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첸시오, 고니시에 의해 일본에 보내져 세례…세스페데스 신부도 조선 방문
임진왜란의 왜장 가운데 천주교 신자들이 많았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으로 아우구스티누스를 받았고 조선정벌에 참여한 아리마주, 오무라주, 야마쿠사주, 대마도의 도주들도 천주교 신자였다. 특히 대마도주 소 요시토시는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고니시의 딸 마리아(세례명)와 결혼했다.
고니시의 진영에 조선인 포로들이 많았다. 고니시는 그중 소년 2명을 딸 마리아에게 맡겼다. (W.E. 그리피스는 ‘은자의 나라 한국’에서 마리아를 고니시의 아내라고 서술했다. 국내에선 마리아를 고니시의 딸로 소 요시토시의 아내로 본다.) 마리아는 고니시가 보내온 조선 아이 둘을 자기의 신앙에 따라 가르쳤다.
두 아이 중 큰 아이는 나이 13세로 아버지는 조선의 관리였다. 아버지가 전쟁터에 나가면서 어린 자식을 은신처에 숨겨두었으나 어린 아들은 은신처 근처에서 벌어진 전투를 구경하다 고니시 군에 포로로 잡히게 된 것이다.
마리아는 큰 아이를 교토이 있는 제주이트학교에 보냈다. 이 아이는 학교를 다니면서 성장했고, 1603년에 빈첸시오(Vincentio)라는 세례명으로 신자가 되었다. 제주이트 교단의 기록에 그의 이름이 ‘Caun’으로 나타나는데, 그의 성씨가 권씨일 가능성을 보여준다. 권 빈첸시오는 조선인 최초의 카톨릭 신자였다.
그리피스에 따르면, 빈첸시오는 나가사키로 끌려온 조선인 포로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문답을 하면서 종교활동을 시작했다. 그가 33세가 되던 해에 제주이트 교단은 그를 조선에 파견하려고 했다. 그 무렵엔 일본에선 권력이 도쿠가와 막부로 넘어가 종교박해를 강화하던 때였다. 제주이트교단은 빈첸시오를 조선으로 직접 파견하지 못하고 베이징으로 가서 조선으로 들어가도록 했다.
베이징에 온 빈첸시오는 4년을 머물면서 조선에 들어갈 기회를 엿보았다. 하지만 전쟁후 명의 세력이 약해진 틈을 타 만주를 차지한 후금(후에 청)이 그의 조선 입국을 방해하는 바람에 빈첸시오는 조선에 들어가지 못했다. 1620년 빈첸시오는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는 몰래 선교활동을 하다가 도쿠가와 막부에 체포되어 1625년 44세의 나이로 순교했다. 빈첸시오는 조선인 최초의 예수회 수사로서, 일본의 순교 복자 205위 가운데 한국 사람으로서 기억되고 있다.
진해 세스페데스 공원 /창원시 블로그
한편 왜장 고니시는 평양성까지 진격했다가 명군의 참전과 조선의병들의 궐기에 후퇴한 후에 경남 창원의 곰내(웅천)에 진지를 틀고 부대를 주둔시켰다. 초기 침공 때 의기양양하던 기세도 꺾였고, 병사들은 풀이 죽어 있었다.
그는 일본에 있는 제주이트 교단에 편지를 보내 선교사를 보내달라고 부탁했다. 교단은 스페인 출신의 그리고리오 데 세스페데스(Gregorio de Cespedes)와 푸탄 에이온(Eion)이라는 신부를 붙여 조선에 파견했다. 1593년 12월 27일 세스페데스는 서양인으로는 처음으로 부산에 도착, 조선을 밟았다.
그리피스에 따르면, 두 스페인 신부는 1594년 이른 봄에 고니시의 사령부가 있는 곰내에 이르렀다. 두 성직자는 천주교 신자인 왜병들에게 복음을 전파했다. 그들은 이 성에서 저 성으로, 이 막사에서 저 막사로 다니며 찬송가를 부르고 병사들에게 설교를 하고 신앙고백을 받고 십자가의 성호를 그리는 의식을 거행했다. 두 신부는 왜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세스페데스 일행은 1년 만에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고니시는 스페인 신부의 조선 방문 사실을 비밀리에 부쳤다. 하지만 독실한 불교 신도이자 고니시의 경쟁자였던 가토 기요마사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가토는 고니시가 역모를 꾸몄으며, 제주이트 교단이 그 배후에 있다고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 모함했다. 히데요시가 카톨릭을 제거하려고 하던 차에 가토의 고자질이 알려지자, 고니시는 히데요시를 찾아 반역을 한 적이 없다고 극구 변명해야 했다. 히데요시는 모른척 하고 고니시의 변명을 들어주었고, 세스페데스도 위기를 넘길수 있었다.
