영 던져야하리.] 허망한 몸둥이를 살찌우면서 세월을 허송할 일이 아니라, 마음을 일으켜 수행에 부지런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는 이 글을 통해서 정진으로 보냈을 젊은 날의 원효를 그려볼 수 있다.

 

(3) 원효는 무열왕(654∼660) 때에 결혼했고, 그의 나이 37세로부터 43세에 해당하는 시기다. 그는 "出世法은 世間法을 치유하는 법이고, 出出世法은 출세법을 치료하는 법이다"라는 말에 유의한 바 있다. 그는 설총을 얻은 뒤에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로 자호(自號)했다. 그가 거사의 모습으로 살았다고 해서 불교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더 열심히 학문에 정진했고, 더욱 자유롭게 교화 활동을 펼쳤다. 바람부는 세상의 거리에 나서서 민중의 고통을 구제했던 원효의 대중교화는 그의 학문적인 성과나 사상의 깊이 못지 않게 중요한 의미가 있다. 황량하고 거친 세상이라는 들판에서 삶에 지친 사람들의 묵정밭을 일구고 가꾸는 일이란 보살행의 실천이기 때문이다. 원효는 千村萬落을 떠돌며 노래하고 춤추며 대중을 교화했다고 한다.

 

그가 만난 사람은 다양하다. 그의 익살과 웃음, 노래와 춤 등은 삶에 지친 거리의 사람들에게는 신나는 일이었고, 잠자는 영혼을 흔들어 깨우는 것이었으리라.  그는 "해와 달을 머리에 이고 살면서도 어둠을 물리칠 줄 모르는 범부들"을 흔들어 깨우고자 했다. "스스로 자기가 미혹되어 있음을 깨닫는 자는 크게 미혹되어 있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 자기가 어둠 속에 있음을 아는 자는 지극히 어두운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또한 원효의 가르침이다.

 

원효는 보경(普敬)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두루 공경한다는 것은 자기를 던져 중생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이다. 원효는 "둔하거나 재간이 적은 사람에게는 하나의 게송을 외워서 항상 생각하게 한다면 마침내 일체의 불법을 두루 알 수 있다"고 하면서 사람들에게 간단한 염불을 권했다.

 

(4) 원효는 대학자였다. 천부적 재능과 불같은 열정과 냉철한 비판안과 정확한 논리, 그리고 뒤어난 문장력을 갖춘 위대한 학자였고, 100여부 240여권의 저서를 남긴 세계적인 대저술가였다. 그는 경·율·론·삼장(三藏)과 대·소승 경전에 두루 통했던 웅대한 안목의 학자였다. 그는 불교 사상을 새롭게 종합하고 체계화시켜 독창적인 사상을 천명해서 고금(古今)의 오류를 바로 잡았다. 그 체계화는 그의 독특한 교판(敎判)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송고승전}의 저자 찬녕(贊寧)은 학자로서의 원효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기도 했다. [원효는 진리의 성을 용감하게 공격하고, 文陣에서 종횡무진 당당히 분투해서, 나아갈 뿐 물러서는 일이 없다. 三學에 두루 통하여 그 나라에서는 만인지적(萬人之敵)이라고 했다. 도리에 정통하고 入神의 경지에 도달함이 이와 같았다.]

 

의천(義天)은 "원효성사 오른쪽에 가는 선철(先哲)은 없다"고 하면서, "오직 용수(龍樹)와 마명(馬鳴)만이 원효에 짝할 수 있다"고 했다. 원효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를 통틀어서 그 양과 질에 있어서 최고수준의 저술가였다. 사실 한국불교사상 원효를 능가하는 저술가는 찾기 어렵다. 신라의 의적(義寂)이 25부, 경흥(憬興)이 40여부, 태현(太賢)이 50여부의 저술을 남겼지만 원효에 비할 바는 못된다. 중국의 학승도 원효를 따르지 못했다. 지의(智 )는 30여부, 법장(法藏)은 50여부, 백본소주(百本疏主)로 불리는 규기(窺基)의 경우도 50여부의 저술을 남겼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원효의 학문에는 중국의 불교계나 혹은 유학을 다녀왔던 승려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다. 유학승들의 대부분은 어떤 종파나 전공을 고수하고 있었는데, 이는 종파적 성격이 강한 중국불교의 영향이기도 했다. 그러나 원효의 학문적 관심은 어느 한 분야에 머물지 않았다. 원효는 좁은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 "갈대 구멍으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는 격"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봉황새가 靑雲에 날아 오르면 산악의 나직함을 내려다볼 수 있듯이, 학자가 {화엄경}의 보문에 들어서면 그때서야 먼저 배운 것이 편협함을 알게 될 것이다"라고 했던 원효는 높이 날아올라 더 넓은 세계를 조감했던 웅대한 안목의 학자였다.

 

그의 독창적인 교판과 화쟁사상의 전개에는 불교사상 전체를 조감할 수 있는 큰 안목이 뒷받침 되었던 것이다. 원효 교학의 독창성은 {敎相判釋}에서 돋보인다. 교판이란 많은 경론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 것인데, 종래의 중국교판가들은 흔히 종파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경향이 있었지만, 원효는 객관적인 입장에서 종래의 잘못을 바로 잡고 공평한 판석을 내렸다고 평가받고 있기 때문이다.

 

(5) 원효는 어떤 인물인가? 그의 모습은 다양하고, 그의 삶의 폭도 깊고도 넓어서 간단히 규정하기 쉽지 않다. 그는 승려이면서, 거사였고, 사상가이면서 동시에 대중의 스승이기도 했다. 그는 "고요하나 항상 움직이는 모습을(靜而恒動威), 행동하되 언제나 고요한 덕(動而常寂德)을 잃지 않기를" 권고하기도 했다. 그는 아무 걸림이 없는 자유인이었다.

 

[그의 발언은 미친듯 난폭하고 예의에 어긋났으며, 행동은 상식의 선을 넘었다. 그는 거사와 함께 주막이나 기생집에도 들어가고 誌公처럼 금빛칼과 쇠지팡이를 지니기도 했으며, 혹은 주석서를 써서 {화엄경}을 강의하기도 하고, 혹은 사당에서 거문고를 타면서 즐기고, 혹은 여염집에서 유숙하기도 하고, 혹은 산수에서 좌선하는 등 계기를 따라 마음대로 하는데 일정한 규범이 없었다.]

 

이상은 {송고승전}이 전하는 원효의 자유로운 모습이다. {破閑集}에서는 원효가 시중잡배들과도 어울렸다고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원효가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교화했다고 기술했다. 그의 여러 모습은 곧 분백신(分百身)이고 백처현형(百處現形)이다.

 

인간은 온갖 사슬과 속박으로부터 마땅히 해방되어야 한다. 원효는 인간의 진정한 자유를 이론적으로 규명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으로 이를 구현했다. 이 때문에 그의 무애사상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원효는 일정한 범위나 틀 속에 안주하기를 거부했다. 그가 [유방외(遊方外)], [초출방외(超出方外)]등의 표현을 즐겨 썼던 것도, 무애의 자유인으로 행동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나리(一切無碍人 一道出生死)." 원효는 {화엄경}의 이 게송을 재발견했고, 이로부터 무애라는 용어를 취했었다.

 

"태산같은 자부심을 갖고 누운 풀처럼 자기를 낮추어라"는 {잡보장경}의 이 귀절은 인간 원효에 그대로 적용시켜도 무방할 것 같다. 그는 높이 날으는 봉황새의 기상을 갖고도 산 기슭에 사는 작은 새의 행복을 잊지 않았다. 그의 가슴에는 하늘을 찌를 듯한 자긍심이 있었다. 백개의 서까래가 아닌 하나의 대들보임을 자부하고, 하늘을 떠받칠 기둥으로 자처할 만큼의 자긍심이었다. 그러나 그는 교만의 콧대를 스스로 꺾을 줄 알았기에 소성거사의 모습을 하고서 낮은 곳으로 임했다. 원효는 거침없는 비판자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잘못을 돌아볼 줄 아는 이였다. 그는 화해의 명수이면서도, 잘못에 대해서는 "아니"라고 분명히 말하는 비판자였다. 때로 그의 발언은 불호령이었고 하늘의 북소리(天鼓)였다.

