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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청년 ‘노숙인에서 하버드로’

인물(People)

by 巡禮者 2015. 6. 8.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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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 청년 노숙인에서 하버드로

 

 

강찬씨 4년 전액장학금 받고 합격

 

부모 이혼 에 홀로 남겨져 노숙생활

거리서 만난 교사가 거처-학업 도와줘

 

                                      

  노숙인에서 하버드대생이 된 강찬 씨(오른쪽)NBC뉴스 기자인 로잔 콜레티 씨와 함께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 출처 NBC

 

 

17세에 부친과 함께 미국 뉴욕으로 건너왔다가 노숙인 신세가 된 한인 청년이 역경을 딛고 하버드대에 전액 장학금을 받고 입학한다.

 

NBC방송과 뉴스12 등은 6(현지 시간) ‘노숙인에서 하버드로라는 제목의 뉴스에서 강찬 씨(19)의 사연을 상세히 전했다. 뉴스데이 롱아일랜더뉴스 등 지역 언론도 수일 내 강 씨의 기사를 게재한다고 그가 재학 중인 고등학교 측은 밝혔다.

 

NBC에 따르면 한국에서 뉴욕 롱아일랜드로 건너온 부친이 곧바로 강 씨를 홀로 남겨 두고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그의 역경은 시작됐다. 강 씨는 NBC와의 인터뷰에서 부모가 이혼한 뒤 홀로 남겨진 것이 그리 크게 놀랍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거처할 곳이 마땅치 않아 월셋집을 계속 옮겨 다녀야 했다. 돈이 떨어지자 결국 거리에 나앉을 수밖에 없었다. 영어가 능숙하지 않은 상황이어서 그의 어려움은 더욱 컸다그런 그에게 구원의 손길을 보낸 이는 우연히 거리에서 그를 목격한 롱아일랜드 사우스헌팅턴 지역의 왈트위트먼고의 한 교사였다. 이 교사는 학교에서 어려운 학생을 지원하는 주민지원(빌리저 서포트)’ 프로그램을 통해 강 씨에게 거처를 구해 주고 학교를 다닐 수 있게 도와주었다. 유일한 교통수단이던 자전거를 고쳐 준 것이 무엇보다 고마웠다고 강 씨는 회상했다. 강 씨의 하버드대 입학이 확정된 이후에야 그가 노숙인으로 생활했던 사실이 언론을 통해 알려졌다. 그가 다닌 고교는 그의 성공 스토리를 홈페이지에 전하면서 그가 당시에 인생을 포기할까, 아니면 인생을 스스로 개척할까 고민하다가 결국 후자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그는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보였다. 피아노와 타악기를 능수능란하게 다뤘다. 음악실이 가장 편안한 장소였다고 한다. NBC강 씨는 매우 수줍어하는 학생이면서도 학업성적은 뛰어났다고 보도했다. 왈트위트먼고의 한 교사는 아이비리그(미 동부 명문 8개 대)에 모두 지원서를 냈다. 하버드대에서 4년 전액 장학금을 지원한다는 조건으로 합격 통보가 와 진학을 결정했다고 전했다. 학업성적과 음악에 남다른 재능을 인정한 것이다. 그는 9월 하버드대에 입학해 음악과 수학을 전공할 계획이다.


세계 최고 부자나라 미국에 왜 그리 노숙자가 많은지요? 저녁이면 어디서 모여드는지 뒷골목에 줄지어 잠자리를 준비하는 노숙자를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한국에서도 1997년 말 IMF경제위기가 닥치면서 많은 노숙자들이 생겨나 사회문제가 되고 있었죠. 그런데 미국에서는1980년대 레이건 정권 당시 사회복지 예산이 삭감됨에 따라 많은 노숙자(홈리스)들이 나왔다고 전해집니다.

그 열악한 노숙자 중에서 세계 최고의 하버드대학에 전액 장학생으로 입학한 두 명의 노숙인이 우리의 가슴에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한 사람은 노숙생활을 하며 하버드대에 합격한 한인 학생 ‘강찬’군입니다. 또 한 사람은 ‘카디자 윌리엄스’라는 흑인 소녀이지요. 그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시지요.

첫 번째, 아버지 따라 이민을 가서 다시 아버지에게 버림 받은 강찬 군 이야기입니다. 