세스페데스는 조선에 왔을 때 조선인들을 만나 포교를 했다는 근거는 희박하다. 다만 나가사키를 중심으로 조선인 포로를 대상으로 선교를 하고 세례를 주었다고 한다.
창원시는 고니시 유키나가를 따라 조선에 파견되었던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를 기려 세스페데스 공원을 조성했다.
진해 세스페데스 공원 스페인 광장 /창원시 블로그
한편 빈첸치오와 별도로 도미니크 교단은 조선으로 신부를 파견해 선교활동을 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피스에 따르면, 1618년 스페인인 후앙 드 세인트 도미니크(Juan de saint Domimique)이 조선에 파견될 선교사로 뽑혔다. 그는 조선어를 습득하며 교단의 다른 두 사람과 함께 조선에 들어갈 배를 띄웠다. 하지만 알수 없는 이유로 그들은 조선에 상륙하지 못하고 일본으로 되돌아 왔다. 그들은 이듬해인 1619년 도쿠가와 막부의 박해를 받아 옥사했다. 이로써 임진왜란 직후에 추진된 카톨릭의 조선 선교는 중단되었다.
출처 : 아틀라스뉴스(http://www.atlas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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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 빈첸시오 - 조국의 복음 전파에 힘썼던 최초의 예수회 수사
1867년 7월 7일 교황 비오 9세께서는 일본의 순교자 205명을 복자로 선포하셨다. 그런데 그 가운데는 열 명의 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 때 일본군에게 강제로 잡혀가 일본에서 살다가 순교한 고결한 신앙의 선조들이다.
명나라를 틸 테니 길을 내달라는 당치도 않은 명분으로 일본은 조선을 침략했다. 이렇게 시작된 임진왜란은 정유재란까지 이어져 7년을 끌었다. 집과 마을은 불타고 무수한 생명이 싸움터의 고혼이 되었다. 강산은 피로 물들고 왜군의 발굽에 짓밟힌 곳마다 가슴 아픈 한숨이 서리고 통한의 눈물이 고였다. 낯선 땅 일본으로 끌려가서 망향의 여생을 살았던 사람만도 오만 명이 넘었고 일본군에 잡혀 포르투칼 상인에게 노예로 팔려간 사람들의 수도 헤아릴 수 없어 이국 깡에서 서럽게 살아가며 기억 속에서 잊혀졌다. 그러나 그 피눈물 어린 삶을 영광으로 빛나는 신앙생활로 승화시켜 주옥같은 생애를 남긴 이들이 있어 우리를 숙연하게 한다. 권 빈첸시오(1580-1626년)는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빈첸시오의 아버지는 조선의 고관이었다. 그는 전선으로 나가면서 열세 살의 어린 자식인 빈첸시오가 목숨을 보존할 수 있도록 은신처에 숨겨두었다. 그러나 호기심 많은 어린 아들은 두려움도 모르고 은신처에서 나와 싸움터를 구경하다가 곧장 대장군인 고니시 유키나가의 천막까지 가게 되었다.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세례명이 아우구스티노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자신의 천막으로 온 전쟁 고아를 보고 불쌍히 생각하여 그의 딸이며 또한 열심한 천주교 신자인 마리아(대마도주 소 요시모토의 부인)에게 보냈다. 마리아는 아버지가 전선에서 보낸 어린아이를 잘 보호하며 교회에 맡겨 교육시켰다. 그 아이는 1603년 규슈의 시키 섬에서 빈첸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고 예수회 신학교에 입학했다. 이렇게 하여 전쟁 중에 버려져 이름도 잊혀버렸던 어린아이는 권 빈첸시오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빈첸시오의 성은 일반적으로 권씨로 보지만 강씨로 보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그의 일본 이름은 '가베아'라 했다.
권 빈첸시오는 예수회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고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깊이 잠긴 채 믿음직한 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는 자신을 예수님 안에서 거듭나게 해준 신부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의 마음으로 그들 곁에 머물렀고, 신부들의 포교와 사목의 여행길에도 항상 동행했다.