 

(6) 원효는 당시 신라 사회에서 거리의 대중들로부터 왕실에 이르기까지 두루 영향을 미쳤다. 심한 종기를 앓아 고생하던 왕비를 위해 {금강삼매경론}을 쓰고 이를 황룡사에서 강의했던 이야기는 원효가 당시 신라 사회에 있어 정신적으로 큰 의원같은 존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원효의 교학은 신라의 경흥(憬興), 도륜(道倫), 현융(玄隆), 태현(太賢), 견등(見登), 표원(表員)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분황사, 고선사, 흥륜사 등에는 원효의 소상(塑像)이 봉안되어 있었다. 고선사에 서당 화상비가 세워진 것은 9세기 초였고, 낙산에 있었던 관음송(觀音松)과 냉천(冷泉) 또한 원효와 관련된 유적으로 알려졌다. 신라에서는 원효를 구룡대사(丘龍大師), 진나후신(陳那後身), 만인지적(萬人之敵) 등으로 존칭하기도 했다.

 

원효의 교학은 고려의 균여(均如), 의천(義天), 지눌(知訥), 요세(了世), 보환(普幻) 등에게 영향을 주었다. 특히 의천(1055∼1101년)은 원효의 저서를 수집, 간행하고 이를 송나라와 요나라에까지 유포하기도 했다. 의천은 원효보살(元曉菩薩), 원효성사(元曉聖師) 등의 존칭을 사용하면서까지 그 위대성을 강조했고, 불교사상사에서 차지하는 원효 교학의 의의를 "고금의 잘못을 바로 잡고 백가의 서로 다른 논쟁을 화합시킨 것"으로 천명했다. 숙종 5년(1101년)에는 국가에서 원효를 동방의 성인이라고 하면서 화쟁국사(和諍國師)의 호를 추증하고 분황사에 비를 세우도록 했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흔히 원효를 대성(大聖), 성사(聖師), 효성(曉聖) 등으로 존칭했다.

 

조선시대의 원효에 대한 인식은 구전되던 설화에 의한 신이(神異)한 도승(道僧) 정도가 고작이었다. 고선사와 분황사에 전하던 원효의 비는 깨어졌고, 여러 유적지는 잊혀져 갔으며, 많은 명저들은 읽는 이 없이 흩어지고, 겨우 한 두 편이 간행되었을 뿐이다. 민족적 위기를 맞고 있던 식민지시대에 이르러 원효의 위대성은 다시 강조되었는데, 그것은 민족적 자존심으로 까지 인식되었다.

 

(7) 의천은 원효의 명성이 중국과 인도에까지 떨쳤다고 했다. 당나라에 왔던 진나(陳那)의 문도들에 의해 원효의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 번역되어 천축에까지 전해졌던 사실을 상기할 때 의천의 이 말은 과장이 아니다. {금강삼매경론}은 중국에서 소(疏)가 논(論)으로 존칭되었다는 설이 있고, {화엄경소}는 당나라 화엄학자들의 주목을 크게 받았으며, {긴신론소}는 해동소로 애칭되기도 했다. 그리고 법장이 제자 징관에게 {기신론해동소}를 강의했던 것은 유명한 일이다.

 

당나라 학자들의 저서에는 원효의 학설을 인증(引證)한 예가 많은데, 법장(法藏), 혜소(慧沼), 이통현(李通玄), 양비(良賁), 담연(湛然), 혜원(慧苑), 징관(澄觀), 정빈(定賓) 등의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법장의 화엄교학은 원효사상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으로 평가되는데, 더구나 법장이 중국 화엄학의 집대성자라는 점을 감안할 때 원효의 비중이 당대 불교학계에서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만하다. 중국에서의 원효의 영향은 송대에까지 계속되었다.

 

혜원은 원효를 불세출의 위인으로 찬양했는데, 즉 "몸은 東夷에 있어도 그 덕은 당나라를 덮었는데, 가이 불세출의 위인이라고 할만하다."고 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인명(因明)학자들이 원효가 사는 해동을 향해 세번 절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원효는 과연 대오대철(大悟大徹)한 분이다." 이는 연수의 찬양이다. 이처럼 원효의 명성은 중국에 떨쳤고, 그 학설은 중국의 학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의천은 거란에도 원효의 저서를 보내어 소개했는데, 도종(道宗 : 1055∼1100년)은 원효의 {기신론소}를 찬양한 바 있다.

 

(8) 일본 볼교에 끼친 원효의 영향은 8세기초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계속되고 있다. 8세기 일본에서 서사된 원효의 저서는 47종이나 되고, 심상(審詳)의 {경소록}에는 원효의 저술 32종이 보인다. 실제로 원효의 대부분 저서가 일본에 전해져 유포되었을 것이다. 원효의 저서를 읽고 그 설을 인증(引證)한 경우는 18세기에 이르기까지 40여명이나 더 확인된다.

 

원효의 손자 설중업(薛仲業)이 780년에 신라의 사신으로 일본에 갔다. 이때 원효의 {금강삼매경론}을 애독하고 있던 일본의 한 재상이 원효를 찬양하는 시를 지어 설중업에게 주었는데, 그는 당시 일본 한문학의 대가 담해진인 삼선(淡海眞人 三船 : 722∼785년)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그 시(詩)는 신라사회에 두루 유포되었고 고려 때까지도 자랑스럽게 전해지고 있었다.

 

12∼13세기경 일본에는 원효의 전기류인 {元曉和尙緣起}와 {元曉事抄}가 유통되고 있었다. 특히, {원효사초}는 장편의 전기였고, 원효보살이라는 존칭을 사용해 주목된다. 8세기 중반이후부터 일본에서는 원효를 구룡(丘龍), 혹은 구룡대사로 존칭한 예가 적지 않다. 물론 구룡은 청구의 용이라는 의미다.

 

18세기에 이르러 일본의 풍담(風潭 : 1675∼1739년)은 曉聖이라는 존칭을 쓰기도 했다. 명혜(明惠 : 1173∼1232년)는 원효와 의상을 무척 흠모했으며 46세 때에는 원효의 {보살계본지범요기}를 강의하기도 했다. 또한 그가 성인(成忍)에게 부탁하여 그린 {화엄연기(華嚴緣起)} 6권은 원효와 의상의 생애를 그 전체 내용으로 한 것으로 현재 일본의 국보이다. 또한 고산사에는 원효와 의상의 영정이 전하기도 한다.

 

이상으로 원효사상이 우리 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 거란 등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았다. 또한 이로써 원효의 불교사적 위치도 대개 짐작해 볼 수 있는데, 그는 한국불교의 기초를 닦은 독창적인 사상가이며 위대한 고승일 뿐만 아니라 일찍이 의천이 인식했듯이, 세계 불교사상에서도 제 2의 붓다로 불리는 용수에 비견될 만큼 높은 봉우리로 추앙될만 하다.

 

(9) 21세기의 문턱에 서 있는 오늘의 우리들에게 7세기에 살았던 원효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원효의 사상에는 시대와 민족과 종교의 벽을 뛰어넘는 보편성이 있다. 그의 사상은 신라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당시의 세계인 동아시아 전체에 통하는 보편사상이었다. 종교적으로도 불교에만 한정된 사상은 아니다.

 

비록 주제와 용어 등이 불교적인 것으로 되어 있기는 해도,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능히 불교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또한 그의 사상에는 오늘의 우리들이 공감할 수 있는 현실성과 참신성이 있다. 그가 파헤쳐 보여주고 있는 마음의 세계와 화쟁의 논리, 그리고 자유인의 몸짓 등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로 다가선다.

 

   普爲法界燃一燈    널리 법계를 위하여 하나의 등불 밝히노니,
   願用傳燈周十方    이 등불 전하여 시방을 두루 비추소서.

 

어둡고 긴 밤을 밝히는 하나의 등불, 원효는 스스로 그 등불이기를 염원했다. 7세기 신라에서 원효가 밝힌 등불과 인생의 불꽃은 우리 나라와 중국, 일본 등지로 퍼지며 수 많은 가슴에 불을 붙였고, 지금도 꺼지지 않고 타고 있는 무진등(無盡燈)이다.

 

Ⅱ. 元曉의 和諍思想

 

 사람들은 자주 다투고, 세상은 조용한 날이 적다. 흔히 나는 옳은데 당신을 그르다는 입씨름이 오가고, 격해지면 주먹이 나르고, 주먹이 대포로 바뀌면 전쟁이다. 누군들 평화와 화해를 원치 않으랴만, 자기 고집을 꺾기는 참으로 어렵다. 백가의 서로 다른 논쟁의 화해, 이것은 사람들의 희망이며 과제다.

