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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민 신부, "성직자들의 의식이 먼저 깨어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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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2. 9. 25. 1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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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의 기도로 시작했다. 자기 할 말만 하느라고 세상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교회의 태도를 반성하면서 공의회를 시작한 것이다. 공의회는 복음화를 외치면서 세상에 귀 기울이지 않고 자기의 신조만을 강조한 교회의 자세를 반성하고자 하였다. 공의회 폐막 반세기가 지난 오늘날도 상황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세상의 복음화를 외치면서도 여전히 자기 구원, 자기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을 교회의 사명으로 여기고 있다.”

이제민 신부는 지난 9월 20일 마산교구 교육관에서 열린 마산교구 사제연수에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믿음’에 관해 발표하면서, 가톨릭교회가 다시금 교회쇄신에 대한 요청을 받고 있다고 전했다. 이제민 신부는 한스 큉 등 ‘제3차 공의회’를 요구하는 이들이 있음을 밝히면서, 오히려 지금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라 교회의 쇄신을 위해 우리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성찰할 때”라고 말했다.

이제민 신부는 “교회의 쇄신은 복음으로 돌아가는 마음 없이 불가능하다”면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12년 10월 11일부터 2013년 11월 24일까지를 ‘믿음의 해’로 선포한 것은 “공의회의 가르침을 이해하도록 돕고 ... 교회의 쇄신에 더욱 큰 힘”(바오로 6세, 신앙의 문 5)을 쏟으라는 요청이라고 전했다. 여기서 교황이 새 복음화’를 강조한 것은 “복음을 외치는 우리들의 믿음에 문제가 있다는 말”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돌아갈 것을 촉구했다.

 

   
 ▲2010년 7월 5일 창원시 마산교구 사파동성당에서 열린 생명평화미사. ⓒ 한상봉 기자

 

무엇을 믿고 무엇을 감사하겠다는 뜻인가?

한편 이제민 신부는 미사를 마치면서 사제가 “미사가 끝났으니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 하면 신자들은 “감사합니다” 하고 대답하지만 “무엇을 전하겠다는 것이며 무엇에 감사하다는 것인가?” 물었다. 덧붙여 “천지의 창조주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하여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하여도, 우리가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다고 고백하여도, 그 고백이 복음에 근거하지 못하다면 우리의 신앙은 맹신과 광신이 될 수 있고 우상 숭배와 다를 바 없을 수도 있다”고 비판했다.

 

여기서 복음은 ‘인생을 기쁘게 사는 비결’이며, 이 비결은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거기에 몸을 맡기는 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복음은 너무도 엄청난 계시 진리여서 우리의 사고를 바꾸지 않고서는 깨달을 수 없다. 그분은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셨지만, 우리는 천국을 ‘가는’ 나라, 이 세상을 떠나야만 들어갈 수 있는 나라로 생각하는데 익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화란 “하느님께서 현존하시고, 하느님의 전부가 전달된 세상을 하느님 나라이듯 대하고,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을 하느님이듯 대하는 운동”이며, “온 세상(인간)만물에서 하느님을 보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 제물로 내놓으신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느끼는 운동”이라고 소개했다.

 

“복음화는 세상을 이미 와 있는 하느님나라로 보지 못하는 우리의 눈을 치유하며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맡기게 하는 운동이고, 드디어는 하느님께서 현존하시는 세상을 사랑하는 운동이다.”

 

그런 점에서 ‘새 복음화’ 역시 냉담자로 텅 비어버린 교회를 다시 채우자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의 돌아가 거기서 새로 시작하자는 말로 여긴다. 시몬 베유는 미사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많은 이는 그를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부른 사실을 지적하며 “그리스도의 뜻대로 살지 못하면서 그리스도인이라 불리는 것은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는 것이라 하여 시몬 베유는 세례 받기를 거부하였다”고 상기시켰다. 이어 ‘복음화 운동’을 세력 확장으로 여기고 ‘숫자 놀음’에 빠진 교회를 비판하며, “교회가 맹신자로 가득 채워진 것이 텅 빈 교회보다 더 큰 위기”라고 말했다.

 

“새 복음화는 사람들을 다시 교회 안으로 불러들이기 위하여 새로운 전술이나 새로운 방법을 제시하는 정도로 펼쳐져서는 안 된다. 세속화된 사회에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서 다시 하느님 사랑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새 복음화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을 듣고 사람들이 놀랐듯이 우리는 현대인이 예수님의 복음에 놀라움을 가지게 해야 한다.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마르 1,27)하며 서로 물어보게 하는 것이 새 복음화다. 사실 우리는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면서도 정작 우리는 그분의 복음에 놀라지 않는다. 우리의 사고가 그만큼 굳은 것이다.”