이때 일본에서는 임진왜란을 일으켯던 도요코미 히데요기의 뒤를 이른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그의 후계자들이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계속하였다. 천주교에 대한 금교령이 내려지고 신부와 수사들이 살해당하고 여러 곳의 성당이 파괴되더니 마침내 1637년에 시마바라 반도에서 3망 7천여 명의 신자들이 참혹하게 죽음을 당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일본에 진출해 있던 예수회에서는 일본에서 박해가 심해지자 동양 전교의 새로운 전초기지를 얻으려고 권 빈첸시오에게 그의 조국인 조선에 들어가 가능성을 확인해 보게 하였다. 빈첸시오는 바다를 건너 조선 입국을 시도하였으나 임진왜란을 치른 뒤 조선정부의 해안감시가 철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발길을 돌려 중국으로 건너가 육로를 통해 조선 입국을 시도하면서 빈첸시오의 젊은 가슴은 사도적 열의에 불타고 조국에 복음을 전파하려는 꿈으로 부풀어올랐다. 북경과 압록강 변경을 오가며 7년을 한결같이 애썼지만 그의 꿈은 북만주의 고아야에서 외롭게 피어올랐을 뿐 결국 뜻을 이루지 못했다. 누루하치의 여진족이 세운 후금국과 조선의 긴장상태가 계속되어 그의 뜻을 펼치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비록 꿈에 그리던 조국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조선인으로서 조선의 선교를 위해 전루 14년 동안 땀을 흘린 역사상 최초의 인물이 되었다.
1620년 일본으로 다시 돌아간 권 빈첸시오는 시미바라 반도에 숨어서 졸라(Zola) 신부와 함께 일본인과 임진왜란으로 억울하게 잡혀온 수많은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며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열렬한 증거의 삶을 살았다. 조선 사람들에 대한 그의 감화력은 놀라웠으며 동포들은 그의 모범과 격려에 크나큰 위안을 얻었다.
권 빈첸시오는 자신을 예수님안에 다시 태어나게 해준 데 대한 애정과 감사의 정이 깊어 곁을 떠나지 않으려 했던 사제들과 함께 1625년 체포되어 시마바라의 감옥에 끌려갔다. 그곳은 특히 천주교 신자들을 괴롭히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그 감옥이 아무리 끔찍했어도 권 빈첸시오를 놀라게 하지는 못했다. 오히려 감옥의 온갖 형벌과 가혹한 박해를 극기와 자기 정화의 계기로 삼았다. 그에게 심문과 형벌은 영신수련의 기회가 되었을 뿐이다.
그의 거룩한 극기의 삶은 포악한 포졸들마저 감동시켰다. 옥졸들이 빈첸시오를 존경하며 스스로 유순한 사람으로 바뀌자 관장은 놀라워하며 곧 다른 옥졸로 바꾸었다. 그러나 바뀐 옥졸들마저 잇달아 수감자의 천사 같은 모습에 감동하여 빈첸시오를 따라 신앙을 갖게 되자 관장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관장은 자신의 친척이 되는 무관에게 수감자 감시를 맡겼는데 그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사나운 짐승과 같은 자로서 천주교를 극단적으로 미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무관이 권 빈첸시오와 동료 순교자를 만난지 일주일이 지나자 그 태도가 놀랍게 바뀌어 온순하기 짝이 없게 되더니 또 일주일 뒤에는 천주교 신자가 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 놀라운 사건이 일어나자 관장은 분하게 여겨 그 배신감을 갚기라도 하듯 무관을 혹독하게 다루었다. 그러나 무관은 이제 짐승과 같았던 과거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이렇게 그의 신앙을 고백하였다. "저의 직책과 재산을 박탈하고 목숨마저 빼앗을 수 있을지라도 저의 정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니, 저는 천주교인으로 살고 또 천주교인으로 죽겠습니다."
