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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의 아버지 구티에레스의 죽음을 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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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24. 11. 2.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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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érrez, 192868~20241022)는 페루 출신의 철학자이며 신학자이며 도미니칸 수도회의 사제이다. 노트드담 대학교에서 교수로 있으며 여러 북미와 유럽의 대학교에서 방문 교수로 있다. 해방신학의 창립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사진 출처 = wikimedia commons)

 

“깊은 고통을 안고 오늘 밤 우리의 사랑하는 친구이자 창립자인 구스타보 구티에레스가 세상을 떠났음을 발표합니다. 우리는 그의 삶과 우정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사회에서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한 그의 활동은 계속해서 길을 밝힐 것입니다. 더 정의롭고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을 위한 노력에 감사드립니다, 구스타보!”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불리던 페루의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메리노(Gustavo Gutiérrez Merino)가 10월 22일, 96세로 이승을 떠났다. 구티에레스가 설립한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연구소’(Bartolomé de las Casas Institute)는 “사랑하는 친구”를 호명하며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마찬가지로 프란치스코 교종은 2018년, 구티에레즈의 90세 생일을 맞아 교회와 인류에 대한 그의 엄청난 공헌을 치하하며 감사의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다. 페루의 도미니코수도회는 리마의 산토도밍고 대성당에서 장례미사를 봉헌할 예정이라고 한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1928년 6월 8일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태어났다. 백인 아버지와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메스티조였던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했으며, 골수염 때문에 열두 살 때부터 열여덟 살까지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다. 구티에레스는 산마르코스 국립대학교 의대에 입학해 공부하다가 중간에 사제가 되기로 진로를 바꿨다.  페루 가톨릭대학교와 칠레의 산티아고신학교에서 공부하고, 유럽으로 건너가 벨기에 루뱅가톨릭대학교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한 뒤, 프랑스의 리옹 가톨릭대학교와 로마 그레고리안 대학교 등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그는 유학 중 칼 라너와 한스 큉, 스힐레벡스, 요한네스 메츠 등 유럽의 정치신학을 접할 수 있었다.

1959년 사제서품을 받은 구티에레스는 페루 가톨릭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고, 전국 가톨릭학생회 지도신부로도 활동했다. 이 당시 페루의 대학생들은 쿠바혁명에 고무되어 불의한 사회를 변혁하려는 열망에 가득찼다. 이 시기에 구티에레스는 카밀로 토레스와 체 게바라 등과 교재했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 그가 리마의 빈민지역인 리막(Rimac)에서 경험한 가난한 이들과 그들의 참혹한 삶은 ‘해방신학’을 탄생시키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1968년 열린 메데인 중남미주교회의에서 라틴아메리카 교회가 대륙의 과제를 ‘개발’에서 ‘해방’으로 전환하면서, 구티에레스가 1971년 펴낸 <해방신학>은 라틴아메리카 상황신학의 교과서처럼 읽혔고, 그는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연이어 <해방신학의 영성: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  <욥에 관하여>,  <생명의 하느님> 등을 발표하면서 세계적인 신학학술지 <콘칠리움>의 편집위원으로도 일했다.

한편 후원자이며 보호자였던 리마교구의 란다수리 추기경이 사망하자, 구티에레스는 교구를 떠나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구티에레스는 1992년 <라스 카사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를 출판했는데, 그가 그토록 존경한 16세기 라틴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권을 위해 투쟁한 바르톨로메 데 라스 카사스 신부가 도미니코회였기 때문이다. 그가 유럽에서 공부할 때 영향을 받은 이브 콩가르, 세뉘, 스힐레벡스 등이 모두 도미니코회 소속이기도 했다.

그의 신학적, 영성적 문제 의식은 “어떻게 이방인의 땅에서 하느님을 찬미할 것인가?” 하고 묻는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우물에서 마신다>는 책에 잘 드러나 있다. 이 책의 서문은 유명한 영성작가 헨리 나웬이 썼다. 이 책에서 구티에레스는 이렇게 묻고 있다.

