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이스라엘 마사다

사진

by 巡禮者 2012. 3. 20. 12:55

본문

 

엔게디에서 왼쪽으로 사해를 바라보며 달려온 마사다 요새.

 

 

'마사다'란 말 자체가 히브리어로 요새를 뜻합니다. 마사다는 사해에서 서쪽으로 4㎞ 떨어져 유대광야 동쪽 끝에 우뚝 솟은 바위산입니다. 하스몬가의 지배자에 의하여 축조되고 BC 35년에 유다의 헤롯왕이 개축하였스비다. 사방을 깎아지른 벼랑으로 둘러치고 뻗쳐오르던 바위산은 해발 434m입니다. 요새의 정상까지는 케이블카를 이용하여 올라갑니다. 이곳에서 보면 사해와 여리고 그리고 요르단도 보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마사다에서 보이는 사해와 요르단입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AD6년 로마군이 진치고 있었던 사해쪽 병영자리입니다. 유대인 열심당원들은 마사다 정상에서 항거하고 마사다 아레에는 이렇게 로마군이 사방으로 포위하며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더 높이 올라간 곳에서 촬영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아래 보이는 계단은 케이블카가 아닌 도보로 올라오는 사람들을 위한 등산로 입니다. 등산로 이름이 스네이크길입니다. 이스라엘 신병 정신 교육장이기도 한 곳이랍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로마에 대항한 유대인들의 결사 항전에 직면한 로마군이 토성을 쌓은 곳입니다.

중앙에 보이는 산등성이가 로마군이 마사다를 함락시키기 위해서 토성을 쌓고

결국 마사다를 함락시킵니다.

마사다 함락 직전 유대이 열심당원 967명은 비굴한 항복 대신 서로를 죽여 자살을 하고 말았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토성을 만든 로마군이 주둔한 진영의 돌대포입니다. 저 전차모양의 돌대포를 얼마나 퍼부어 댓는지 마사다에는 돌대포알이 많이 있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산 밑에서 쏘아올린 돌대포알입니다. 저런 돌덩이들이 무수히 많았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헤롯왕의 요새 궁정입니다. 접근불가 지역에 헤롯은 자기의 거처를 만들었습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Masada was do not Surrendered     

 

이스라엘 마사다의 교훈  

  

          유태교도들이 로마군에 항거했던 성채 마사다 요새

원본 크기의 사진을 보려면 클릭하세요

  남서쪽 방향의 마사다


73년 로마 제10군단이 바위산의 평평한 꼭대기에 자리잡은 마사다요새에 대한 최종 공격을 준비하자,요새 안에 갇힌 열성파 유태교도들은 무서운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항복하여 로마군의 잔인한 보복을 당하고 노예가 되느니 차라리
스스로의 손으로 죽는 길을 택했던 것이다.이 열성파 유대교도들의 순교는 유태인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의해 기록되었다.요세푸스의 기록에 따르면,그들의 지도자인 엘레아자르 벤 야이르는 다음과 같은
영웅적인 연설을 했다.

"만약 우리가 적에게 사로 잡히게 된다면 우리는 적의 노예가 되거나
혹독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다.우리는 누구보다 먼저 그들의 지배에서 이탈했고, 그들에 대항해서 제일 마지막까지 저항해 왔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에게 우리가 원하는 죽음을 택하는것이 허락 된다면 그것은 은혜로운 일일 것이다. 우리는 처자식에 둘러싸인 가운데 영광을 가로챔으로써 적에게 용감히  자신의 사형 집행자가 된 자들의 시체 이외에는 아무것도 넘겨주지
않음으로써 영원한 명성을 우리의 것으로 하자."

벤 야이르는 요새 전체를 불지르라고 명령했다.(다만 많은 식품을 저장한 창고만은 제외했다),그들은 그들이 절망했기 때문이 아니라 자부심과 종교적 신앙에 따라 행동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 다음 결혼한 남자들은 자기 가족을 죽였다. 남은 사람들이 제비를 뽑아서 그 수비대의 나머지 사람들을 죽일
10명을 뽑았다. 그 10명이 다시 제비를 뽑아 나머지 9명을 죽일 한 사람을 뽑았다.
그 최후의 한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하여 로마군들이 성벽을 물밀듯이 넘어 들어왔을때 그들이 기다리고 있던 것은 
즐비한 시체뿐이었다. 역사가 요제푸스는 이렇게 썼다.