관장은 빈첸시오와 그 동료들의 놀라운 감화력을 막으려고 증거자들을 따로 떼어 서로 격려하지 못하도록 조치하고 더욱 가혹한 형벌을 주기로 결심했다. 빈첸시오는 가혹한 형벌과 온갖 달콤한 유혹과 회유를 받았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나는 천주교인입니다. 결코 배교는 못하겠습니다." 관장은 권 빈첸시오의 옷을 벗기고 찬바람에 내놓고 단근질을 하며 참혹한 학대를 계속했다. 관장은 이성을 잃고 직접 곤장을 들고치기도 했다. 권 빈첸시오는 이 무서운 형벌을 받으면서도 조용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관장의 분노는 극에 달하여 독약을 먹여 피를 토하게 했지만 그의 잔잔한 미소는 가시지 않았다. 누구도, 어떤 가혹한 형벌도 거룩한 증거자 권 빈첸시오를 꺾을 수는 없었다. 빈첸시오는 추위를 막을 수 없는 엉성하고 작은 오막살이에서 24일 동안을 먹지도 못하고 내버려진 채 고통을 겪으며 기진해 갔다.
일본 왕은 이 거룩한 증거자를 나가사키로 옮겨 화형에 처하게 하였고, 1626년 6월 20일 졸라 신부, 토래 신부, 파체코 신부 등과 함께 화형이 집행되었다. 권 빈첸시오는 화형이 집행되기 며칠 전에 감옥 안에서 당시 예수회 일본 관구장이던 파체코 신부에게 자신을 예수회에 입회시켜 달라고 청하였다. 신부는 그의 청을 받아들여, 이미 사형이 확정되었기에 주님께 자기 제헌을 하게 될 그 자리에서 그의 서원을 받았다. 이로써 권 빈첸시오는 정식 수사로서 순교자가 된 것이다. 조국에 복음 전파를 시도했던 최초의 한국인이며, 최초의 예수회 수사인 그는 지금 일본의 순교 복자 205위 가운데 한국 사람으로서 자랑스럽게 기억되고 있다.
<경향잡지, 1999년 5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교 교수)>
그레고리오 세스페데스(Gregorio de Céspedes, 1551-1611)는 선교 사업을 위해 한국에 간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였다. 그는 1593년 12월 27일 부산에 도착했다. 그는 기리시탄(크리스천) 다이묘인 코니시 유키나가가 지휘하는 군대와 동행했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휘하의 일본이 한국을 처음 침략했을 때 일본군에게 개종했습니다. 그가 조선인과 직접 교류했다는 증거는 거의 없지만, 일본군에 포로로 잡혀 있던 조선인들 사이에서 개종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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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6년 6월 20일. 일본 나가사키의 니시사카 언덕에서 아홉 명이 화형을 당했다. 그런데 그 속엔 조선인이 포함되어 있었다. '권'씨 성을 가진 조선 남자 '빈센트 권'이었다. 그는 왜 바다 건너 일본에서 화형이라는 무서운 형벌을 받고 죽었을까? KBS1TV '역사스페셜'이 8일 오후 10시 그 내막을 파헤친다.
우리 역사에서 최초의 천주교 신자는 1784년 세례를 받은 이승훈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보다 무려 200년가량 앞선 시기에 천주교 신자가 된 조선인이 있다. 1617~1632년에 일본에서 순교한 사람들을 작성한 '205인 순교복자 명단'. 이 명단엔 '빈센트 카운(권)'이라는 이름의 조선인이 있다. 그는 도대체 누구이며,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갔을까?
기록에 의하면 빈센트 권은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에게 잡혀 일본으로 건너간다. 그를 일본으로 데려간 사람은 스페인 신부 세스페데스. 그는 천주교도였던 고니시 유키나가의 요청으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이었고, 세스페데스의 도움으로 빈센트 권은 신학교에 입학해 선교사 수업을 받는다.
당시 일본엔 빈센트 권처럼 천주교를 믿는 조선인이 5천 명에서 1만 명가량 있었다고 한다. 그 배경에는 신부들의 헌신적인 활동이 있었다. 신부들은 일본 내 조선인 노예 매매 사실을 알고 일본인 신도 중 노예 매매를 하는 자들은 파문에 처할 것이라는 강력한 결의를 한다. 그들은 기금을 모아 조선인 노예들을 사서 풀어주기도 했다. 정신적인 구원을 뛰어넘어 실천적 행동에 큰 감명을 받은 조선 포로들은 앞다퉈 천주교 신자가 됐다.
에도 막부의 초대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1612년 기리시탄 금지령을 발표한 이후 지속적으로 천주교를 탄압했다. 일본에서 자선과 포교에 매진하고 있던 빈센트 권 역시 시마바라에서 체포되어 니시사카 언덕에서 끝내 화형 당한다.
김효정 기자 teresa@busan.com
2012-03-07
[출처: 부산일보] https://www.busan.com/view/biz/view.php?code=201203080000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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