 

원효가 살았던 7세기는 갈등과 전쟁의 시대였다. 한반도는 전쟁의 와중에 휩싸여 있었고, 사람들은 신분의 굴레로 해서 갈등을 빚기도 했다. 고구려에서는 불교와 도교 사이에 마찰이 있었고 7세기 후반 신라 불교계 안에서도 대립과 논쟁이 없지 않았다. 그 무렵은 화엄과 법상 간의 논쟁이 있었고, 법상학자들 안에서도 西明學派와 慈恩學派 간의 토론이 있었다. 空有의 논쟁도 불교계가 오랫동안 풀지 못한 과제였다.

 

원효는 요동에서 고구려의 순라군에게 간첩으로 오해받아 도당유학의 꿈이 무산되는 경험을 겪었고, 당나라 군영에서 보낸 군사 암호문서를 해독해서 위기에 처한 신라군을 구하기도 했으며, 불교와 도교와의 갈등으로 인해 남족으로 망명해 온 고구려의 고승 普德을 찾아 배우기도 했다. 그리고 그는 국가에서 개최하는 백고좌회에 추천을 받고도 그를 백안시하는 사람들의 참소로 끝내 참석하지 못한 적도 있으며, 강론을 위해 준비했던 소중한 원고를 도적 맞기도 했고, 송사로 인해 몸을 여러 곳에 나타내야 할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원효는 그 모든 분열과 갈등을 포용하는 화해의 길을 택했고, 화쟁의 사상과 방법을 제시했다. {十門和諍論}은 그의 화쟁사상을 펼쳐 보인 가장 대표적인 저서로 유명하다. 그는 "百家의 異諍을 화합하여 지극히 공평한 佛意를 얻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훗날 和諍國師에 추봉되는 명예를 누렸다. 서당화상비문에서도 {십문화쟁론}을 강조해서 서술했다.

 

그 중에서도 {십문화쟁론}은 여래가 세상에 계실 때에는 圓音에 의지하였으나, ……(마멸)…… 비처럼 흩뿌리고, 부질없는 空論이 구름처럼 분분하였다. 혹자는 나는 옳은데 다른 사람은 그르다고 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설은 그럴듯하나 타인의 설은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서, 큰 강물과도 같이 많은 지류를 이루었다.……(마멸)…… 산을 버리고 골짜기로 돌아간 것과 같고, 有를 싫어하고 空을 좋아함은 나무를 버리고 큰 숲으로 달려가는 것과 같다. 비유컨데, 청색과 쪽풀은 본체가 같고 얼음과 물은 근원이 같은데, 거울은 모든 형상을 받아들이고, 물이 수천 갈래로 나누어 지는 것과 같다.……(마멸)…… 융통하여 서술하고 그 이름을 {십문화쟁론}이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이를 칭찬하지, 않은 사람이 없고, 모두 좋다고 하였다.

 

모든 사람들이 다 훌륭한 논술이라고 찬양했다는 {십문화쟁론}, 이 명저도 세월의 허망한 바람에 흩어지고 지금은 겨우 3판 만이 해인사에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화쟁의 논리와 방법이다. 이 점에 착안한 연구는 朴鍾鴻에 의해 처음으로 시도되었다. 그는 화쟁의 논리라는 주제를 설정하고 開合과 宗要, 立破와 與奪, 同異와 有無, 離邊而非中, 一味와 絶言 등에 관해 논의했다. 원효의 진리 탐구방법은 開合의 논리로써 일관한다. 원효의 논리는 開合으로서 宗要를 밝히는 和諍의 논리다. 一味 平等의 입장에서 보면 모두가 되살려져 허용된다는 立破, 與奪, 許, 不許가 자유자재한 원효의 화쟁 논리다. 有도 아니고 無도 아니요, 二邊을 멀리 떠날 뿐만 아니라, 中道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화쟁의 논리다. 화쟁 논리의 진의는 絶言之法에 있다. 이상은 박종홍이 밝히고 있는 원효의 화쟁 논리다.

 

金 孝 또한 원효의 화쟁 논리에 대해 언급했다. 그에 의하면 원효 철학의 의의는 단적으로 상반된 두 세계를 妙合하는데 있음이 틀림없고, 이런 사유의 논리를 스스로 [融二而不一]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즉 원효의 화쟁정신이란 두 가지를 융합하나 하나로 획일화 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佐藤繁樹는 원효의 화쟁 논리가 [無二而不宇一]이라는 구조를 갖고 있다고 했다. 원효의 논리는 양자택일이나 변증법적인 통일의 논리와는 다르다. 원효는 [融二而不一], [離邊而非中], [妙契環中] 등의 용어를 즐겨 사용했다. 원효는 有無, 立破, 開合, 理事, 一多, 同異 등 상반된 두 개념을 대립이나 모순으로 파악하기보다 [不一而不二]의 논리로 해석한다. 그리하여 양면긍정이나 양변부정까지를 포함하는 四句의 논리로 화쟁을 시도한다. 同異에 관한 원효의 설명을 예로 들어보자.

 

不能同者 卽同而異也
不能異者 卽異而同也
同者 辨同於異
異者 明異於同
明異於同者 非分同爲異也
辨同於異者 非銷異爲同也
良由 同非銷異故 不可說是同
     異非分同故 不可說是異
但以 不可說異故 可得說是同
     不可說同故 可得說是異耳

 

원효에 의하면, 同과 異도 相望하고 相照하는 관계일 뿐 평행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異見諍論이 일어날 때면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원효는 이 경우 非同非異而說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若諸異見諍論興時
若同有見而說則異空見
若同空執而說則異有執
所同所異彌興其諍
又復兩同彼二則自內相諍
    若異彼二則與二相諍
是故非同非異而說
非同者 如言而取 皆不許故
非異者 得意而言 無不許故
由非異故 不違彼情
由非同故 不違道理
於情於理 相望不違

 

살다보면 人情과 道理의 문제로 고민할 때가 많다. 우리는 자주 合理的이라는 말로 재단하려 하지만, 인정없는 세상은 분명 삭막하다. 어떻게 상대방의 정에도 도리에도 어긋나지 않을 수 있을까. 원효는 [無理之至理 不然之大然], [妙契環中]이라고 말한다. 앞에 인용한 원효의 非同非異而說은 識機方便과 관련하여 말한 것이다.

 

원효는 어떻게 양면부정과 양면긍정의 논리를 적용하는지 그 예를 보자. 장님들이 모여서 코끼리를 만져 보고서 제 각각 코끼리를 설명하고 있다. 코끼리의 실체를 제대로 설명하는 장님은 없다. 그러나 그 어느 누구도 코끼리를 설명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곧 원효는 [如彼盲人 各各說象雖不得實 非不說象]이라고 했다. 또한 원효는 佛性에 관한 諸說을 여섯가지로 분류하여 소개한 다음, 그 諸說은 모두 옳기도 할 뿐만 아니라 모두 그르기도 하다고 말했다. 다음 설명이 그것이다.

 

諸師說 皆是皆非
所以然者 佛性非然非不然故
以非然故 諸說悉非
非不然故 諸義悉是

佛性之  正是一心
一心之性 遠離諸邊
遠離諸邊故 都無所當
無所當故 無所不當
是謂非然 非不然義 所以諸說 皆非皆是

 

  言諍에는 우선 말이 문제다. 말은 본래부터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 그러기에 손가락일랑은 보지 말고 달을 보면 그만이다. 원효는 [我寄言說 以示絶言之法 如寄手指 以示離指之月]이라고 말했다. 말꼬리를 잡는 태도는 옳지 않다. 말이 내포한 뜻을 살려서 이해하는 자세는 바람직하다. 원효는 [如言而取 所說皆非 得意而談 所說皆是]라고도 했다. 말꼬리를 잡고 보면 상대방의 어떤 견해도 허용하기 어렵다. 뜻을 살려서 듣는다면 허용하지 못할 것도 없다.

