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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輪廻)와 업(業)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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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회(輪廻)와 업(業)

 

 

1. 윤회samsara

 

‘윤회(輪廻)’라는 말은 samsara를 번역한 것이다. 이것은 ‘sam'과 ‘sara’라는 두 단어로 이루어져 있다. ‘sam’은 ‘함께’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ra'는 ‘달리다. 빠르게 움직이다. 건너다’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SR'에서 유래한 말이다. 따라서 samsara를 글자 그대로 번역하면 ‘함께 달리는 것’, ‘함께 건너는 것’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중국의 번역가들은 이 것을 윤회, 즉 ‘도는 것’이라고 번역했다.


경전에서는 윤회를 중생들이 여러 세계를 수레바퀴가 돌아가듯 그렇게 돌고 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한 존재가 죽으면 이 세상이나 다른 세상에 태어나게 되고, 그곳에서 살다가 죽으면 다시 그곳이나 다른 세상에 태어난다. 죽는다는 것은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태어난다는 것은 죽는 다는 것을 의미한다. 존재는 여러 가지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삶과 죽음이 끝없이 되풀이 된다. 그래서 이것을 “도는 것”, 즉 윤회라고 한 것이다.


윤회의 원리는 간단하다.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에 짓는 모든 업(業=행위行爲)은 틀림없이 결과를 낳게 되고, 그 결과가 다음 생(生)을 존재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업의 결과가 남아있는 동안에는 윤회는 계속된다. 그러나 업의 결과가 모두 소비되어서 없어지면 윤회는 끝나게 된다. 이것이 해탈, 또는 열반이다.


윤회는 욕계(欲界), 색계(色界), 무색계(無色界)등 3계(3개의 세계), 또는 지옥도(地獄道), 아귀도(餓鬼道) , 축생도(畜生道), 아수라(阿修羅), 인간도(人間道), 천상도(天上道)등 6도(6개의 세계)를 통해 전개된다. 3계와 6도는 다른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동일한 세계다. 단지 그것을 구분하는 방법의 차이 때문에 다르게 설명되고 있을 뿐이다.


욕계란 욕망의 생활을 하는 존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그리고 저급한 신들이 사는 세계다. 색계는 욕망을 떠났으나 아직 육체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이곳에 있는 존재들은 ‘천상의 존재’, 또는 ‘신(神)’이라 불린다. 그러나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유일하고 절대적인 존재로서의 신은 아니다.

 

천상에서 살 수 있는 선업의 결과가 다하면 다시 다른 세계로 윤회 전생하는 존재들이다. 이들의 육체는 미묘한 물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육안으로는 볼 수 없다. 무색계는 욕망은 말할 것도 없지만 육체조차도 없는 존재들이 사는 세계다. 이들은 순전히 정신적인 존재들이다.


지옥, 아귀, 축생 등 3도는 나쁜 세계이므로 악도惡道라 한다. 지옥은 주로 땅 밑에 위치하고 있다. 이곳에 사는 중생들은 업이 다 할 때 까지 긴 세월동안 극심한 고통을 받는다. 아귀도에 사는 중생들은 목구멍이 바늘처럼 가는 반면, 배는 대단히 큰 존재들로서 항상 배고픔과 목마름 때문에 끝없이 고통을 받는다. 축생도는 모든 종류의 벌레들, 물고기, 새, 짐승들이 사는 곳이다. 아수라도는 항상 신들(제천諸天)을 상대로 싸움을 하는 존재들이 사는 곳이다.


인간과 천상의 2도(道)는 선업을 지은 존재들이 사는 좋은 세계로 선도(善道)라 한다. 6도 가운데서 인간도는 중간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인간으로 태어나는 것은 큰 특혜다. 인간도에는 고苦도 있지만 그러나 이 곳에서만이 수도를 할 수 있고 열반을 성취할 수 있다. 윤회의 원인이 되는 업(業)도 인간도에서만 짓게 된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만 윤리적인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다른 5도에서는 업을 소비할 뿐이다.


‘윤회’라는 말은 끊임없이 돌고 도는 순환의 의미를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윤회하는 존재는 6개의 세계(육도六道)를 순서에 따라 차례대로 죽고 태어나면서 순환하는 것은 아니다. 인간도에서 목숨을 마치고 다시 인간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지옥이나 축생도에 떨어 질 수도 있다. 역시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도에나 지옥도에 태어날 수도 있다.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다. 그래서 경전에서는 ‘시작이 없다’(무시無始)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그 끝은 알 수 있다. 붓다처럼 법을 깨쳐 더 이상 업을 짓지 않게 되고 , 이미 지은 업이 모두 소멸되면 윤회의 바퀴는 멈추게 되는 것이다.

