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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사상(唯識思想)

종교학(宗敎學)

by 巡禮者 2010. 8. 18. 1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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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식사상(唯識思想) 

 


유식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궁극적으로 그 원리를 관찰해 보면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 자체에 가치기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실은 이 세상의 누구나 갖고 있는 자기 마음의 인식 여하에 달려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러한 유심론(唯心論)적 성격은 근본불교에서부터 있었다. 초기에 육처(六處)와 십이처(十二處)설이 있었는데, 이것은 인식에 의거하여 존재를 고찰하는 설이다. 12처란 인식하는 것과 인식되는 것을 인식기관에 의거하여 여섯 개의 영역으로 구분한 설이다. 부파불교에서는 외계의 대상이 실재한다고 보았지만 유식설에서는 외계의 대상은 실재하지 않는다고 본다. 왜냐하면 외계의 대상은 인식되는 대상으로써 인식되지 않았다면 대상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유식설에서의 대상은 인식되어진 대상이다.
 

초기불교에서는 제행무상(諸行無常)을 설하고 제법의 무아(無我)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무아설에 의해서 불교에서 ‘인격의 주체’를 어떻게 해석하는지를 명확히 알 수 없다. 주체가 없으면 기억의 지속이나 업의 과보, 책임의 소재 등의 문제가 충분히 설명될 수 없다.


자업자득의 원칙을 강조하게 되면 자아의 자기 동일성이나 인격의 지속성이 요청된다. 그 때문에 제행무상과 무아의 교리를 인정하면서도 인격의 지속이나 업의 과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부파불교의 커다란 과제였고 그리하여 이에 대해서 갖가지 새로운 이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설일체유부는 제법의 찰나멸을 주장하면서도 다시 제법의 상사상속(相似相續)을 인정하고 의식의 흐름을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유부는 생리적으로는 명근(命根)의 존재를 설하고 이로써 생명이 지속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아직 인격이나 주체의 관념은 나타나 있지 않다. 이에 대해 독자부나 정량부가 비즉비리온(非卽非離蘊)의 아(我)를 설한 것은 유명하다. 독자부는 이것을 보특가라(補特伽羅)라고 불렀는데 이 보특가라는 오온(五蘊)과 완전히 동일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오온을 떠나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동시에 그것은 인식될 수도 없고 적절한 언어로 표현될 수도 없지만 이러한 인격적 주체가 엄연히 존재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유사한 것으로 화지부에서는 궁생사온(窮生死蘊)을 설하였고, 이 주체들은 개체의 죽음과 함께 사멸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초월하여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것, 즉 윤회의 주체로 생각되었던 것이다. 또 부파불교시대에는 잠자고 있을 때에도 미세한 마음의 작용이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한 것으로서 대중부나 분별론자 등은 세심(細心)을 설하고 미세한 마음의 지속을 주장했다. 대중부가 설한 근본식(根本識)도 이와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로부터 표면심에 대한 잠재심의 관념이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업에 관해서는 선악의 행위가 있고 나서 그 과보를 받을 때까지 업력은 어떻게 보존되는가 하는 문제가 있다. 즉 업과 그 과보를 연관시키는 매개자의 문제이다. 이것을 대중부는 증장(增長)이라고 불렀고 유부의 무표업(無表業)도 본래 그러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경량부는 이 업력을 종자(種子)라고 불렀다. 즉 업력을 식물의 종자가 가진 잠재적인 힘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단지 선악의 업에만 종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행위가 종자의 형태로 바뀌어 존속한다고 보았다. 그러나 경량부에서는 이 종자가 어디에 보존되는가를 생각한 끝에 그 장소로서 잠재심을 상정하지 않고 색심호훈(色心互熏)을 설했다고 한다.