 

 원효의 화쟁방법에는 전개와 통합이 자유롭고 긍정과 부정에 구애됨이 없었다. 원효의 저술에는 '摠而言之', '別而論之' 등이 자주 보인다. 이처름 그는 통합과 전개의 방법을 잘 구사하고 있다. 이를 두고 "원효의 진리 탐구 방법은 개합의 논리로서 철두철미 일관되어 있다"고 지적한 이도 있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유기적으로 관련되어 있다. 곧 緣起다. 그래서 전체와 부분은 종합적인 고리를 이루면서 있다. 곧 화엄교학에서 말하는 摠과 別은 더불어 있고, 하나와 전체도 같이 있게 된다.

 

따라서 어떤 일에도 '산을 보지 못한 채 골짜기에서 헤메거나 나무를 버리고 숲속으로 달려가는 격'이 되어서는 안된다. 전개한다고 번거로워지는 것도 아니요, 합친다고 좁아지는 것도 아니다. 곧 '開而不繁合而不狹'이다. 또한 '開不增一 合不減十' 즉, 전개한다고 하나를 더 보태는 것도 아니고, 합친다고 해서 열을 줄이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통합과 전개의 妙術이다. '合論一觀'이요 '開說十門'이다. 통합해서 논하면 一觀이요 열어서 말한다면 열개의 문이다. 원효는 이처럼 통합과 전개에 자유로울 수 있었다. 또한 수용과 비판, 즉 긍정과 부정에도 구애받지 않았다. "긍정과 부정에 아무 구애가 없기에(立破無碍), 긍정한다고 얻을 것이 없고 논파한다고 잃을 것도 없다." 이 또한 원효의 가르침이다.

 

 우리가 무엇을 이해하거나 설명하거나 주장할 때, 자신의 입장이나 위치, 방향 등에 얽매여 있기 일쑤다. 사람들은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기 어렵다. 자신의 안경으로 보고, 자기가 가진 잣대로 재며, 자기 중심으로 인식하려 든다. 이로 인해 我執과 我相과 교만이 생겨난다. 원효는 말했다. "종래에 {起信論}을 해석한 이들이 많지만 진정으로 그 뜻을 밝힌 사람은 적다"고. 그는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각기 익힌 것을 지켜 문구에 구애되고 능히 마음을 비워서 뜻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不能虛懷而尋旨) 이 때문에 論主의 뜻에 가까이 하지 못한다. 혹 근원을 바라보고서도 헤매며 떠돌고(或望源而迷流), 혹은 잎을 붙잡고 줄기를 잃어버리며(或把葉而亡幹), 혹은 옷깃을 베어 소매를 깁고(或割領而補袖), 혹은 가지를 꺾어 뿌리에 댄다(或折枝帶根).

 

대상의 세계를 아전인수격으로 곡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無心과 無念의 상태가 필요하다. 곧 마음놓는 것이고 허심탄회해지는 것이다. "무념을 얻으면 상대방과 더불어 평등해진다". 이 또한 원효가 주목했던 {기신론}의 귀절이다. 잣대 밖의 더 큰 것을 재기위해서는 고정의 잣대를 버려야한다. 二邊을 벗어나야 方外에 노닐 수 있다. '마음을 비웠다'는 말은 쉽게 할 수 있어도 실제로 그렇게 되기란 참으로 어렵다. 편협한 생각에 얽매여 일방적으로 한 면만을 고집하거나 한 가지 입장만을 절대화하고 독단화하면, 이 경우에 문제가 생긴다. 이런 사람들은 갈대 구명으로 하늘을 보는 격이라고 원효는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彼自少聞 專其狹見 同其見者 乃爲是得 異其見者 咸謂脫失 猶如有人 葦管窺天 謂諸不窺其管內者皆是不見蒼天者矣 是謂恃小誹多遇也
 - 편협한 사고는 남의 의견에 귀 기울이지 못한다. 고정된 자기 견해에만 열광적으로 집착함으로 자기 견해와 다른 異見에 대해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異其見者 咸是脫失이라고 한것이 그것이다.

 

  세상의 이치는 하나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서로 다른 것도 아니다. 불일(不一)이기에 모든 방면에 통하고, 불이(不異)이기에 어떤 길도 서울로 통한다. 원효가 토로한

 

由非一故 能當諸門
由非異故 諸門一味

 

라는 교훈이 이 뜻이다. 인생의 길이 어찌 하나 뿐이랴 고속도로도 있고, 뱃길도 있으며, 오솔길도 있다. 어찌 어느 한 길만을 옳다고 하랴. 어느 길(諸門)도 행복의 동산에 이를 수 있다. 어떤 모습으로 살아도, 인생의 삶은 삶 그것이다.(非異). 어떤 인생의 길을 걸어도 그것은 한 맛이다(諸門一味).

 

佛道廣蕩 無碍無方 永無所처而無不當 故曰一切他義 咸是佛意 百家之說 無所不是 八萬法門 皆可入理

當知諸佛法門非一 隨其所說而無障碍而不錯亂

 

일체(一切)의 타의(他意)가 모두 불의(佛意)라고 눈 크게 뜰 때, 도교도 유교도 그에겐 이미 타의(他義)가 아니었을 것이다.

 

Ⅲ. 義湘의 生涯와 思想

 

1. 義湘과 新羅 華嚴宗

 

Ⅰ. 義湘(625∼702)의 生涯와 思想


 

(1) 求道의 길


① 金氏. 19세(642)에 皇福寺에서 출가. 1차 渡唐 유학에 실패(650년, 26세)
② 至相寺 智儼門下에서의 華嚴敎學 수업(661∼671 ; 38∼44)
   (善妙의 歸依, 智儼의 꿈)
③ 중국 華嚴宗의 第2祖 智儼은 義湘에게는 義持, 法藏에게는 文持라고 각각 號함. 義湘은 신라 화엄종의 初祖, 法藏은 중국 화엄종의 第3祖.
④ 華嚴一乘法界圖의 저술
   法界圖 : 法性偈(7言 30句 210字)와 圖印을 겹침

 

(2) 華嚴傳敎(671년 귀국)


① 觀音道場 洛山寺 창건(당시의 白花道場發願文 현존) 觀音住處信仰의 이식
② 浮石寺 창건(문무왕 16, 676) → 신라 華嚴宗 初祖
③ 新羅華嚴十刹 : 浮石寺, 毘摩羅寺, 海印寺, 玉泉寺, 梵魚寺, 華嚴寺(美理寺, 普願寺, 岬寺, 國神寺, 靑潭寺)등
·海印寺는 802년 順應에 의해 창건되고 海印三昧에서 寺名 유래
·華嚴寺는 緣起에 의해 8세기 중반에 창건·금강산의 마하연,표훈사, 천관산의 천관사, 영월 세달사와 토함산 불국사등도 화엄사찰
④ 十大弟子 : 智通, 表訓, 眞定, 良圓, 相源, 悟眞, 眞藏, 道融, 能仁, 義寂(법상종 승려), (道身)

 

(3) 신라의 정치사회에 준 영향


① (문무왕 21년) 欲築京師城郭 旣令具吏 時義湘法師聞之 致書報云 王之政敎明則
   雖草丘劃地而爲城 民不敢踰 可以潔災進福 政敎苟不明 則雖有長城 災害未消.
② 의상이 浮石寺에서 화엄을 천명함에 부르지 않아도 오는 자가 많았다. 국왕이 공경하여 田莊과 奴僕을 주려고 했다. 의상은 왕에게 말했다.
   [我法平等 高下共均 貴賤同揆 涅槃經八不淨財 何莊田之有 何奴僕之爲 貧道以法界爲家 以盂耕待稔法身慧命籍此而生矣]

 

(4) 義湘의 佛敎史的 位置


① 의상으로부터 비롯된 신라 화엄종은 그 계승자들에 의해 발전.
   (十大弟子 --- 浮石嫡孫神琳 --- 法融 --- 順應 등등)
② 表訓은 金大城에게 영향주었고, 경덕왕과도 관계했다. 8세기 중엽 神琳이 부석사에 주석할 때 1000명 대중 운집. 신림은 불국사와도 인연이 있음.
③ 후계자들에 의한 法界圖記 연구 활발. 法界圖記叢髓錄은 法融記, 大記, 眞秀記를 포함함.
④ 賢首國師 法藏의 書信과 저서를 勝詮이 전함(690년경). 그 서신은 현재 일본 天理大에 전해짐.
⑤ 華嚴緣起 6卷(일본국보). 高山寺의 明惠가 1206년경 元曉와 義湘의 眞影 봉안. 善妙의 華嚴外護神化.