 

2. 업(業 karman)

 

업(業)이라는 말은 karman을 번역한 것이다. karman은 ‘완수하다, 만들다, 하다’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KR’가 그 어원으로, ‘활동’ ‘일’ ‘행위’등으로 번역된다. 그러나 경전에서는 ‘업’이라 하고 있다. 업은 육체로 짓는 행위인 신업(신身), 언어로 짓는 행위인 구업(口業), 마음으로 짓는 행위인 의업(意業)등 3업으로 구분한다. 3업을 세분하면 10업이 된다.


1)살생(殺生) - 산 목숨을 죽이는 것

2)투도(偸盜) - 다른 사람이 주지 않은 물건을 훔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취하는 것.

3)사음(邪淫) - 부모와 형제와 자매로부터 보호되고 있는 여자를 범하는 것.

4)망어(妄語) -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을 위하고 남을 위하고 혹은 재물을 위해 거짓말하는 것.

5)양설(兩舌) - 이간시키는 말로서 사람들을 갈라지게 하고 당파를 만들게 하는 것.

6)악구(惡口) - 추한 말, 즉 욕을 하는 것.

7)기어(綺語) - 꾸며대는 말, 즉 진실이 아닌 것을 말하고, 뜻이 아닌 것을 말하고, 법이 아닌 것을 말하는 것.

8)탐(貪) - 남의 재물과 모든 생활 기구를 엿보고 구하고 바라면서, 그것들을 자신의 것으로 만 들고자 하는 것.

9)진(瞋) - 미워하고 성내는 것.

10)사견(邪見) - 삿된 소견, 구체적으로 말하면 업과 그 과보를 믿지 않고, 이 세상과 저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는 것.


10업 가운데서 살생, 투도, 사음은 신업이고, 망어, 양설, 악구, 기어는 구업에 속하고 탐, 진, 사견은 의업이다.


업을 성질상으로 분류해서 선업, 악업, 무기업(無記業)으로 나누기도 한다. 선업은 착한 행위로서 좋은 과보를 내게 되고, 악업은 악한 행위로서 나쁜 과보를 내게 된다. 무기업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중성적인 행위로서 과보를 낼 수 없다.


업 이론은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다”라는 “인과 법칙”위에 성립되어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라는 “윤리적인 법칙”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업 이론은 인과성과 윤리성이라는 2중 구조를 가지고 있다. 업이론의 인과성은 자연법칙에서와 같은 것이지만, 그 윤리성, 즉 선한 행위에는 좋은 결과가 나오고 악한 행위에는 나쁜 결과가 초래된다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다.


업을 행할 때 업[행위] 그 자체는 순간적으로 끝나 버린다. 그러나 업은 그것을 행한 존재 속에 반드시 어떤 흔적이나 세력을 남기게 된다. 마치 향香을 태울 때 향이 다 타서 사라진 뒤에도 향기가 옷에 배어들어 남게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업이 남긴 이 세력을 업력業力 이라 하는 데, 이것은 잠재적인 에너지로 되어서 존재 속에 머물러 있다가 기회가 오면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업력은 존재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들로 하여금 살아가게 하는 동력(動力)으로 작용하고, 죽은 뒤에는 그들의 미래를 만드는 에너지로 된다.


업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이 생(生)에서 뿐만 아니라 여러 생을 통해서 틀림없이 그 결과를 나타내게 된다. 그래서 업은 존재의 현재 운명뿐만 아니라 미래 운명에도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존재의 모든 것은 업에 의해서 만들어지게 된다. 사람으로 태어날 업을 지었으면 다음 생에 사람으로 태어나게 되고 짐승이 될 업을 지었으면 짐승으로 태어나게 된다.

 

한 존재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것, 즉 모습, 성격, 환경, 태어난 국토, 수명의 길고 짧음, 육체적인 조건 등은 그 존재가 과거에 지은 업의 결과이다. 역시 현재 짓고 있는 업은 그 존재의 미래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재료가 된다. 이처럼 존재의 모든 것은 업에 의해 결정된다.
 

