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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차병원 원장 문영기(75)가 쓴 [앵콜 내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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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1. 2. 1.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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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차병원 원장 문영기(75)가 쓴 [앵콜 내 인생]
 

산부인과 의사 생활 46년…
 
내 손엔 신생아 의무기록지 1만2000장이 남았다
진료기록부 기록처럼 이제 전쟁의 상흔을 블로그에 담는다.
내가 열네살 때 6·25가 일어났다.
그때 나는 비록 어렸지만 '군사 마니아'였다.
이미 아홉 살 때부터 아버지가 책장에 꽂아두셨던
'적기(敵機) 감별법' 같은 책을 읽었다.
6·25때 학교 운동장에서 머리 위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보곤
"저게 바로 F-82야"라며 흥분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하다.
 
그 흥분은 곧 충격으로 바뀌었다.
내 눈앞에서 가족 같던 이웃 아저씨가 머리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내가 서울 북아현동 집 골목에서 목격한 첫 사망자였다.
이북에서 월남해 미처 피란가지 못한 그 아저씨는
혼란스러운 와중에 그만 변을 당했다.
철모르는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충격이었다.
그날의 잔상(殘像)은 지금도 불쑥불쑥 튀어나와 나를 놀라게 한다.
 
이 사건은 참혹한 비극의 서막(序幕)에 불과했다.
마을엔 산더미처럼 시체가 쌓여갔고,
한동안 형과 나는 마당에 파놓은 방공호에서 숨어 지냈다.
이데올로기의 대립, 생(生)과 사(死)의 뒤엉킴을
우리 시대의 아이들은 너무나 일찍 알아버렸다.
군사문제에 대한 열정과 눈으로 본 전쟁 참상은
결국 내 인생 2막의 주제가 되었다.
 
      2000년 차병원 원장 시절


내 인생 1막은 의사로 시작됐다.
전쟁통에 모든 재산을 잃어버린 아버지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나는 1960년 산부인과 의사가 된 뒤 2006년 일흔 살이 되던 해
서울 차병원 명예원장으로 정년퇴임했다.
그때까지 46년간 오로지 '최고의 산부인과 의사가 되어야겠다'는
일념으로 앞만 보고 달려왔다.

그 시절 내 사전에는 오로지 '환자'라는 단어밖에 없었다.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나였기에 고귀한 생명을 받아내는
산부인과 의사는 소명(召命)과도 같았다.
새 생명을 하나씩 하나씩 받으며
아무 죄 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에 대한 까닭 모를
마음의 빚을 갚아갔다.
서울 세브란스병원, 서울 강남 차병원을 거치는 동안
내가 받아낸 아이가 1만2000여명이 넘는다.
어느 하나 소중하지 않은 생명이 없다.
그래서 나는 그 아이들의 의무기록지를 지금도 다 가지고 있다.


그런 생활에서 은퇴를 하니 제일 문제가 아침에 눈을 뜨면
할 일이 없는 거였다.
그 느낌은 무료(無聊)보다는 오히려 당황이었다.
아들에게 인터넷부터 배웠다.
병원에서도 컴퓨터를 쓰긴 했지만 나는 '컴맹'이었다.
그런 내가 마우스를 까딱까딱 놀리기 시작하면서
젊은이들이 많이 들어오는 인터넷 커뮤니티를 기웃거렸다.
사실 이곳에 간 이유는 무기와 전쟁 때문이었다.


의사 시절, 수술 신발을 벗고 파김치로 집에 돌아오던 날에도
어김없이 무기에 관한 책을 펼쳤다.
군사문제에 대한 관심과 열정은 그 오랜 세월 속에서도
변하지 않았다.


나중엔 블로그도 만들었다.
처음에는 '컴퓨터를 하다가 생기는 질병'처럼
전공을 살린 글을 몇 개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온통 무기·전쟁 이야기들이다.
모든 글에는 참고문헌을 적고, 출처를 밝힌다.
마치 의학논문을 쓰듯이.
부산 피란시절 미군 CID(미군 범죄수사대) 본부에서
웨이터를 하면서 영어를 익힌 덕분에
미국 온라인 도서 사이트 '아마존'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군사서적 평론가' '군사전문가'. 이것이 나이 일흔 넘어
얻은 새로운 나의 명함이다.


요즘 문영기씨는 인터넷에 전쟁 이야기를 쓰느라 여념이 없다.  수술용 메스를

들었던 손으로 이젠 마우스를 부지런히 움직이며 전쟁의 상흔을 기록하고 있다.

 

지난해 미국에 이민 간 친구가 한국 책 한 권을 부탁했다.
책을 구하러 출판사에 갔다가 우연히 출판사 회장과
한참 이야기를 하게 됐다.
전쟁에 대해 말문이 터지자, 그분이
"책 한번 써보지 않겠느냐"고 했다.
"논문 심사는 해봤지만 평생 일기 한 번 안 써본 내가
어떻게 글을 써요" 당장 손사래를 쳤다.
그랬더니 이 양반이 이런다.
"이제 전쟁 기록할 사람도 별로 없어요.
이제까지 모은 자료만 해도 충분히 쓸 수 있어요."


생각해 보니 주변에 6·25를 기억하고 증언할 수 있는
세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문득 내가 그동안 모았던 수천 권의 서적과 자료, 사진을
총동원해 전쟁을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다.
그날부터 종일 인터넷 앞에 앉아 한국전쟁과 관련된
1만여장의 사진을 찾아냈다.
미국 해병대 등 미국의 군사기관에 편지를 보내
희귀 사진과 통계 자료도 구했다.
그렇게 해서 지난해 '내가 겪은 한국 전쟁' 이라는 책을 냈다.


"늙어서 무슨 주책이냐." 늘 핀잔 주는 아내지만,
속마음은 그렇지 않으리란 걸 안다.
아내는 피란길에 인민군 총격으로 어머니와
막냇동생을 잃었다.
아내처럼 전쟁의 아픔을 간직한 이들을 위해서라도
나는 전쟁과 전쟁이 남긴 눈물을 기록하려 한다.
요즘은 전쟁 포로에 대한 책을 쓰려고
미국에 있는 전쟁 포로 가족들과 접촉하고 있다.


나는 아침에 눈을 뜰 때마다 기도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오늘 또 하루를 주셨네요.
이 소중한 하루, 충실하게 보내겠습니다.'
나는 46년간 메스와 청진기를 들고 사람을 살리는
기술에 매진해왔다.
그러나 이제 전장의 비극에 대해 메스를 들고,
청진기를 들이대 그 역사의 아픈 상처를 새 진료기록부에
남기려 한다. 


충주 출신 각계 인사들을 수록한 ‘충주의 인물 33인선’ 에
반기문 UN사무총장 등과 같이 올라 있다. [에밀레]

 

I'll miss you (나는 돌아갈 거예요)

      
Ammanda L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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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ul London


Pupo


Andrea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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