 

(5) 義湘의 信仰과 思想


① 實踐的 信仰人(義持) : 法性偈, 白花道場發願文, 一乘發願文, 投師禮
② 淨土信仰 : 專求安養平生坐不背西, 浮石寺의 가람배치.
③ 普賢行願 : 一乘發願文
   ·惟願世世生生處 三種世間爲三業 化作無量供養具 充滿十方
     諸世界
   ·諸惡一斷一切斷 諸善一成一切成
④ 人間의 平等, 尊嚴 …… 性起思想
   * 吾體佛, 吾身佛 …… 吾五尺凡身卽是法身自體
⑤ 歸家 …… 行者還本際, 나그네 고향집, 海印三昧
⑥ 緣起<不守自性隨緣成>
   一中一切多卽一   一卽一切多卽一
   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 華嚴六相     總相 ==== 同相 ==== 成相
                ∥         ∥        ∥
               別相 ==== 異相 ==== 壤相

 

Ⅱ. 新羅의 華嚴信仰과 그 特徵


(1) 華嚴經信仰 : 受持, 독송, 강경, 사경, 유포에 의한 공덕 화엄사의 華嚴石經, 755년에 조성된 華嚴寫經.
(2) 菩薩住處信仰(화엄경 보살주처품에 토대)
   오대산에는 문수보살이, 금강산에는 법기보살이, 천관산에는  천관보살이, 낙산사에는 관음보살이 각각 常住說法한다.
(3) 華嚴神衆 信仰 및 華嚴祖師 崇拜
(4) 石佛寺 및 佛國寺 화엄불국세계에 대한 상징적 표출
(5) 사복설화는 生死卽涅槃이라는 주제를 상징적으로 보여 줌.

 

Ⅲ. 新羅華嚴思想의 政治·社會的 意義


(1) 화엄사상은 귀족 지배층에 환영받았다는 견해(의상의 화엄사상이 지배층 중심의 總和思想이고, 출신이 귀족이었다.)
(2) 의상은 불법의 평등 및 吾體佛 강조. 그의 문하에는 智通처럼 천민신분 출신도 있었다.
(3) 화엄사상은 신라사회에 두루 유포됨. 여러 설화, 보살주처신앙, 보원십원가 등
(4) 인생과 세계에 대한 철학적 가치를 가져다 줌.
(5) 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을 우주의 다양한 현상이 결은 하나되는 의미로 파악하면 문제다.
(6) 전제왕권을 뒷받침해 준 화엄종의 십찰이 전제왕권의 상징이기도 한 5岳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는 견해는 수긍키 어렵다.
   
2. 의상(義湘)의 제자 교육

 

(1) 의상, 그 전등의 묘업
해동화엄의 초조(初祖), 부처님의 後身 등으로 추앙되어 왔고, 또한 聖人으로 존경되기도 했던 의상법사. 그가 이처럼 존경받을 수 있었던 중요한 이유는 이 땅에 화엄대교(華嚴大敎)를 전함으로써, 그 밝은 진리의 빛을 신라 사회에 두루 비춰주었던 은혜 때문이다. 최치원이 '전등(傳燈)의 묘업(妙業)'이라고 했던 것도, 일연이 {삼국유사}에서 '의상전교(義湘傳敎)'라는 제목을 설정하고 "화엄을 캐어와 고국에 심었으니, 종남산과 태백산이 같은 봄이네"라고 찬양했던 뜻도 여기에 있을 것이다.

 

신라로 돌아온 법사는 화엄대교를 전할 복된 터전을 찾아 산천을 두루 편력, 676년(문무왕 16)에는 부석사를 창건했다. 이로부터 태백산을 중심으로 전개한 법사의 전교 활동은, 신라 뿐만 아니라, 당나라에까지도 소문이 퍼질 정도로, 그리고 훗날 일본에도 영향을 준, 실로 눈부신 것이었다. 법사가 화엄대교를 전파하고 있을 때, 그를 공경한 국왕이 노비와 토지를 주겠다고 제의했던 일과 진정(眞定)이라는 가난한 백성이 법사가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의 문하로 달려가 머리를 깎았던 등으로 미루어, 법사가 태백산에서 밝힌 법등(法燈)이 신라 사회를 두루 비추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법사가 신라에서 화엄을 전하기 20여 년이 되던 어느 해에 동문 법장(法藏)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듣자오니 상인(上人)께서는 귀향하신 후, 화엄을 천명하고 법계의 무진연기(無盡緣起)를 거듭 선양하여, 새롭고 새로운 불국(佛國)에 널리 이익케 하신다고 하오니 기쁨은 더욱 큽니다. 이로써 여래(如來) 멸후(滅後)에 불일(佛日)이 휘황하게 빛나고 법륜(法輪)이 다시 굴러 불법이 오래 머물도록 한 이는 오직 법사임을 알았습니다." 이처럼 존경의 마음을 가득 담아 보낸 편지였다. 이 법장의 편지 또한 법사의 전교활동이 어떠 했던가를 잘 알게 해 준다. 법사는 태백산에 밝힌 화엄교의 등불이 신라에 두루 비칠 것을 염원했고, 그 법등이 오래오래 전해지도록 노력했다. 그 노력은 교단의 조직과 확대, 제자 교육 등으로 전개되었다. 그 결과 태백산에서 밝힌 그 하나의 등불이 열로 백으로 불어나고 세월의 바람에도 꺼지지 않고 타는 장명등(長明燈)이 되었다.

 

(2) 그 등불 다시 열이 되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도는 참으로 큰 인연이다. 진리가 이로 인해 더욱 빛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도를 구하고자 하는 이는 있어도 참다운 선지식을 만나기 어렵고, 훌륭한 스승이 있어도 발심한 사람을 찾기 어려운 법. 그러나 의상법사는 그 이름만을 훔친 스승이 아니었고, 그 제자들 또한 배움만을 취하고 그 은혜를 저버리지 않았기에, 화엄대교는 더욱 빛날 수 있었다.

 

법사는 황복사에서, 부석사에서, 그리고 소백산의 추동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모아 화엄을 강의했다. 어떤 때는 그의 저서 {법계도(法界圖)}를, 또 어떤 때는 {화엄경}을 강의헸고, 그리고 법장의 {탐현기(探玄記)} 20권을 풀이하기도 했다. 40일을 기약하기도 하고, 장장 90일 동안 강의에 전념하기도 했다.

 

그의 가르침은 방황하는 나그네가 옛 고향집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염원을 담고 있었고, 이름에만 집착하는 이들로 하여금, 이름마저도 없는 참된 진리의 근원으로 되돌아가게 하려는 깊은 뜻을 간직하고 있었으며, 우리들의 몸, 이것이 곧 법신(法身) 그것임을 깨우치려 했던 것이다. 제자들이 도움을 청해 물어 올 때면, 법사는 급히 서두르지 않았다. 그들의 마음이 조용히 가라앉을 떄를 기다려 살핀 다음 의문나는 점을 술술 풀어 조금도 의문의 여지를 남기지 않게 계발해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법사는 제자들에게 항상 훈계했다. 긴 말이 필요하지 않다. 마땅히 마음을 잘 쓰도록 하라. 그리고 언제나 깊이 생각하도록 하라고. 법사의 제자 교육에 임하는 참으로 진지하고 자상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법사는 법장의 {탐현기} 20권을 진정(眞定), 상원(相元), 양원(亮元), 표훈(表訓) 등의 제자에게 각각 5권씩 나누어 강의하게 한 적이 있다. 그는 이에 앞서 10일 동안 문을 닫아 걸고 탐구·검토하는 성의를 다 했었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탁본으로 인하여 탁이 나오는 것이요, 도끼자루를 가져야 도끼자루를 베는 것이니, 각기 힘써 자기를 속이지 말라"고. '힘써 자기를 속이지 말 것'을 당부하던 법사의 모습에서 진정한 스승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법사가 제자 교육에 쏟은 정성 못지 않게 그 제자들 또한 열심이었다. 그들은 스승에게 끊임없이 물었고, 배운 바를 부지런히 기록했으며, 또한 실천에 옮겼다. {지통기(智通記)}와 {도신장(道身章)} 등은 제자 지통과 도신이 각각 법사의 강의를 노트한 것이었다. {지통기}는 소백산 추동에서 3천명 제자들이 운집한 중에 구십 일 동안 게속된 {화엄경} 강의를 기록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스승의 말씀만을 기록하는 정도에 머물러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법사로부터 {법계도}를 배울 때, 표훈과 진정은 각각 자기의 견해를 적어 스승으로부터 옳다는 평가를 받은 적이 있다.