“하느님을 ‘찬미’하지 않고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드리지 않고 기도가 없다면 크리스찬 생활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한 역사적 상황 속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부르는 찬미가가 있으며 바로 이 찬미가로부터 그들이 하느님의 현존과 부재를 깨닫게 된다. 라틴아미리카를 배경으로 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불의하고 제 명대로 못 사는 죽음의 세계 가운데서 어떻게 하느님에게 생명의 선물에 대한 감사를 드릴 수 있는가? 우리의 형제자매가 고통당하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우리가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을 줄 안다고 기쁨을 드러낼 수 있을까? 온 국민의 고통이 우리의 목구멍을 막아놓는데 어떻게 우리가 찬미가를 부를 수 있을까?”

메데인 주교회의는 하느님의 부재를 느끼게 하는 불의한 상황을 “제도화된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라 했고, 이런 상황을 푸에블라 주교회의는 “비인간적”이며 “복음에 반대된다”고 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피난민’이 아니라 ‘온전한 주민’으로 살게 하셨는데, 가난한 이들은 자신들의 땅에서 ‘이방인’처럼 착취당하며 살고 있다고 구티에레스는 말했다. 구티에레스가 말하는 ‘해방신학’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투쟁이 “사회적이며 역사적인 차원”을 얻어야 하고, 자기 자신의 권리를 찾으려는 민중들의 투쟁은 “하느님을 만나러 가는 길 위에 있다”고 했다. 그 길에서 하느님을 고백하는 게 ‘해방신학’이다.


                                  구티에레스 신부의 한글 번역서들. (사진 제공 = 우리신학연구소)

 

구티에레스는 하느님과의 인격적 만남을 강조하는데, 1982년 6개월간 리마에 머물면서 구티에레스와 교제했던 헨리 나웬은 그가 만난 ‘새로운 그리스도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주님에 대하여 말하는 방법은 대단히 직접적이고 두려움이 없는 것이어서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벌이는 그들의 사목활동은 단순한 개념이나 이론에 따른 것이 아니라 정의와 평화를 위한 투쟁의 한가운데 있는 사랑하는 하느님의 현존을 깊이 인격적으로 체험한 데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거기에는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이 있다. 그곳에는 따뜻한 형제애와 너그러움이 있다. 거기에는 겸손과 보살핌이 있고, 이러한 은총의 선물들은 고통받는 사람들 가운데서 당신의 증인이 되라고 불러 주시는 주님에게서 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해방신학은 단순한 ‘정치신학’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에 앞에 선 인간의 당연한 응답이 어떠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지침이고, 불의한 사회구조 안에서 고통받는 민중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행할 수 있는 ‘영적 투쟁’이 왜 사회적 역사적 차원을 포함해야 하는지 알려준다. 한 번도 자신을 ‘해방신학자’라고 표명한 적이 없지만, 아니 그렇게 표명할 필요도 없지만, 아르헨티나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종의 행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해방신학은 이미 라틴아메리카의 공식적 신학이며, 새로운 도전을 세계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던지고 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우상을 섬기고 있는 교회를 향해서도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는 해방신학은 오늘도 “사랑하기 위해서 자유롭게 되라”고 말하고 있다.

구티에레스는 <해방신학> 마지막 구절에서 교회를 향해 ‘중대한 질문’을 던진다.

“가난을 거부하고, 가난에 대항하기 위해서 스스로 가난해질 때에 비로소 교회는 ‘정신적 가난’이라는 것을 설교할 수 있다. 정신적 가난이란 인간과 역사가 하느님이 언약하신 미래에 자기를 개방함이다. 그렇게 함으로써만 교회는 인간에게 있는 모든 불의를 고발하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고, 그 외침에 귀기울이게 만들 것이다. 또 그렇게 함으로써만 교회는 해방의 말씀, 참다운 형제애의 말씀을 설교할 수 있을 것이다. ... 교회로서는 가난의 증언이야말로 교회의 사명의 정당성을 입증하는 데 절대 필요한 표징이다.”

우리 시대의 증언자이며 예언자였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죽음을 바라보며, 그의 귀한 깨달음이 우리 안에서 허언이 되지 않도록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에 대한 새로운 각성이 필요할 것이다. 교회는 여전히 더디지만 전진하고 있으며, 구티에레스가 육신을 벗고 더 자유롭게 우리 안에 그 영이 스미도록 간구하게 되는 오늘이다. 주님, 그에게 축복을 내리소서. 구티에레스의 영혼을 온전히 당신 안에 받아들이소서. 아멘.