 

“성직자는 사목적이어야 한다”

   
▲ 이제민 신부

이제민 신부는 결국 우리 교회의 위기는 믿음의 위기이며, 이 믿음의 위기는 복음에 대한 그릇된 견해에서 나온 것이며, 그 결과 우리 교회가 “예전보다 더 보수적이고 더 근본적인 경향을 보이며 신앙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이 때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복음에 대한 믿음과 용기 있는 회개라고 말한다.

 

“교회가 시대풍조에 편승하여 이리 저리 흔들릴 때, 교회가 세속화의 물결에 휩쓸릴 때, 교회가 세상이 구하는 것을 구하려 할 때, 교회가 복음화 되지 못할 때, 복음화에 대한 소리가 아무리 크다 해도 세상이 복음화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교회가 먼저 복음화되어야 한다.”

 

이제민 신부는 믿음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성직자들이 신자들을 교육시킴으로써가 아니라 성직자들이 먼저 복음화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사목적 공의회’였듯이, “성직자는 사목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제민 신부는 “사목은 본당 안에서 신자들을 관리하도록 사제에게 주어진 특권이 아니라 성직자와 평신도가 함께(공동으로) 본당 안팎의 모든 인류에게 봉사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성직자는 사목자로서 정치, 경제, 농어촌, 여성, 청소년 문제 등 사회적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이 일은 성직자 혼자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 필요한 덕목은 ‘힘에 바탕을 둔 통솔’이 아니라 ‘겸손’이다.

 

구체적으로 지역 사목협의회나 본당 사목회의에서 성직자들은 본당회장이나 평신도 대표들의 견해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말했다. “본당 사목회가 본당 신부의 ‘사목방침’을 실천하는 기구 정도가 되고, 본당 회장이 본당신부의 비위를 맞추는 존재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

 

이런 점에서 ‘사제 권위주의’를 비판하며, “우리(사제)는 신자들을 하느님이 현존하시는 집으로, 하느님께 이르게 하는 문으로 대하고 있는가? 혹시나 우리를 통과하지 않고서는 하느님께 나아갈 수 없는 것처럼 그들을 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물으며,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생각을 따르는 것이 교회에 충실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버릇을 버려야 한다”고 요구했다.

 

“예수는 몸도 마음도 가난하셨다”

한편 이제민 신부는 “때때로 나는 자신의 영명축일이나 은경축일에 ‘교회를 위하여 하느님을 위하여’ 자기의 온 일생을 다 바쳤다고 말하는 것을 동료 사제들부터 듣는다. 나는 그들의 말을 믿는다. 하지만 평생 교회를 위하여 희생한 대가가 돈과 고급 승용차로 채워질 때는 슬픔을 느낀다”며 이런 행위는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대가를 지워버리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재속) 사제들은 순명과 정결의 서약을 하였을 뿐 가난의 서약은 하지 않았다는 말에 대해서 “이 말이 사제가 화려하게 살아도 좋다는 말로 확대 해석되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고집었다.

 

이제민 신부는 “예수는 몸도 마음도 가난하셨다”며, 사제가 가난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가난한 자에 대한 배려’라면서 “랍비들은 아무리 부자라고 해도 소박한 장례식을 치러주어야 한다는 규칙을 두었는데, 가난한 사람들에게 수치심을 유발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축제일에도 부잣집 소녀들은 좋은 옷이 ‘없는 소녀들에게 부끄러움을 주지 않도록’ 빌린 옷을 입어야 했다”고 전했다. 그래서 “사제의 영명 축일은 본당의 수녀들의 영명축일 수준으로 하면 안 될까?” 되묻는다.

 

덧붙여 “세상의 복음화와 교회의 쇄신을 원한다면 세상을 향하여 복음을 외치는 성직자들의 의식이 먼저 깨어나야 한다”며 키에르케고르의 말을 상시기켰다.

 

“이 시대의 고약함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개혁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경망한 환상을 가진 그릇된 욕망이며 아무 희생과 헌신도 없이 개혁의 탈을 쓴 희롱이다. 진정한 개혁에는 비상한 정신력이 요구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위선적인 자기상실의 그릇된 인식은 교회를 혁신해야 한다는 분심으로 언제나 가득 차 있다. 정작 교회가 진정한 쇄신을 필요로 하는 이 시기이건만, 쇄신되기에는 너무도 부당한 실력을 지녔기에 이를 실천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지 않은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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