업은 개인의 운명뿐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도 결정한다. 단체나 사회의 운명은 그 단체나 사회를 구성하고 있는 구성원들이 짓는 업에 의해 결정된다. 한 존재는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개인 업, 즉 불공업(不共業)을 지음과 동시에, 역시 그 존재가 몸담고 있는 공동체의 운명을 결정하는 공업共業도 짓게 된다. 업은 존재의 모든 것을 결정하는 궁극원리이다.


인간의 행위를 업業이라고 했지만 그러나 모든 행위가 업은 아니다. 업다운 업이 되기 위해서는 과보(果報)를 초래할 능력을 가지고 있는 행위여야 한다. 그렇지 못한 행위는 업이 아니다.


과보를 초래할 수 있는 업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2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첫째, 의도적인 행위여야 한다. 무의식적으로 행해진 행위는 과보를 초래할 힘을 가지지 못한다. 둘째, 윤리적인 행위여야 한다. 즉 선한 행위이거나 악한 행위여야 한다.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은 행위, 즉 무기업은 중성적인 업으로서 무정란(無精卵 과 같은 것이다. 이 업은 과보를 초래할 능력이 없다. 따라서 무기업은 엄밀한 의미에서 업이라고 할 수 없다.


업은 인간만이 지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의도된 행위와 윤리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동물의 행동은 본능적인 것일 뿐 의지작용이 바탕이 된 행위는 아니다. 역시 동물들은 윤리 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6도 가운데서 인간도에서만 업을 짓고, 나머지는 5도에서는 업을 소비할 뿐이다.


3. 과보(果報phala)


업이 지어지면 틀림없이 그 결과가 나타나게 된다. 그것을 과보라 한다. 업과 과보의 관계는 식물에 비유해서 설명될 수 있다. 씨앗을 심으면 싹이 나고 자라서 열매가 열린다. 열매의 맛과 성질은 전적으로 그 씨앗을 따른다. 마찬가지로 업을 지으면 그것은 성숙하게 되고 언젠가는 반드시 과보를 초래한다. 그리고 과보의 성질은 전적으로 업의 성질에 좌우 된다.


예를 들면, 같은 밭에 고추 씨앗과 가지 씨앗을 심은 뒤 동일한 조건 아래에서 고추와 가지를 키우더라도 그 결과는 완전히 다르게 나타난다. 고추 씨앗의 결과는 고추로 나타나게 되고, 가지 씨앗의 결과는 가지로 나타나게 된다. 고추와 가지의 모양과 맛은 그것들을 키우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이미 그 씨앗 속에 들어 있다. 업과 과보의 원리도 이와 같은 것이다.


업이 일단 결정되고 나면 그 과보는 피할 수 없다. 그것은 절대로 그냥 소멸되지 않는다. 언젠가는 업을 지은 사람에게 그 결과가 나타나고야 만다. 여기에는 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다. 법구경(法句經)에서는 이것을 “하늘에도 바다에도 산중 동굴에도 사람이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업은 개인의 의지작용에 의해 짓는 것이므로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다. 자신이 지은 업을 다른 존재에게 이전시킬 수 있다거나 다른 사람이 지은 업의 과보를 자기가 대신 받을 수는 없다. 설사 그것이 선업의 과보일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업의 원리를 “자신이 짓고 자신이 받는 원리”, 즉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원리, 또는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원리라고 하는 것이다.


업이 일단 이루어지면 그 성질에 따라 틀린 없이 그 과보가 있게 된다고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산술적(算術的)인 방식으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2개의 똑같은 업을 지었다 해도 그 결과는 반드시 동일하지는 않다. 상황에 따라 그 결과는 다르게 나타난다. 예를 들면 똑같은 보시를 하더라도 그 보시를 누구에게 하는가에 따라 그 과보는 다르다.

 

음식물을 짐승에게 주는 것보다는 사람에게 주는 것이 결과가 더 크고, 범부에게보다는 수행자에게 주는 것이 더욱 큰 과보를 초래하게 된다. 수행자에게 하는 보시보다는 도를 이룬 붓다와 같은 존재에게 하는 것이 훨씬 더 큰 과보를 받을 수 있다. 짐승을 죽여도 죄가 되지만 사람이나 성인聖人을 죽이면 그 죄는 더욱 무겁다.