 

지통은 태백산의 미리암굴(彌理岩窟)에서 화엄관(華嚴觀)을 닦아, 삼세(三世)가 일제(一際)라는 법문을 깨닫고, 스승을 찾아 이를 말씀드려, 이미 그릇이 완성되었음을 인정받아 법계도인(法界圖印)을 전해받기도 했다. 이와 같은 전통은 훗날에도 계승되어 법사의 몇대 제자들에 이르기까지 법사의 {법계도}를 연구하여, {법융기(法融記)}, {진수기(眞秀記)}, {원통기(圓通記)} 등이 이루어졌고, 마침내 {법계도기총수록(法界圖記叢髓錄)}으로 집대성되기도 했었다.

 

법사가 제자를 대하는 태도가 언제나 부드러운 것만은 아니었다. 단호하고 엄격한 일면을 보여주기도 했으니, 다음의 이야기가 이를 알려준다.문도 중에 한 법죄 비구가 있어, 법에 의해 그를 내쫓으니 대중을 떠나 타방에서 유행했다. 그는 스승을 앙모하여 상(像)을 만들어 지고 다녔다. 법사가 그 소식을 듣고 불러 말했다. 네가 만약 진실로 나를 억념하였다면, 나는 일생 동안 서쪽을 등지지 않고 앉았으니, 상도 역시 감응할 것이다.

 

이에 상을 서쪽을 등지게 했지만, 앉혀 놓은 상이 스스로 몸을 돌려 서쪽을 향해 앉았다. 법사가 이에 그를 좋게 여겨 죄를 용서하고 다시 거두어 들였다. 이것은 {釋迦如來行蹟頌}에 전하는 이야기다. 당시 화엄교단의 엄격한 규율과, 제자들의 법사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이야기다.

 

(3) 십대제자가 전한 법등


법사에게는 수많은 제자가 있었지만, 특히 십대제자가 유명했다. 곧, {삼국유사}에 열거된 오진(悟眞), 지통(智通), 표훈(表訓), 진정(眞定), 진장(眞藏), 도융(道融), 양원(良圓), 상원(相元), 능인(能仁), 의적(義寂) 등이다. 이들 십대제자들은 십성제자(十聖弟子)로 불리기도 했듯이, 모두 성인으로까지 존경받았던 뛰어난 인물들이다.

 

이들 중에서도 진정, 상원, 양원, 표훈 등은 더욱 뛰어났던 이들이다. 이들을 두고 특별히 사영(四英)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또한 {송고승전(宋高僧傳)}에서는 지통, 표훈, 도신(道身) 등을 큰 알 속에서 껍질을 깨고 날아간 가루라(迦留羅), 즉 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새들이라고 했다. 도신이 {삼국유사} 중의 십대제자에서는 빠져 있지만, 그가 의상의 직제자임은 의상으로부터 수업하고 그 내용을 기록한 {도신장(道身章)}을 남긴 것으로도 알 수 있다.

 

표훈은 스승과 나란히 흥륜사 금당(金堂)에 모셔졌던 십성(十聖) 중의 한 사람으로 추앙받던 인물이다. 그가 황복사에 있을 때 대정각간(大正角干)에게 화엄학을 가르쳤던 것은 주목된다. 대정은 곧 김대성(金大城)과 동일인물이고, 따라서 불국사와 석굴암의 창건에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진정은 출가 전에는 가난하여 장가도 들지 못한 채 군대 복역의 여가에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할 정도로 효심이 지극했다.

 

의상법사가 태백산에서 불법을 가르쳐 여러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는 소문을 들은 그는 태백산의 의상 문하에 귀의하여, 의상의 많은 제자 중에서도 뛰어났던 인물이다. 지통은 그 출신이 노예다. 7세에 낭지(朗智)에게 출가했다가 훗날 의상의 문하로 옮겼다. 법사로부터 화엄학을 열심히 수업했고, 그 결과 스승으로부터 법계도인을 받았던 대표적 제자 중의 한 사람이다. 그가 남긴 {추동기}에 대해서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다.

 

의적은 법사의 십대제자로 되어 있지만, 법상종에서 의상의 문하로 옮겨왔거니와, 아니면 법상종에 속한 인물로 법사의 제자가 아니었을 것이다. 상원, 오진, 양원 등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거의 없고, 다만 {법계도기총수록}에 이들의 학설이 몇 군데 인용되어 전할 뿐이다. 그리고 진장, 도융, 능인 등은 그 이름만 보일 뿐, 그 활동이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의상법사가 702년에 돌아가신 후, 대개 8세기 전반까지는 법사의 직제자들에 의해 화엄교학이 계승·전파되었다. 그런데 8세기 중엽 쯤에는 손제자 신림(神琳)이 부석사의 화엄학풍을 진작시켰다. 그는 곧 부석적손(浮石嫡孫)으로, 부석사에 운집한 천여 명의 대중을 상대로 화엄학을 강의했다. 8세기 중엽 당시 부석사의 융성이 어떠 했던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그는 또한 불국사, 월유사(月瑜寺), 세달사(世達寺) 등에 주석하기도 했다. 그가 불국사의 법회를 주관한 적이 있음은 표훈과 더불어 김대성의 불국사 및 석굴암 창건에 영향을 주었을 것임을 알게 해 준다. 세달사는 고려 때에 흥교사(興敎寺)로 바뀌었는데, 이 절에 신림의 진영(眞影)이 모셔져 있었다. 신림은 많은 제자를 배출함으로써 신라 화엄교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그의 제자에는 법융(法融), 숭업(崇業), 질응(質應), 순응(順應) 등이 있었다.

 

법융은 {법계도}에 대한 주석서인 {법융기(法融記)}와 지엄(智儼)의 십구(十句)에 대한 주석서인 {십구장(十句章)}을 저술하여 훗날 화엄교학에 영향을 미쳤다. 또한 법융의 제자에는 범체(梵體)가 있었는데, 9세기 중엽 쯤에 부석사에 주석했다. 신림에게 수업한 순응은 766년에 중국으로 건너가, 선교(禪敎)를 두루 공부했다. 돌아와서는 가야산에 해인사(海印寺)를 창건했는데, 802년(애장왕 3)이었다. 그 후 해인사의 화엄학풍은 현준(現俊), 결언(決言), 희랑(希朗) 등에게 계승되면서 더욱 발전해 갔다.

 

법사의 십대제자가 각기 나누어 전한 화엄의 법등은 그 숫자가 크게 불어났고, 몇 대를 거치면서도 꺼질 줄 모르는 것이었다. 이처럼 교단적인 조직과 제자 교육을 통한 법사의 전교 활동을 원효(元曉)의 경우와 비교해 봐도 더욱 두드러진 특징이다. "의상의 강수(講樹)가 꽃을 피우고, 담총(談叢)이 열매를 맺었다"고 한 {송고승전}의 표현은, 곧 그의 이같은 전교와 교육이 제자들에 의해 계승되었던 것을 지적한 것이다.

 

(4) 십산(十山)을 두루 밝히다.


의상법사의 십대제자들은 물론 또 그 제자들의 제자들에 의해 화엄교학과 화엄신앙은 신라 사회에 두루 전파되었다. 그리하여 신라 하대(下代)에는 전국의 여러 곳에 화엄종 사찰이 건립되었는데 화엄십찰(華嚴十刹)이 이를 말해 준다. 최치원(崔致遠)은 신라에 화엄대학(華嚴大學)이 십산(十山)에 있다고 하면서, 화엄교학의 폭넓은 유포를 강조했다.

 

즉, 팔공산의 미리사(美理寺), 지리산의 화엄사, 태백산의 부석사, 가야산의 해인사와 보광사(普光寺), 공주의 보원사(普願寺), 계룡산의 갑사, 금정산의 범어사, 비슬산의 옥천사(玉泉寺), 모악산(母岳山)의 국신사(國神寺), 부아산(負兒山)의 청담사(靑潭寺) 등의 십여 곳이 화엄대학이 있던 곳이라고 했다. 또한 {삼국유사}에는, "의상은 十刹에서 전교케 했는데, 태백산 부석사, 원주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南岳의 화엄사 등이 그것"이라고 했다.