한상봉    2024.10.23

출처 : 가톨릭뉴스 지금여기(https://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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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신학의 창시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메리노(Gustavo Gutiérrez Merino) 신부는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해방신학은 인간에 의한 인간 지배 때문에 생겨나는 모든 착취와 억압에서 인간을 해방하려는 신학이다. 즉,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 투쟁과 희망을 통해서 그리스도교 신앙을 해석하고 불의한 체제를 지탱시키는 이념과 사회를 비판하는 신학이다. 해방신학에는 라틴아메리카 현실, 그 지역에 사는 신도들의 희망과 유토피아가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교황청 신앙 교리성 장관 라칭거 추기경을 비롯해 라틴아메리카 보수 주교들이 앞장서 해방신학을 비판하고 보프 신부와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를 교황청으로 소환해 해방신학의 신학적 위험과 오류에 대해 경고했다. 그 후 언론은 교황청이 해방신학에 ‘사형선고’를 내렸다는 선정적인 제목들을 단 기사들을 쏟아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메리노(Gustavo Gutiérrez Merino) 신부

  

  해방신학에 대한 명예회복과 재평가

  2013년 9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와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는 2014년 2월 교황청 신앙 교리성 장관 뮐러 추기경의 저서 『가난한 이를 위한 가난: 교회의 임무』 출판기념회에 연사로 깜짝 등장했다. 2013년 신앙 교리성 장관 게이하르트 루드비히 뮐러 장관은 『가난한 이들의 편에 서서: 해방신학』과 이년 뒤인 2015년 『가난한 교회와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를 출판했다. 이 책들 속에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글들이 실려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뮐러 추기경의 책의 서문을 써주었다. 이러한 교황청 내부의 기류의 변화 때문에 일부 언론들은 한때 신앙 교리성의 감시와 단속 대상이던 해방신학의 명예가 회복되었고 더 이상 과거의 그늘 속에 머물지 않게 됐다고 평가했다.

  이런 교황청의 기류 변화는 2012년 베네딕토 16세가 독일의 대주교 뮐러를 신앙 교리성 장관으로 임명한 이후에 나나타기 시작했다. 뮐러는 베네딕토 16세와 같이 독일 출신 엘리트 신학자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러나 뮐러는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와도 절친한 사이였다. 그는 페루를 방문해서 구티에세스 신부의 강의도 들었고, 그가 사목하던 빈민지역에 가서 가난한 이들과 대화하기도 했다.

 

그는 라틴아메리카의 가난한 이들이 어떻게 사는지 목격했다. 그의 신학에도 이런 경험들이 녹아있다. 뮐러 추기경은 해방신학과 교황청의 화해 분위기를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그러나 교황청과 해방신학 사이에 화해 분위기를 만든 것은 가난한 이들의 삶과 고충을 잘 알고 교회를 갱신하려는 남미 출신의 교황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새 교황은 즉위 직후부터 계속 ‘가난한 자들의 교회’를 강조했고, 자신의 새 이름도 가난한 삶을 살았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이름을 선택했다. 새 교황의 등장과 함께 해방신학의 긍정적인 측면들이 다시 부각됐다. 베를린 장벽 붕괴되고 소련이 해체되면서 직접적인 공산주의의 위협이 사라진 것도 해방신학을 이념의 색안경을 끼고 보지 않도록 하는데 일조했다. 이런 변화가 그동안 교회 내부와 외부에서 박해를 받아왔던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를 재조명하도록 만들었고, 그의 해방신학을 새롭게 평가하도록 하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생애