이상과 같이 부파불교에서 생겨난 갖가지 사상이 대승불교로 계승되어 인격의 주체 속에 잠재심, 무의식의 영역이 상정되게 되고 거기에 종자가 저장되어 있다는 사상이 확립되어간 것이다. 아뢰야식(阿賴耶識)의 아뢰야란 ‘간직한다’는 뜻이다. 종자를 소장하고 있는 식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종자의 집합체 이외에 그 용기로서의 다른 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아뢰야식을 종자식(種子識)이라고 한다. 이 아뢰야식이라는 개념은 이미 <해심밀경>에 나타난다. 이 아뢰야식은 인간 존재의 근저에 항상 상존해 있으면서도 변함이 없으며 그 흐름은 일생동안 끊어지는 일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의 생존에까지 계속 영향을 미쳐서 이어져 간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중생이 어떠한 행위나 행동을 하는 한 그것은 대개 선업이나 악업을 지어서 그 결과를 초래하는데 이 때에 아뢰야식이 업력의 소의처가 되어 그 속에 종자가 잠재하고 있다가 그에 알맞은 환경이나 조건 등의 연(緣)을 만나면 모든 세계를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어서 현상계를 생성한다는
것이다.


팔식(八識)의 구조


마음을 심(心), 의(意), 식(識)으로 부르는 예는 이미 초기불교에서도 발견된다. <아함경>에서는 인간의 정신현상을 심, 의, 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심, 의, 식의 체성은 염오성(染汚性)이라고 보았으며, 심의식은 무상한 것이라고 여겼다. 초기경전에서는 각각의 개별적인 심리작용은 없었으며, 생각하고 사랑하고 요별하는 심리작용을 총괄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부파불교에서는 인간의 정신현상을 심왕(心王)과 심소(心所)로 분류하였는데 심왕은 심의 주체로서 인식주관이며, 심소는 개별적인 심리작용이다. 심왕이 바로 심의식이며 이는 육식(六識)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점차 심, 의, 식의 구분을 시도하고 있다. <대비바사론> 제72권에서는 심의식의 무차별설과 차별설을 같이 설하고 있다. 무차별설은 심의식은 명칭의 차이만 있을 뿐 다같이 정신의 주체를 가리키며 체(體)가 동일하다는 것으로 이는 설일체유부의 견해이다. 차별설은 심의식은 명칭과 교설의 시설, 의미, 업 등에서 차이가 있지만 체(體)는 동일하다고 보는 것이다. 세친은 <구사론>에서 심은 집기(集起)의 의미가 있으며, 의는 사량(思量)의 의미가 있으며, 식은 요별(了別)의 의미가 있다고 설했으며 이는 정신의 주체이며 작용만 다를 뿐 체는 하나라고 하였다.


유가행파의 유가사들은 선정 관행 중 심층적인 식의 흐름과 기능에 주목하여 종래 부파불교시대부터 탐구되던 두 가지 문제인 윤회의 주체와 번뇌와 아집의 주체 및 의근(意根)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윤회의 주체는 아뢰야식, 번뇌와 아집의 주체는 말나식의 식체(識體)를 설정하였다. 그리하여 종래의 육식설(六識說)에다 아뢰야식(阿賴耶識)과 말나식(末那識)을 결합하여 팔식(八識)을 구성하였다. 팔식 가운데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은 묶어서 전오식(前五識)이라고 하는데 이 식들은 각각 대상을 요별하고 분별한다. 의식(意識)은 의근(意根)에 의지하여 인식작용을 일으킨다. 이 의식은 전오식으로는 볼 수 없고 만져볼 수 없지만 없는 것이 아니고 전오식과 함께 일어나거나 아니면 홀로 활동한다. 의식이 일어나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 경우가 있는데 첫번째는 전오식과 함께 일어나서 같은 대상을 인식하거나 아니면 전오식과 함께 일어났지만 의식이 한눈을 팔아서 올바르게 인식되지 않은 경우이고, 두번째는 꿈을 꾸거나 망상, 공상 및 선정에 들 때와 같이 의식이 독단적으로 일어나는 경우를 말한다.


