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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에세이: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물은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宗敎哲學

by 巡禮者 2012. 8. 18.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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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철학 에세이 - 철학이 던지는 행복에 관한 열 가지 질문 1]

행복에 대해 진지하게 물은 순간을 기억하십니까?

최대환


“이성적 존재자인 인간은 본성상 행복하기를 갈망한다. 그러기에 인간이라면 누구나 행복을 원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성 토마스 아퀴나스, 「대 이교도 대전」, 4권 92장).


“우리는 행복하려고 태어났다”

얼마 전 오스트리아 빈 교구의 교구장이자 「가톨릭교회 교리서」 편찬에 결정적 역할을 하신 크리스토프 쇤보른 추기경께서 인간의 행복에 대해 쓰신 글을 읽다가 인상적인 대목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분에게는 소년시절에 들었지만 평생 생생하게 남아있는 강론 구절이 하나 있는데, 다름 아니라 병고에 있었음에도 친절과 유머, 친밀함과 사랑으로 기쁘게 본당 교우들을 돌보며 사시다가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그 시절 본당신부님께서 하신 “사람은 행복하려고 창조되었다.”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아름다운 말이 그에 맞갖은 인격과 삶을 담은 한 사람을 통해 증언되었을 때 한 소년의 마음은 기쁨과 자유로 벅차게 되었고 사제의 길에 응답할 확신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소년에게 성소란 바로 행복한 사람이 되어가는 길이며, 행복한 존재로 머무는 것이라는 것이 시작부터 분명했습니다. 뛰어난 토마스 아퀴나스 연구가이기도 한 추기경에게 이러한 행복의 길의 여정에서 ‘천사박사’의 철학과 신학은 현명한 동반자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성인께선 「신학대전」 2부에서 인간의 본성과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철학의 역사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탁월한 논고를 펼치시는데, 그 시작이 바로 인간의 목적으로서의 행복이기도 합니다.


행복, 단지 기쁨의 순간?

쇤보른 추기경이 행복이라는 말의 중요성을 깨달은 어린 시절의 체험을 회고하는 대목과 이에 이어지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행복에 대한 가르침을 풀이하는 대목을 찬찬히 읽으며 저에게 행복이란 개념은 어떤 것이었는지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추기경님과는 달리 저에게는 행복이 한눈에 사로잡힌 어린 시절 첫사랑 같은 대상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행복이 인생의 목적이라는 토마스 아퀴나스 성인의 가르침은 익히 알고 있었고, 성인께서 늘 그러하시듯 명쾌하면서도 치밀하게 전개하시는 「신학대전」의 행복에 대한 대목을 공들여 끈기 있게 따라 읽어갔던 경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소중한 ‘학문’의 기억이었을지언정 이 단어를 나의 삶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로 삼아 스스로에게 납득되는 정의를 내려보려 진력한 실존적 체험은 아니었습니다.

「신학대전」을 처음 접했던 신학교 시절 ‘인생의 목적’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늦가을 속절없이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며 감성과 이성을 다 끌어 모아 인생길에 대해 깊이 고민할 때 폐부를 찌르고 심금을 울리며 다가온 단어들 사이에 ‘행복’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삶의 의미나 소명, 투신, 성숙, 도야, 수덕, 비움, 버림, 섬김, 구도, 희생 그리고 죽음과 고통 같은 단어들이 일기장에, 묵상 노트에 그리고 신학교 독방 책장의 책제목에서 수도 없이 발견되고 있었습니다.

행복이라는 말은 인생의 한복판에서 만나는 필생의 주제어라기보다는 가끔씩 마음을 달래주는 위안의 언어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쩌다 만나면 흐뭇한 좋은 성품을 지닌 그냥 ‘아는 사람’ 같다고 할까요. 그와의 사귐의 기회가 스쳐지나가도 여전히 나의 일상은 움직여가듯, 내가 행복에 대해 정색을 하며 묻지 않는 것이 내 인생의 목적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에 중요한 결여가 되는 것이라 생각하진 않았을 것입니다. 아일랜드의 록그룹 U2의 노래 제목처럼, “With or Without You!(당신이 함께이거나 아니거나!)”