  그는 1928년 6월 8일 페루의 수도 리마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병약해 자주 병석에 누어있었고, 골수염 때문에 열두 살 때부터 열여덟 살까지 휠체어 신세를 지기도 했다. 의사가 되고자 산마르코스 국립대학교 의대에 입학해 5년 간 수학했으나 중간에 신부가 되기로 마음먹고 진로를 바꾸어 신학교에 입학했다. 페루 가톨릭대학교와 칠레의 산티아고신학교에서 기초적인 철학과 신학을 배운 뒤 유럽으로 건너가 벨기에 루뱅가톨릭대학교에서 철학과 심리학을 공부했다. 그 후 프랑스의 리용 가톨릭대학교와 로마 그레고리안대학교를 비롯한 여러 대학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공부했다. 1959년 사제서품을 받았고, 이듬해 모국으로 돌아와 페루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과 사회과학을 가르치는 교수가 되었다. 전국 가톨릭학생회 지도신부로도 활동했다. 이 시기 라틴아메리카 대학생들과 젊은이들은 쿠바혁명의 영향으로 부조리한 사회를 변혁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의 사회비판과 문제제기는 젊은 구티에레스에게 많은 성찰의 과제를 제공했다. 또한 그가 리마의 빈민지역에서 사제로 봉사하면서 접한 가난한 이들의 현실도 해방신학의 탄생의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1971년 20세기 신학사에 기념비 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해방신학』이 출판되면서 구티에레스는 세계적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연이어 『우리의 우물에서 생수를 마시련다』, 『욥에 관하여』, 『생명의 하느님』 등 수많은 신학 작품을 출판했다. 그의 명성이 커지면서 세계적인 학술지 『콘실리움』을 비롯한 여러 학술지의 편집위원 역할을 맡았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1985년 기존 저작들을 가지고 프랑스 리용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또한 네덜란드 니메가대학(Nimega)이나 예일대학과 같은 유수의 대학에서 명예박사학위를 받았다. 프랑스와 페루 정부, 스페인왕실에서 수여하는 국제적 위상과 전통을 지닌 상들도 여러 차례 수상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후원자요 보호자였던 리마교구의 란다수리 추기경이 사망하자 구티에레스는 도미니코회에 입회했다. 교구 사제에서 수도회 소속 사제가 된 것이다. 그가 다른 수도회가 아닌 도미니코회에 들어간 것은 16세기 원주민 인권을 수호하기 위해 싸운 바르톨로메 데 라스 까사스 신부를 존경했기 때문이다. 그는 1992년 도미니코회에 입회하기 전부터 이미 『라스 카사스: 예수 그리스도의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와 같은 대작을 저술하며 도미니코회의 영성에 심취해 있었다. 또한 유럽에서 유학할 때 이브 콩가르, 세뉘, 쉴레벡스 등 도미니코회 소속 교수들에게 받은 학문적 영향도 이 수도회로 입회하는데 중요하게 작용했다. 그는 도미니코회 소속 신부가 된 후부터 주로 미국과 유럽에서 활동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가 이해한 라틴아메리카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는 유럽 유학 경험으로 인해 조국 페루와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그에게 라틴아메리카는 가난하고, 저발전 되고, 종속된 지역이며 사회적 불의와 양극화로 분열된 땅이었다. 1964년 이후 국가 발전을 이룩하겠다는 구실로 대부분의 남미 국가에는 군사정권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국가의 안보를 최우선으로 삼는 국가안보이론이 미국의 지원 하에 지배적 이념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는 억압당했고, 정부에 의해 인권 유린이 자행되었다. 국가안보이론은 국민 전체의 안위를 위한 것이 아닌 군사정권의 안위와 반공세력을 진압하기 위한 구실로 작용했다. 쿠바혁명의 영향으로 좌파 게릴라들이 전 대륙에서 출현했고, 자본주의 체제의 야만성을 고발하는 비난도 증가 일로에 있었다. 서구의 발전주의 논리를 따라 산업화에 박차를 가했지만 성과가 미비했고, 사회 경제적 불평등과 불의는 개선되지 않았다. 정책입안자들은 식민적 유산 탈피나 토지개혁과 같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서구를 모방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산업화를 달성하기 위해 농촌의 문제를 등한시 한 것이다. 지방과 농촌에 대한 방치는 결국 농민과 원주민들의 생활 악화를 초래했다. 라틴아메리카는 인권 유린과 계급 간 대립이 격화되면서 불의와 폭력이 만연하게 되었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당시 유행하던 종속이론의 전망을 수용했다. 종속이론이 근대화 이론과 발전주의의 환상을 깨뜨리는데 유용하다고 믿은 것이다. 군더 프랑크는 라틴아메리카의 저발전이 선진자본주의 국가가 발전함으로써 발생한 역사적 부산물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즉 발전과 저발전이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내부 모순의 필연적 결과이며 동시적 현상임을 강조한 것이다.