제8 아뢰야식을 일으킨 근본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을 일부러 우리가 어떤 의도적인 행위를 하고나 아니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끊임없이 아치(我痴), 아견(我見), 아만(我慢), 아애(我愛)의 4종번뇌와 항상 같이하면서 업을 일으킬 때 이들에 의한 인상이나 여운등을 그대로 흡수하여 저장하는 장소로서 아뢰야식이 활용되는데 이렇게 근본적인 원인을 제공하는 식은 제6식보다는 깊고 제8식보다는 얕은 제7말나식이라는 의식이 상정됨으로써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제7말나식을 일컬어 자아의식이라고도 하며, 이 식에 의하여 업을 지어서 중생들이 결과적으로 세세생생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제8아뢰야식은 이렇게 모든 업의 산물들을 스스로 저장하는 능장(能藏)으로서의 의미도 갖고 있으며, 한편으로는 모든 세력들을 소장(所藏)할 장소로서의 처소로도 제공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이 아뢰야식은 앞에서와같이 항상 제7말나식의 집착력과 아집 등에 의하여 유린당하는 입장에 서 있으므로 이럴 경우 제8아뢰야식은 집장(執藏)의 뜻이 강하다. 왜냐하면 아뢰야식의 본래 의미는 유루법이 현행하는 사이, 곧 아집 등이 활동하는 동안만 존재하는 것이지 아집 등이 없는 성인위에 오르면 이 식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게 된다.


유식의 수행


유가행의 수습단계가 발전하여 유식사상에서는 오위설(五位說)로 정착되었다. 오위는 자량위(資糧位), 가행위(加行位), 통달위(通達位), 수습위(修習位) 및 구경위(究竟位)에 각각 해당된다. 첫째 자량위는 복덕과 지혜의 2자량을 축적하는 수행의 준비단계라는 의미이다. 즉 친구의 권유나 자기의 의지로써 유식의 교리를 배우고 그것이 진리임을 믿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 유식이 자기 것으로 체험되지 않은 단계이다. 따라서 아집, 법집의 번뇌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은 단계라 하겠다. 둘째 가행위는 이미 직접적으로 유식의 수행으로 나아간 단계이다. 그러나 눈 앞에 어떤 대상을 설정하고 이것이 유식이다라고 말하고 있는 단계이므로 아직 참된 유식에 들어갔다고는 말할 수 없다. 즉 유식이라는 것을 인식의 대상으로 하고 있는 단계이다.

 

그러나 가행위에서 사심사관(四尋四觀) 사여실지관(四如實智觀) 등의 관법을 닦아 유식의 수행이 진전함으로써 유식에 통달한다. 이것이 세번째 통달위이다. 즉 인식의 대상을 나로 집착하거나 법으로 집착하는 일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이다. 이와 관련하여 ‘지혜가 소연(所緣)에서 생기지 않을 때 유식성에 머문다’라고 한다. 소연에서 앎이 생기지 않는다는 것은 집착이 없어졌음을 뜻한다. 거기에는 당연히 집착하는 주체도 없다. 그것은 주객의 분열이 없어진 지혜이기 때문에 무분별지라고 한다. 이것은 상대를 떠난 지혜, 즉 공의 지혜이다. 공(空)은 형태나 크기가 없기 때문에 인식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공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 공을 완성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분별지이다.


이 유식에 안주한 지혜를 견도(見道)라고 한다. 견도에는 진(眞)견도와 상(相)견도가 있다. 진견도는 근본 무분별지에 의해 생기며 유식의 성(性)을 깨닫는 것이고, 상견도는 후득지에 의해 생기며 유식의 상(相)을 깨닫는 것이라고 한다. 진견도는 이공소현(二空所顯)의 진여를 깨닫는 것이다. 이 통달위는 성자의 부류에 속하게 되는 것이며, 십지(十地) 중 최초의 환희지에 든다고 한다. 그 후 다시 수행을 계속하여 제10지의 위에 이르기까지가 네번째 수습위이다.

 

즉 이 단계에서는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무분별지를 수습하고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어 무심(無心)의 상태에서 전의(轉依)를 실현하는 것이다. 앞의 통달위 단계에서도 무분별지가 나타나지만 그것은 일시적이며 다시 번뇌가 생긴다. 그러한 상태에서 무분별지를 자주 수습하여 그 수습이 완성될 때 전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즉 번뇌장을 떨쳐버림으로써 대열반을 얻고 소지장을 떨쳐버림으로서 대보리를 얻는 것이다. 수습위의 다음인 다섯번째 구경위는 불과(佛果)이다. 이것은 앞의 전의에 의해 얻어진 경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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