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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과 함께 하는 평화 /봉봉신부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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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0. 8. 5.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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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님과 함께 하는 평화 ♡
사랑하올 형제 자매님, 지난 주간은 천국을 미리 맛보셨나요? 이젠 우리나라도 봄이 없으지려고 하는지 요즘은 벌써 여름이 된 것 같은 착각을 하게 만듭니다. 어제는 야생화를 찾아 산을 오르는데 땀이 얼마나 많이 흐르든지요..... 날씨가 갑자기 변하니까 건강관리도 잘 하셔야겠습니다. 형제 자매님, 오늘은 벌써 부활제6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들이 모두 평화를 누리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님을 따르고자 나선 사람들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예수님이 주시는 평화를 누려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다르다고 했습니다. 어떤 점에서 다른가요?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평화입니다. “이 세상 안에 살면서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떠났다가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러한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신 주님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심을 체험하기 때문에, 세상의 그 어떤 것에 대해서 걱정하거나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예수께서 주시는 평화를 누리려면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해야 합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오늘 미사에서 듣게 되는 두 개의 독서를 통해서, 우리는 이제 더 이상 하느님의 현존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성전이 필요 없게 되었고, 율법을 엄격하게 지키는 것이 하느님을 뵐 수 있는 길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도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형제 자매님,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예수님의 현존을 체험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예수님을 향한 사랑입니다. 사랑은 감정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예수님께 대한 사랑은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지키는 데에서 드러납니다. 구체적인 생활 안에서 성실하게 예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에게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으로 응답해 주시고 그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서 찾아오십니다. 형제 자매님, 그러면 예수님께서 우리가 꼭 지키기를 원하신 말씀은 어떤 것입니까? 요한복음에서는 “나의 말”은 곧 “나의 계명”과 같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계명은 ‘서로 간의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은 당신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다음에 하신 것입니다. 즉 그분이 요구하신 사랑은 머리로써 하는 추상적인 사랑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행동으로 드러나는 실천적인 사랑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가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고자 한다면 예수님처럼 자신을 온전히 낮추고 사랑할 대상과 같이 되어 그 대상의 입장에서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을 지닌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은 가치관에서부터 근본적으로 차이가 납니다. 아오스딩 성인은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위해서 자신을 뒤로 밀치는 것” 이라고 했습니다. 자신을 뒤로 밀치기 때문에 사랑할 대상이 뚜렷이 잘 보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이타적인 가치관’을 갖고 있지만 사랑이 없는 사람은 항상 ‘이기적인 가치관’에 따라 살아갑니다. 형제 자매님, 자신을 먼저 생각할 때는 세상의 모든 것이 문제 덩어리로 보입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자신을 괴롭힙니다. 그러니 평화를 누릴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남을 먼저 사랑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세상이 기쁨으로 가득 찬 낙원으로 보입니다. 그에게는 모든 것이 은혜로운 선물이고 그래서 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형제 자매님, 제가 들었던 얘기 하나를 해드릴께요. 두 남녀가 사랑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결혼을 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남자는 외아들이었고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결혼을 하면 당연히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했습니다. 둘이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또 모두가 신자이기 때문에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결혼을 하고 나니까 문제는 전혀 달랐습니다. 시어머니는 자신이 사랑하던 아들을 며느리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사건건 며느리가 하는 일에 간섭을 하게 되고 미운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습니다. 며느리는 처음에는 이해를 하고자 노력했지만 그도 감정이 있고 참는 것도 한계가 있기에 자연히 다투는 일이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매일 고부간에 싸우는 소리가 집안을 매웠습니다. 며느리에게는 시어머니와 함께 하는 매일 매일의 삶이 고통이었습니다. 참다못한 며느리는 약국을 하는 친구를 찾아갔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하면서 다른 사람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시어머니를 서서히 죽일 수 있는 약을 좀 지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 친구는 여러 가지 말로 위로를 하면서 나중에 반드시 후회를 하게 된다면서 제발 그런 생각은 하지도 말라고 말렸습니다. 그러나 며느리는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없다면서 제발 도와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친구는 하는 수 없이 약을 지어주면서 약이 90봉지인데 매 끼니마다 밥에다가 한 봉지씩 뿌려서 다 드시게 하면 점점 건강해지는 것처럼 보이다가 30일 후에는 갑자기 죽게 되기 때문에 모두 심장마비로 죽은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일러주었습니다. 며느리는 당장 다음 날부터 시어머니 밥에다가 그 약을 뿌렸습니다. 그리고 공손하게 시어머니 방에 들고 들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지켜보면서 혹시라도 남길 기미가 보이면 온갖 아양을 떨면서 다 드시게 했습니다. 그리고 무어라고 잔소리를 하고 미워해도 이제 곧 저런 잔소리를 듣지 않을 것이니까 하면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웃으면서 대하고, 집안일도 시어머니가 하자는 대로했습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자신을 놀리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더욱 구박을 했습니다. 그런데 보름이 지나도 며느리의 태도가 변함이 없고 자신의 건강이 더욱 좋아지자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착한 며느리를 내가 왜 그렇게 미워했던가?”하면서 후회를 했고 며느리가 하는 집안일을 도와주었고 동네를 다니면서 며느리 자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그 집에서 다투는 소리가 나지 않았습니다. 며느리는 그런 시어머니의 행동이 노인네의 잠시 지나가는 변덕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몸이 많이 상했다고 보약을 지어 왔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는 “이렇게 자상하신 어머니를 내가 왜 그렇게 미워했던가?”하고 후회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은 후회였습니다. 약이 3봉지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내일 저녁이면 시어머니는 죽게 되는 것입니다. 며느리는 친구를 찾아가서 시어머니를 다시 살려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비록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들어도 언젠가는 또 시어머니를 죽이고 싶어질 것이기 때문에 지금 죽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낫고 또 그 약은 해독제도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며느리는 울면서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고부간의 불화는 시어머니가 나빴기 때문이 아니라 시어머니의 입장을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자신의 잘못 때문이었다면서, 제발 자상하신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그 약은 영양제를 갈아서 봉지에 넣은 것이라면서 걱정하지 말고 가서 남은 약을 마저 밥에 넣어드리라고 했습니다. 며느리는 친구에게 몇 번이고 감사를 표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그 후로는 결코 그 집에서 다투는 소리를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을 먼저 생각하던 사람들이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로소 참된 사랑을 하게 되었고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가정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참된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자신을 앞세우는 사람은 남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자신을 뒤로 밀치고 하느님을 앞세울 때 하느님을 사랑할 수가 있고, 이웃을 앞세울 때 이웃을 사랑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정이나 공동체 내에서 나 자신보다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께서 요구하신 사랑을 할 수가 있고, 그때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체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평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형제 자매님, 우리 각자가 하느님을 그리고 이웃을 앞세울 수 있도록 나를 뒤로 밀칠 수 있는 겸손의 덕을 구하면서 오늘 미사를 정성껏 봉헌합시다. 대구 신학교에서 안드레아 신부 드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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