이와 같은 원리는 붓다가 꼬살라국의 쁘라세나지뜨 왕에게 한 설명을 보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다. “대왕이여 알아야 하오. 마치 저 농부가 땅을 잘 다루고 잡초를 없앤 뒤에 좋은 종자를 좋은 밭에 뿌리면 거기에서 나오는 수확은 한량이 없지마는 그 농부가 땅을 잘 다루지 않고 잡초들을 없애지 않고서 종자를 뿌리면 그 수확은 말할 것도 못되는 것과 같소.” 즉 같은 넓이의 밭에 같은 양의 종자를 심는다 해도 밭의 상태에 따라 수확의 양도 다르게 나타나는 것처럼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것도 동일하다.


업이 일단 결정된 뒤에는 외부의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했지만, 그러나 업을 지은 사람의 노력에 따라 예상되는 결과를 다소 변화시킬 수 있다. 업을 지은 뒤에 다시 어떤 업을 짓느냐에 따라 이미 결정된 업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과보를 나타나지 않게 할 수 있다거나 완전히 다른 것으로 되게 할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소금물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다. 한 움큼의 소금을 한 잔의 물 속에 넣으면 그 물은 짜서 마실 수 없게 되지만 그것을 큰 그릇의 물 속에 넣으면 마실 수 있는 물이 된다. 한잔 속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과 큰 그릇의 물에 넣은 소금의 양은 동일 하지만 물의 양에 따라 소금물의 농도가 다르게 되므로 마실 수 있는 물이 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한 물이 되기도 한다. 이처럼 이미 결정된 업도 우리의 노력에 의해 그 결과를 어느 정도 까지 변화 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나쁜 업을 지었어도 그 뒤에 좋은 업을 많이 지으면 이미 지은 나쁜 업에 대한 과보는 나쁘게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이와 같은 원리 때문에 업 이론은 기계론적인 이론이 아니게 된다. 그래서 사람은 자신의 운명을 자신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는 업의 성질과 업이 처한 상황에 따라 다르다. 그것은 곡식이 종자에 따라 싹이 나오는 시기가 다른 것과 같다. 또한 동일한 종자라 해도 온도나 습도 등 종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싹이 일찍 나오기도 하고 늦게 나오기도 한다. 업의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도 이와 같아서 일정하지가 않다.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를 3종류로 나눈다. 이 생에서 지어서 이 생에서 그 과보가 나타나 업을 순현업(順現業), 그 과보가 다음 생에 나타나는 업을 순생업(順生業), 차후생 또는 여러 생에 걸쳐 나타나는 업을 순후업(順後業)이라 한다. 그리고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가 정해진 업을 정업(定業)이라 하고 그 반대인 것, 즉 과보가 나타나는 시기가 정해지지 않은 업을 부정업(不定業)이라고 한다.

 

업을 지으면 틀림없이 그 과보를 받게 되지만 그 결과는 항상 동일하지는 않다. 수많은 변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업을 지으면 어떤 과보를 받는다고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대체로 선업을 지은 사람은 천상이나 인간계, 즉 선도(善道)에 태어나고, 악업을 지은 사람은 주로 지옥, 아귀 축생의 세계, 즉 악도(惡道)에 태어난다고 말 할 수 있다. 경전에 의하면 악업을 지은 사람은 설사 인간계에 다시 태어난다 하더라도 다음과 같은 나쁜 조건 속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즉 살생 업을 많이 지으면 건강이 좋지 않거나 일찍 죽게 되고, 투도업을 많이 지으면 가난하게 태어난다. 사음 업을 많이 지으면 가족들이 정숙하지 못하게 되고, 망어업을 많이 지으면 말에 신용도 없고 다른 사람에게 멸시를 받게 된다. 양설(兩舌)업을 많이 지으면 정신이 안정되지 못해서 항상 불안 속에 살게 되고 가정불화가 많을 뿐 아니라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게 된다. 악구(惡口)업을 많이 짓는 사람은 얼굴이 못생기고 듣기 싫은 목소리를 가지게 된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항상 미움을 받게 된다. 기어(綺語)업을 많이 지으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친척들이 흩어진다. 탐욕(貪欲)업과 화를 내는 업(진업瞋業)을 많이 지으면 다음 생에서도 탐욕심과 화를 많이 내게 된다. 그리고 사견(邪見)업을 많이 짓는 사람은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이 어지러워 안정되지 않는다. 그리고 문화중심지에 태어날 기회를 가질 수 없게 되어서 붓다의 가르침을 들을 수 없다. 심하면 귀머거리, 장님, 벙어리가 되고 선법(善法)과 악법(惡法)을 구별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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