'로마 군인들은 줄줄이 누운 시체들을 보자
적에 대한 승리를 기뻐하지 않았다.
그들은 적들의 고귀한 결의와 그 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두려움의 흔적도 없이 죽음을 맞으면서 보인 죽음에 대한 철저한 경멸감에 대하여 경탄에 마지 않았다.
967명의 유태인 중에서 오직 여자 2명과 아이 3명 등 7명만이
살아 남아서 후세에 전했다. 그들은 지하실에 숨어 있었는데 로마 군인들은 감동한 나머지 그들을

살려 주었다. 그리하여 마사다의 이야기는 한 민족을 위해 싸운 사람들의 가장 위대한 이야기 중의 하나가 되고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오랫동안 의심스러운 이야기로 간주되어 왔다.
왜냐하면 그 이야기를 전하는 유일한 기록이 유태인인 요제푸스가 기록한 것이고

또 요제푸스는 그 싸움터 가까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63년에 발굴사상 가장 어려운 발굴 작업에 의해  마사다요새의 증거가 발굴되었다. 이스라엘의 고고학 권위자인 이가엘 아딘 교수의 지휘 아래 전세계에서  모여든 3000여명의 자원자들이 발굴 작업에 착수했다. 마사다는 사해 근처 유태평원에있는, 정상이 평평한 바위산으로 면적이 약9ha 정도 된다.


그리스도가 탄생하기 30년 전에 유대왕인 헤롯 대왕이
이곳에 성(城)을 지어 요새화 했다. 항상 반역을 두려워한 헤롯은 산 정상 주위에 높은 성벽과 탑을 쌓고 10개의 거대한 저수장을 팠다. 이 저수장 하나가 2,900만 리터의 물을 저장할 수 있었다. 헤롯왕은 암반의 사면(斜面)을 계단식으로 깎아서  궁전과 유흥장을 지었다.
그곳은 안전하고도 호사스러운 은신처였다. 헤롯이 죽고 오랜 세월이 지난 뒤, 유대인 열성 당원들이
로마의 통치에 반기를 들었다. 4년뒤 반란은 거의 진압 되었으나 마사다 요새만이 버티고 있었다. 로마의 유대 집정관 실비우스 플라비우스가 서기 72년  용맹스러운 로마10군단을 이끌고 마사다를 향해 진군해 왔다. 그는 73년초까지 그 성채를 봉쇄하는 벽을 건조하여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아무도 로마의 복수를 피할 수 없게 했다.


그런 다음, 그는 공격 준비를 시작했다. 접근이 가능한 유일한 곳은 서쪽 측면의 돌출부였다. 그래서 그는 그것을 향해 30m 높이의 거대한 경사로를 
쌓아 올리기 시작했다. 그 건축물은 봄까지 완성되었으며, 그곳과 정상 돌출부를  거대한 다리로 연결했다. 이 다리를 건너 성벽을 공격하려는 것이었다. 이제 마사다의 운명은 시간 문제였다.


1,900년이 지난 뒤에 발굴자들은 열성당원들의 절망적인  최후의 날의
증거를 발견했다. 불을 지르지 않은 식품 창고와 식량 배급표처럼 사용되었던  청동주화 더미가 발굴되었던 것이다. 발굴자들은 연기에 그을린 작은 방의 바닥 밑에서 조심스럽게 숨겨둔  14개의 두루마리를 발견했는데, 이 두루마리들이 모두 기원 후 73년 이전의 것임을 어느 정도 정확하게 감정할 수 있었다. 그 두루마기들에는 신명기,에즈키엘서,시편등 성서의 일부와  경외서(經外書)의 발췌가 적혀 있었다. 한 가죽 조각에는 사해 두루마리의 글과 비슷한 글이 적혀 있었다. 로마군의 예상 공격 방향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전략적인 장소에서는 지휘관의 갑옷이 발견되었다.
그 옆에는 11개의 토기조각들이 놓여 있었는데, 조각마다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한 조각에는 벤 아이르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10개의 제비 외에 영웅적인 지도자인 엘레이자르 벤 야이르의 11번째
제비가 있었던 것일까? 그렇다면 그가 최후까지 살아 남았다가 자신의 칼로 목숨을 끊은 것일까? 비범한 인물인 그는 자기가 추종자들에게 시킨 그 무서운 임무를 스스로 회피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날 마사다는 이스라엘에 의해 성지로서 보존되고 있다.
그리고 이스라엘 군대에 입대하는 신병들은 다음과 같은 서약을 한다.


[ 마사다가 다시 함락되게 하지 않겠음 ]

        


 

        

 

  

 

 


 

 

   


                               로마 군대의 캠프 자리



                             

 로마인이 사용한 투석기
         
                        
마사다의 밤 풍경


 

         

마사다의 케이블카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