 

최치원은 화엄대학이 있던 열 개의 산을 중심으로 기록했고, 일연은 화엄종 사찰이 있던 열 개의 절을 기준으로 하여 기록했던 것이다. 그래서 최치원의 기록에는 가야산에는 두 개의 사찰이 있어 모두 십산(十山)에 11개의 절이 나열되고, {삼국유사}에는 산이 아닌 곳에 위치한 비마라사가 기록된 것도 이같은 기준의 차이로 인한 것이었다. 최치원이 밝힌 11개의 절과 {삼국유사} 중의 비마라사를 합치면, 모두 12개의 사찰이 된다.

 

이와 같은 사실은 '화엄십찰' 혹은 '해동 화엄대학이 십산에 있다'는 등의 표현이 정확히 열 개의 산이나 절을 의미한다기보다는 화엄교학의 전국적인 전파나 화엄사찰의 전국적인 분포 등을 화엄적으로 표현한 듯 하다. 화엄교학에서의 십은 흔히 한량없이 많은 것을 뜻할 때가 많기 때문이다. 신라에는 화엄대학이 십산에 있었다는 지적이나 화엄종 사찰이 열 개였다는 등의 표현은 의상의 교화가 온 나라에 미치고 화엄교학이 두루 전파되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화엄십찰은 신라 하대에 성립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해인사가 창건된 802년으로부터 최치원이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쓰던 904년에 이르는 9세기에 성립된 것이다.

 

의상법사가 창건한 부석사는 명실공히 신라 화엄종의 중심 도량이었고, 8세기 중엽 쯤에는 천여 명의 대중이 운집한 대가람으로 발전했다. 8세기 중엽 연기(緣起)에 의해 창건된 지리산의 화엄사는 {화엄경} 전체를 돌에 새긴 석경(石經)으로 장엄할 정도로 웅장한 절이었다. 계룡산의 갑사가 어느 정도의 절이었던가는 남아오고 있는 거대한 철당간으로 대개 짐작된다. 의상의 4대 제자격인 순응(順應)에 의해 9세기 초에 창건된 해인사는 신라 하대의 중요한 화엄종 사찰이었다. 신라 화엄십찰 중의 부석사, 화엄사, 해인사, 범어사, 갑사 등은 오늘날까지도 그 전통과 사세(寺勢)를 자랑하는 절들인데, 우연한 일만은 아니다.

 

화엄십찰 이외에도 신라시대의 화엄종 사찰로 생각되는 절은 상당히 많았다. 의상법사가 창건하거나 주석했던 곳으로는 경주의 황복사(皇福寺), 천축산 불영사(佛影寺), 양주의 낙산사 등이 있었다. 그리고 법사의 제자들이 창건했거나 머물렀던 불국사, 세달사, 월유사, 표훈사, 법수사 등도 화엄종과 관련이 있던 사찰이었다. 황복사는 법사가 머리를 깎았던 절일 뿐만 아니라, 제자들에게 {법계도}를 강의하던 곳이며, 훗날 제자 표훈이 주석하기도 했던 절이다.

 

불영사와 낙산사는 의상이 창건한 절이다. 세달사는 8세기 중엽의 대표적인 화엄학승 신림이 그의 제자 질응(質應) 등과 더불어 화엄학을 강의하던 곳이다. 월유사 또한 신림이 화엄법회를 주관하던 곳이다. 특히 화엄종장 표훈과 신림으로부터 화엄학을 수업한 김대성이 화엄적인 세계, 즉 화엄불국을 표상화하려는 뜻으로 이룩한 불국사와 석굴암은 오늘날까지도 세계적인 자랑이 되고 있다.

 

산에 처음으로 사찰을 창건하는 것을 흔히 개산(開山)이라고 한다. 절이 세워지기 전에도 산이야 그 가슴을 열고 있었지만, 특히 절이 세워진 후에야 산이 열렸다고 하는 것은 어두운 산에 진리의 등불을 밝히기 때문이리라. 오늘날과 같은 학교가 없던 시절의 사원은 수 많은 사람들을 교육하는 곳이기도 했다. 전국의 십산(十山)에 화엄대학이 있어 환한 등불을 밝히고 있던 시절의 신라 사회는 어둡지 않았으리라.

 

중생의 어리석음은 보살이 밝히는 지혜의 등불로 밝혀진다. 그리고 세상의 밤은 전등(傳燈)으로 지켜진다. 스승과 제자가 교법을 전하여 진리가 세상에 머문다. 이 풍진 세상 파도에 휘말린 사람들, 어두운 밤 험한 길에 지친 사람들, 이같은 나그네들을 위해 장명등을 밝힌다. 어둡고 험한 길목을 지키며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등불이다. 장명등이 밤새도록 꺼지지 않는 것은 크나큰 원(願)을 심지 삼고, 대비(大悲)로 기름을 삼았기 때문이다.

 

의상법사가 태백산 부석사에 밝힌 화엄의 법등, 그 등불은 십대 제자들이 전했고, 제자에서 제자로 다시 전해져 신라 전역을 밝혔다. 10세기 전반 신라 화엄종단에는 한 차례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위기가 있었다. 화엄종 내의 남악(南岳)과 북악(北岳)과의 대립·갈등이 그것이다. 이 갈등도 고려 초 균여(均如)에 의해 다시 수습되었다. 한국불교사상사 위에서 차지하는 화엄사상의 비중은 너무고 크지만 그 연원은 의상법사의 전교활동에 있는 것이다.

 

Ⅳ. 元曉의 倫理思想

 

원효의 학문은 책상에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소를 타고서 저술하기도 하고, 대중의 삶의 현장에 뛰어 들기도 했던 그의 학문에는 풍부한 체험이 스며 있다. 따라서 그의 학문은 공허하지 않았다. 이제 현실적인 삶의 의미를 원효의 가르침에 의지해서 되새겨 보기로 한다.

 

어느날 원효와 혜공은 항사사 냇가에서 고기를 잡아 먹고 변을 봤다. 혜공이 말했다. '여시오어'(汝屎吾魚). 너는 똥을 싸고 나는 고기를 누었다는 뜻인 듯, 어떻게 죽은 고기를 다시 살릴 수 있을까? 한바탕 삶에도 괴로움의 늪이 있고 기쁨의 언덕이 있다.

 

然夫 衆生心性 融通無碍 泰若虛空 湛猶巨海
若虛空故 其體平等 無別相而可得 何有淨穢之處
猶巨海故 其性潤滑 能隨緣而不逆 豈無動靜之時
爾乃 或因塵風 淪五濁而隨轉 沈苦浪而長流
     或承善根 截四流而不還 至彼岸而永寂
若斯動寂 皆是大夢 以覺言之 無此無彼
穢土淨國本來一心 生死涅槃終無二際
然 歸源大覺 積功乃得
   隋流長夢 不可頓開             《無量壽經宗要》序

 

바다와도 같은 중생의 심성(心性)은 언제나 일렁이고 있다. 그러기에 일정한 성격을 지킬 수 없다. 진풍(塵風)은 염업(染業), 선근(善根)은 정연(淨緣)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장몽(長夢)에서 깨어나기란 어렵다.진실은 가까운 삶의 현장에서 찾아야 한다. 그러기에 《열반종요》서문 중의 다음 구절은 주목된다.

 

其道 至近至遠
由至遠故 隨敎逝之 綿歷千劫而不臻
由至近故 忘言尋之 不過一念而自會也

 

《금강삼매경론》에는 승조(僧肇·383∼414)의 게송을 인용하기도 했었다. '도원호재 촉사이진 성원호재 체지즉신'(道遠乎哉 觸事而眞 聖遠乎哉 體之卽神)이 그것이다. 도리는 세수하다가 코 만지듯, 바로 우리들 손 끝에 있는 것. 흔히 오염된 국토와 깨끗한 나라를 구별하고 차안(此岸)고 피안(彼岸)을 구별하지만, '이미 도달해야 할 피안(彼岸)이 없거니 어찌 떠나야 할 차안(此岸)이 있겠느냐'(旣無彼岸可到何有此岸可離)는 원효의 교훈에 귀 기우릴 필요가 있다.