「저는 17살이 되던 해에 부모님이 이혼하시면서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아버지는 저를 버리고 한국으로 돌아 가버렸습니다. 저는 처음부터 아버지와 함께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이혼한 이유도 아버지가 어머니를 학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떠난 후 미국에 있는 친척집에서 얹혀살았습니다. 하지만 친척들이 이사를 가면서 저는 다시 길바닥에 나앉게 되었습니다. 영어도 서툴고 노숙자 쉼터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잠잘 곳을 찾아다녀야 하는 절망스러운 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앞으로 미국에서 살아갈 날들이 두려웠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을 하면 무서울 게 없다’라고 다짐하면서 학생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학업만은 포기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으로 계속해서 공부를 할 수 있는 방법을 찾던 중 ‘윌트 위트만 고등학교’에서 노숙인 학생 지원 프로그램인 ‘빌리지 오브 서포트’를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저는 망설임 없이 이 프로그램에 지원했고 윌트 위트만 고등학교에서 학업을 이어갈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었습니다. 제 이야기를 전해들은 마을 주민들과 학교에서도 저를 도와주기 시작했습니다. 눈이 나빴던 저에게 안경을 사다주시기도 했고 제 유일한 교통수단인 자전거가 고장 났을 때 아무런 대가 없이 자전거를 고쳐주시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친구의 부모님께서 제가 집에서 같이 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셔서 더 이상 노숙자 쉼터를 찾아다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낯선 땅에서 가족에게는 버림받았지만 새로 만난 사람들의 도움으로 저는 계속해서 공부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올 해, 전액 장학생으로 하버드대 합격 통지서를 받았습니다. 저에겐 포기하거나 맞서 싸워야 하는 두 가지 선택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세상과 맞서 싸워 얻은 결과는 미국에서의 힘들었던 3년을 뒤로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저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두 번째, 카디자 윌리엄스’라는 흑인 소녀 이야기입니다.

「저의 어머니는 14살 때 차가운 쓰레기더미 속에서 저를 출산하셨습니다. 어머니와 전 뉴욕의 거리를 전전했고 무료급식과 쓰레기를 뒤지며 굶주림을 해소했습니다. 전 아무것도 모르고 그렇게 길거리에서 키워졌습니다.

값싼 모텔과 노숙자 쉼터를 찾는 일은 굉장히 드물었고 대부분 차가운 길바닥과 냄새나는 뒷골목에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제 집 주소는 언제나 뉴욕 어느 동네의 식당 뒷골목 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이름은 ‘노숙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전 공부가 좋았습니다. 가진 것 없는 제가 그나마 남들과 같아지기 위해 한권의 책을 더 읽고 한 번 더 생각하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노숙자들이 모여 사는 텐트촌에서 어머니와 저는 두 모녀가 감수해야 할 위험한 시선을 참아내며 필사적으로 학교를 다녔습니다. 12학년을 다니는 동안 자그마치 12 곳의 학교를 옮겨 다니며 공부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한 달에 다섯 권의 책을 읽었고 뉴욕의 모든 신문을 정독했습니다. 거리의 길바닥은 저에게 세상에서 가장 넓은 공부방이었습니다.

저에게 꿈이 생겼습니다. 대학에 들어가 저의 운명을 스스로 바꾸는 꿈. 우리 가족이 더 이상 남들의 비웃음 섞인 시선을 받지 않아도 되는 꿈. “노숙자 주제에 대학은 꿈도 꾸지 마라.” 사람들은 항상 이 같은 말을 했습니다. 저는 노숙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항상 머리를 단정하게 했고 옷도 언제나 깨끗하게 입었습니다.

이를 악물고 공부했습니다. 11학년이 되었을 때는 어머니께 이사를 하더라도 더 이상 학교는 옮기지 않겠다고 부탁했습니다. 대학에 가려면 저에 대해 잘 아는 선생님의 추천서가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새벽 4시에 일어나 학교에 갔고, 밤 11시가 되어서야 돌아갔습니다. 4.0에 가까운 학점을 유지했고 토론 동아리 참여, 육상 팀으로 활동하는 등, 다양한 학교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모든 곳이 저에겐 배움의 장소였습니다.

이런 저에게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복지단체들이 장학금으로 저를 도와주기 시작했고 사회단체에서 절 지켜봐 주었습니다. 절 믿는 사람들이 생긴 것입니다.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내 인생과 운명을 바꾸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리고 전 결국 브라운과 컬럼비아, 암허스트 등, 미전역의 20여개 대학으로부터 합격통지를 받아냈습니다.

“그녀를 합격시키지 않는다면 당신들은 제2의 미셸 오바마를 놓치는 실수를 하는 겁니다.” 카디자 윌리엄스! 노숙자였던 저는 지금 하버드의 4년 장학생입니다. “전 제 자신이 똑똑하다는 것에 언제나 자신감을 가졌어요. 남들이 ‘노숙자니까 그래도 돼.’라고 말하는 걸 너무나도 싫어해요. 전 가난이 결코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제 이름은 카디자 윌리엄스입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저를 노숙자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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