 

  구티에레스도 1960년대 분위기를 따라 ‘발전신학’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곧 라틴아메리카 민중이 열망하고 또 필요로 하는 것은 ‘발전’ 보다는 ‘해방’이란 것을 깨달았다. 1968년 7월 페루 사회의 변혁과 혁신을 주장하며 조직된 오니스 사제단 전국모임에서 구티에레스는 최초로 해방신학의 기본 주제들과 개념들을 제시했다. 최초의 라틴아메리카 고유 신학이 탄생한 것이다. 그의 신학에 영향을 미친 것은 무엇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쇄신과 적응’ 정신이다. 이 공의회의 핵심 문서 중 하나인 ‘사목헌장’은 오랫동안 세계와 유리된 채 고립되었던 가톨릭교회가 세계와 대화하고 변화된 현실에 적응하려는 의도를 드러낸 문서였다. 이런 공의회의 정신으로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을 분석한 문서가 1968년 제2차 라틴아메리카 주교회의 총회 후에 나온 『메데진 문헌』이다. 이 분석을 따라 구티에레스도 1960년대와 1970년대 라틴아메리카를 불평등, 가난, 억압 등 ‘구조화된 불의’가 만연한 대륙으로 묘사했다. 그는 이런 현실이 결국 ‘제도화된 폭력’을 초래한다고 보았다. 그는 죄를 개인적인 문제로만 치부하지 않고, 사회적·집단적 차원에서도 조명했다. 라틴아메리카는 집단적 의미의 죄가 만연한 지역이다. 따라서 그에게 이 대륙은 ‘해방자 예수 그리스도’가 더욱 필요한 지역인 것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신부는 이런 라틴아메리카의 현실에서 가난한 이들과 만났고, 그들의 절규를 들으면서 해방신학적 성찰이 시작되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방신학의 90%는 가난한 이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교회와 그리스도교인은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과 연대를 통해 해방의 영성을 실천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성서의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버림받은 자, 배제된 자, 가난한 자들을 우선적으로 불러 모으시고 먼저 사랑하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구티에레스 신부는 또한 라틴아메리카의 가난, 불의와 같은 죄에서 벗어나려면 정치적 역할이 중요하다고 역설했다. 정치가 인간 삶과 현실을 포괄하는 총체적 영역이며, 해방의 특권적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는 자신의 신학에서 라틴아메리카 사상가와 작가들도 자주 인용한다. 특히 페루 출신의 마리아테기와 아르게다스는 그에게 깊은 영향을 끼쳤다. 그는 자신의 저작 『해방신학』을 페루 소설가 호세 아르게다스에게 헌정했다. 아르게다스가 다룬 원주민과 가난한 이들의 삶 속에서 또 다른 라틴아메리카의 이면을 보았기 때문이다.

  해방신학은 무엇보다 이론과 실천, 신앙과 활동이 분리되지 않은 실천신학이다. 세계와 역사, 현실에서 출발하는 신학을 전개하면서 철학보다는 사회과학을 신학의 보조학문으로 삼고 새로운 방법론으로 ‘새로운 신학하기’를 시도했다. 그가 사변적이고 추상적인 신학에서 탈피해서 신앙과 정의를 위한 투쟁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제시한 신학자란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구스타보 구티에레스의 해방신학은 1960년대 라틴아메리카의 불의한 현실과 인간의 존엄성이 유린되는 상황에서 탄생한 신학이다. 그 시대 가난한 이들의 절박한 요구가 무엇이고 그들의 희망, 유토피아가 무엇인지를 다룬 신학이다. 이 신학은 80년대를 거치면서 해방의 필요성을 공유하는 생태신학, 여성신학, 원주민신학, 경제신학 등 다양한 신학에 영감을 주었다. 80년대 이후 지배적 패러다임이 된 신자유주의 체제는 라틴아메리카에서 계속적으로 가난과 불평등을 초래하고 있다. 가난한 이들이 존재하는 한 가난한 이들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강조하는 구티에레스 신부의 해방신학은 계속해서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에게 해방의 영감을 제공할 것이다. 

 

출처  : 

절망의 라틴아메리카에서 희망을 선포한 해방신학자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 인물로보는 라틴아메리카 | LAKIS

 

절망의 라틴아메리카에서 희망을 선포한 해방신학자 -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 인물로보는 라틴

조영현 [서울대학교 라틴아메리카연구소 HK연구교수]  해방신학의 창시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스 메리노(Gustavo Gutiérrez Merino) 신부는 라틴아메리카 ‘해방신학의 아버지’로 불린다. 해방신

www.laki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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