 

大海無津 汎舟楫而能渡
虛空無梯 翩羽翼而高翔

無非門故 事事皆爲入玄之門
無不道故 處處咸是歸源之路

備架福智兩  能渡乎佛法大海
雙運止觀二翼 高翔乎法性虛空          《本業經疏》序

 

특정한 문만이 문일 수 없고, 어떤 길만이 고향으로 갈 수 있는 길은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들 인생의 어떤 일도 모두 다 현묘(玄妙)한 데로 이를 수 있는 문이 되며, 사람들이 서 있는 어떤 위치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탄탄대로다. 다시 말하면, 세속적이고 현실적이며 일상적인 삶을 통해서도 진실에 이를 수 있고, 낙원으로 돌아갈 수 있다.

 

다만 문제는 누가 발걸음을 고향으로 돌려 걷느냐 하는 것이다. 대승의 진리만이 보배는 아니다. 원효에 의하면 大·小乘法이 모두 보배로운 것이다. 큰 것이 거추장스러울 때도 있고 작은 것이 요긴할 적도 있다. 옷을 깁기에는 작은 바늘이, 돗자리를 꿰멜 때는 돗바늘이 더 좋다. 작은 새의 행복은 산기슭에 있고, 피래미의 보금자리는 여울물인 것을. 이는 원효의 다음 말씀에 의한 것이다.

 

縫衣之時 短針爲要 雖有長戟而無所用
避雨之日 小盖是用 普天雖覆而無所救
是故不可以小爲經 隨其根性 大小皆珍者也        
                                 《彌勒上生經宗要》

短 之鳥 庇山林而養形
微○之魚 潛涓流而安性
所以淺近敎門 亦不可已之耳            《華嚴經疏序》

 

어떤 약도 만병통치약은 없다. 교설도 마찬가지다. 원효는 말했다. '부정관(不淨觀)은 욕심의 병에 대해서는 좋은 치료법이 되지만 분노의 병에는 좋은 것이 아닌 것처럼, 자심(慈心)은 분노에는 좋지만 욕심에는 좋지 않은 것이다.' 짝사랑의 열병을 앓던 엄장(嚴莊)이 찾아왔을 때, 원효는 그를 부정관(不淨觀)으로 치료했었다.

 

원효의 윤리사상은 그의 《보살계본지범요기(菩薩戒本持犯要記)》중에 잘 함축되어 있다. 이제 그 내용을 간략히 요약해 본다.

어떻게 탁류를 거슬러 원천으로 돌아가는 나룻배를 탈 수 있고, 삿된 짓을 버리고 정당해 질 수 있을까 ? 사(邪)와 정(正), 죄(罪)와 복(福)을 가름하기란 어렵다. 내심(內心)은 삿된데 겉모습은 바른 듯 보이는 경우가 있고, 드러난 짓은 물든 것 같지만 속마음은 깨끗한 경우도 있다. 어떤 행위는 적은 복〔小福〕에는 맞아도 오히려 큰 우환〔大患〕을 초래하는 수 있고, 생각과 행동이 깊고 원대한 듯 하면서도 천박하고 근시안적인 것에도 어긋나는 경우도 있다.

 

자찬훼타계(自讚毁他戒)를 예로 살펴보자. 상대방의 신심을 일으키기 위한 경우는 복이지 범한 것이 아니다. 방일(放逸)과 무기심(無記心)으로 인한 경우는 범(犯)이되 물든 것은 아니다. 타인에 대한 애증으로 인한 경우는 물들었지만 중죄(重罪)는 아니다. 이양(利養)과 공경(恭敬)을 탐함으로 인한 경우는 중죄로 가볍다고 할 수 없다. 다시 이양, 공경을 탐해서 자찬훼타하는 경우를 더욱 자세히 살펴보자. 가끔 참회하면 하품(下品)이고, 참회하지는 않되 이를 덕으로 여기지는 않으면 중품(中品)이며, 참회할 줄 모를 뿐 아니라 이를 즐기며 공덕으로 보는 경우는 상품(上品)이다. 또 개인을 헐뜯는 경우는 하품(下品), 한 무리를 상대할 경우는 중품(中品)이며, 다중(多衆)일 경우 상품(上品)이다.

 

많은 대중을 상대로 자찬훼타하는 경우는 그 죄(罪)가 하나가 아닌데, 여기에 해당하는 무리는 벌레들이다. 첫째, 심학(心學)에 의한 벌레로 탐욕으로 인한 경우와 교만으로 인한 경우가 있다. 둘째, 계학(戒學)과 관련된 벌레로 사계(邪戒)를 지키는 경우와 정계(正戒)를 지키는 경우가 있다. 사계(邪戒)를 지키는 경우, '내이상진 외이난인'(內以傷眞 外以亂人)해서, 그 상난(傷亂)의 죄가 이보다 더 심한 경우가 없다. 정계(正戒)에 머물면서 교만한 자는 소선(小善)에는 완전하지만 대금(大禁)을 범한 경우로 전복위화(轉福爲禍)가 된다.

 

古之大賢 誡其子云 愼莫爲善 其子對曰 當爲惡乎 親言 善尙莫爲 況爲惡乎

 

셋째, 혜학(慧學)을 빙자해 자찬훼타하는 벌레에는 증익(增益)으로 인한 경우와 손감(損減)에 연유한 경우가 있다. 그 성품이 졸렬하고 비좁아 학문을 넓게 하지 않고 심오한 경론(經論)의 일부만을 치우치게 익혀 그 은밀한 뜻을 알지 못한 채 여언취의(如言取義)하는 자가 손감인(損減人)이다. '집의 개가 토끼를 쫓다가 바라보고 거기에 미치지 못하고서 오히려 자기가 앞섰다고 하면서 멈추고 뒤돌아 본다.'〔家狗逐兎 望不能及 便謂己超 止而顧見〕손감인도 이 꼴이다. 이 사람은 낮은 것을 높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음이 있다. 이 사람은 가장 심오한 약을 복용하고 도리어 중병에 걸린 격이다. 중병의 양상은 무병(無病)과 매우 흡사하다. 이 때문에 이 병을 고칠 의술이 없으며, 이 병을 자작하는 이 극히 적다.

 

'유인위관규천 위제불규기관내자 개시불견창천자'(有人葦管窺天 謂諸不窺其管內者 皆是不見蒼天者) 이를 일러 적은 식견으로 많은 것을 비방하는 어리석음이라고 한다. '각자미자 비대미이 지자암자 비극암이'(覺自迷者 非大迷矣 知自闇者 非極闇矣)다.

 

찬훼(讚毁)의 계에 대해서도 그 이해의 깊고 얕음은 다르다. 하사(下士)는 이를 듣고 말과 같이 이해한다. 그래서 자훼찬타(自毁讚他)는 반드시 복업(福業)이 되고, 자찬훼타(自讚毁他)는 반드시 범죄라고 한쪽으로만 말귀를 따라 이해한다. 장차 복을 닦으려 하지만 복행(福行)은 적고 죄업은 많아, 죄를 버리고자 하지만 죄 하나를 제거하면서 복 세 가지를 제거한다. 이를 천박한 식견의 지범(持犯)의 과오라고 한다. 상사(上士)는 이를 듣고 의취(意趣)를 탐구해, 한 모서리를 들면 나머지 세 모서리를 다 이해한다. 한 문장에 대해 매양 사구(四句)로 판단한다. 즉,

 

① 자훼찬타(自毁讚他)가 복(福)이 되고 자찬훼타(自讚毁他)가 죄(罪)되는 경우
② 자훼찬타(自毁讚他)가 죄(罪)가 되고 자찬훼타(自讚毁他)가 복(福)이 되는 경우
③ 자훼찬타(自毁讚他)나 자찬훼타(自讚毁他)가 죄(罪) 혹은 복(福)이 되는 경우
④ 자훼찬타(自毁讚他)도 아니고 자찬훼타(自讚毁他)도 아닌 것이 복(福) 또는 죄(罪)가 되는 수도 있다.

 

   '부주계상고(不住戒相故) 구계도(具戒度).' 이는 원효의 명언이다. 모든 죄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뭇 인연과 어울려 이름 빌려 업이라고 한다. …… 방일하여 부끄러워 하지도 않고 業의 실상 생각할 수 없는 이는, 비록 罪性이 없더라도 장차 지옥에 빠질 것이다. 마치 마법의 호랑이가 마법사를 삼키듯이. 이러기에 모든 부처님께 깊이 참괴하는 마음내어 참회하라.' 이 또한《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중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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