그렇다고 행복한 순간에 둔감한 삶을 산 것도, 그 말을 잊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다만 “행복해.”라는 말은 인생의 목적을 논하는 거창한 생각의 자리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조금 마음을 풀고 무심히 있을 때, 내게 다가오는 것들과 그냥 현재의 순간에서 자연스레 마주할 때, 불현듯 흐뭇한 미소와 함께 그냥 흘러나오곤 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행복한 것을 느낄 때, 그러니까 그들의 환해보이는 얼굴을 보고, 짐을 덜어놓은 것처럼 느껴지는 목소리를 들을 때 자연스럽게 ‘행복’이란 말이 나옵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이들과 담소하는 오후에 맘속으로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재즈 기타리스트 펫 메스니의 공연이나 피아니스트 머레이 페라이어의 공연에서 첫 소절이 흘러나오는 것을 듣는 순간 자연히 행복이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행복은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라기보다는 생각지 않게 만난 덤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붙잡아놓을 수 없는 기쁨, 그것이 바로 행복의 민낯이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입니다만, 그러나 이러한 행복관에서 세상의 선의 유약성에 대한, 그리고 기쁨의 덧없음에 대한 진지한 질문에 답할 여지를 발견하긴 어려울 것입니다.


행복을 진지하게 생각한다는 것

행복을 덧없는 일상에 숨겨진 파랑새라고만 보는 선입견을 넘어서 오히려 삶의 중심에 두고 평생 진지하게 물어야 할 항구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 또 내가 긴 시간 몰두했던 삶의 비밀과 무게를 담았다고 생각했던 단어들이 사실은 행복을 ‘둘러싸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신학생, 또 사제로서 철학을 공부한 지나간 수많은 새털 같은 나날들을 통해 왔습니다. 긴 ‘철학의 시간’의 열매는 철학이란 행복이 무엇인가 진지하게 물으려고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었습니다.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철학은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건넬 말이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알려주신 행복의 길, ‘행복 선언’ 역시 진지한 마음 없이는 다가설 수 없는 삶의 주제이기 때문에도 그렇습니다.

행복을 자연스럽게 다가온 에피소드 또는 흐뭇하고 설레는 마음의 느낌을 넘어서 명료하고 내용 있는 정의가 요구되는 ‘개념’으로 대면하는 것은 사실 매우 수고로운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진지한 사유를 시도하고 그것이 일상의 삶에 영향을 끼치도록 노력하는 것이 가치 있는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에 올 한 해 행복에 대해 생각하는 수고를 하려 합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궁극의 질문을 향해 다달이 던지는 질문들과 그에 대한 답을 가톨릭 철학의 전통과 오늘날의 사상과 문화와 우리의 삶에 대한 관찰을 통해 모색하는 시도들이 독자분들께서 행복에 대해 새로 생각하게 되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질문의 출발점에 선 ‘행복에 대한 철학 에세이’는 열 달 동안 질문하고 답하는 과정을 거쳐 한 해의 마지막에 다시 ‘행복한 삶’에 대한 조용한 성찰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때 도달한 곳의 마음의 풍경은 출발점과 별로 다르지 않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열 번의 변주되는 행복에 대한 질문들은 아마 우리 마음의 어딘가에는 흔적을 남겨놓으리라 생각
합니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골트베르크 변주곡(Goldberg Variationen)’은 아리아에서 시작하여 서른 번의 변주를 거쳐 다시금 아리아로 돌아옵니다. 그 변주들을 통해 듣는 이 안에 피어났던 감성적 정신적 울림들은 이제 곡의 마지막에 다시 한 번 같은 아리아를 들으며 차원이 달라진 숭고함과 감동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행복의 질문은 늘 같지만 그 울림의 깊이는 사실 늘 다른 것이라는 것을 믿으며 여행을 떠나길 권유합니다.


최대환 세례자 요한 - 의정부교구 신부. 교구 신학생 영성지도를 맡고 있으며 철학을 공부하면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연재하는 동안 행복에 대한 독자들의 견해와 질문을 열린 마음으로 기다린다(theophile@catholic.or.kr).

[경향잡지, 2012년 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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