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내 인생을 바꾼 한마디-리 아이아코카

영상글

by 巡禮者 2011. 10. 10. 16:44

본문

 

 

 


 

                     
            

지난달에 무슨걱정을 했지?
작년에는?
 
그것봐.
기억조차 못하고 있자나.
그러니까 오늘 네가 걱정하고 있는것도
별로 걱정할일이 아닌거야.
잊어버려.
내일을 향해 사는거야.
-리 아이아코카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절망도,
죽기 전에는 끝날 것 같은 고통도
오늘 아침에 다시 생각해보면
왜 그런 일을 갖고 힘들어했나 믿어지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모든 고민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닙니다.
매일매일 새날이이 오지만
새로운 날과 함께 새로운 걱정거리가 또 찾아옵니다.

 


 

1983년 7월 13일 뉴욕의 한 행사장에서 크라이슬러사의 회장인 리 아이아코카는 8억1천3백48만7천5백 달러라는 금액만큼이나 거대한 수표를 은행가들에게 선물했다. 구제불능으로 보였던 크라이슬러사가 몇 년에 걸친 각고의 노력 끝에 정부에 요청했던 대규모의 구제 금융을 드디어 청산한 것이다. 또한 이 날은 누구보다도 아이아코카 개인에게 뜻 깊은 날이었다. 포드사에서 굴욕적으로 해고당한지 꼭 5년 만에 온갖 고생을 겪어가며 이루어낸 성과를 공표한 날이었기 때문이다. 엄청난 액수의 누적 적자, 잦은 사내 분규, 부패한 간부들까지 회생 불가능해 보이던 크라이슬러의 재기가 가능했던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회장인 아이아코카의 강력한 리더십이 있었다. 현재까지 미국 자동차 업계의 영웅적인 존재로 존경받고 있는 리 아이아코카는 과연 어떤 인물일까?     

   

      

아이아코카는 어린 시절을 미국 펜실베니아 웰링턴에서 보냈다. 그의 아버지는 성공을 좇아 12살의 어린 나이에 무작정 배를 탄 이탈리아인이었다. 다른 이민 가정과 마찬가지로 아이아코카의 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에게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는 아이아코카가 아무리 어려운 일에서라도 1등을 하지 않으면 칭찬하지 않았다. 반면 아무리 작은 일에서라도 1등을 하면 크게 칭찬을 했다. 이러한 아버지의 기대는 아이아코카에게 강한 자극제이자 촉진제가 되었으며 그의 성공에 밑거름이 돼 주었다. 학업을 마친 후 아이아코카는 포드사에 입사하기로 결정했다. 이미 어릴 때 자동차 산업에서 일하기로 마음먹고 있었던 그에게 포드사는 선망의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대 출신이었던 그는 입사 당시 판매직이 아닌 생산직에 배치된다. 기계보다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일하기를 원했던 아이아코카에게 생산직은 맞지 않았다.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판매직으로의 과감한 선회를 결심한다. 그리고 몇 년 후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멋지게 증명해 낸다.

 



아이아코카가 포드사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된 계기는 1956년에 일어났다. 당시 포드사에서는 자동차의 성능이나 마력 대신 자동차의 안전성을 높이는 데 주력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 안전캠페인은 실패였고 1956년형 포드 자동차의 판매 실적은 어디에서나 부진했다. 특히 아이아코카가 담당한 지역의 실패가 가장 심했다. 고민에 빠진 아이아코카는 하나의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다. ‘56년 형 신형차를 단돈 56달러로’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건 그 계획은 자동차 가격의 20%를 한달에 56달러씩 3년에 걸쳐 분할 지불하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봉급생활자가 차를 산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에 그의 장기 할부 판매 전략은 단숨에 포드가 GM과 크라이슬러를 누르고 지역판매 1위를 차지하게 할 정도로 효과적이었다. 이후 이 방법은 전국적으로 사용되었고 그 결과 7만5천 대의 포드사 자동차가 더 팔려나갔다.

 



 

이 일을 계기로 아이아코카는 고속승진의 길에 들어섰다. 그리고 결국 36살의 젊은 나이에 이례적으로 트럭 판매 전국 총지배인이 되기에 이른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이건 아이아코카가 만든 차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경영진의 자격 요건 중 신차의 개발은 중요한 역할을 했던 만큼 아이아코카는 신차 개발에 모든 역량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는 전임 회장 맥나라마가 추진하던 것과 같은 절약형 자동차 대신 젊은층을 겨냥한 차의 제작을 추진했다. 전후 베이비 붐 세대가 수백만의 젊은 소비층으로 떠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세대들에게 늘씬한 스포츠카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스포츠카는 지엠의 코르베르와 포드의 선더버드 뿐이었고 차값도 일반 승용차의 2배를 웃도는 6000달러에 이르렀다. 아이아코카는 이점을 놓치지 않고 이전에 개발되었던 절약형 자동차 팰콘을 개량하여 야생마를 연상시키는 스포차카 머스탱을 탄생시킨다. 저명한 평론가와 기자 100명에게 머스탱 50대를 제공하여 시승기를 쓰게 하는 등 언론을 잘 이용한 선전 전략과 엄청난 광고 물량으로 머스탱은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1차 생산분 8000대가 계약 시작 하루 만에 매진되었고 졸업 선물로 또는 결혼 선물로 차는 날개돋힌 듯이 팔려나갔다. 「머스탱 피플」이라는 신조어가 생길 정도로 당시의 머스탱의 열풍은 대단했다. 결국 2400달러의 머스탱은 1년만에 무려 418,812대가 팔리는 진기록을 세우게 된다.

 



이후로 아이아코카는 계속해서 성공적인 신차를 개발해낸다. 소형 매버릭, 대형 신종 썬더버드, 대형 마크3, 마크4, 마크5, 중형 페어먼트, 유럽에서 만든 피에스터 및 소형차 핀토 등 계속되는 성공으로 그는 40대 중반의 나이에 미국 제2의 자동차 회사의 사장이 된다. 그러나 그런 그를 두고 차기 회장감이라는 말이 심심치 않게 나돈 것이 화근이었다. 헨리 포드 2세가 자신의 위치에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아코카는 ‘나는 당신이 싫다’는 포드의 한 마디에 32년 동안 몸 담았던 회사를 떠나게 된다.

 



포드사를 떠난 후 재기를 노리던 아이아코카는 크라이슬러사의 사장직을 택한다. 그의 나이 쉰 넷, 록히드사와 여러 개의 경영 대학에서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았지만 평생을 바쳐온 자동차 산업을 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내린 결정이었다. 하지만 그가 취임하던 1978년 11월 2일자 「디트로이트 후리 프레스」에는 「크라이슬러사의 손실, 사상 최악에 이르다」와 「리 아이아코카, 크라이슬러사와 손잡다」라는 두 개의 기사가 나란히 실렸다. 아이아코카는 최악의 시기에 크라이슬러사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 크라이슬러사의 35명의 부사장들은 유기적인 업무 수행을 위한 아무런 회합 시스템 없이 각기 일하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재정 관리의 총체적인 체계를 갖추고 있지 않아 재정계획 수립조차도 어려움을 겪었다. 요컨대 회사의 문제가 정확히 어느 정도로 심각한지 알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이아코카는 스스로 문제를 찾고 해결해나가야만 했다.

 



무엇보다도 크라이슬러사는 현금이 부족했다. 아이아코카는 정부에게 20만 달러 규모의 구제 금융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그는 구제 금융에 회의적인 정부를 설득하기 위해 몇 번에 걸친 국회 청문회에 직접 출두하고 강력한 로비 활동을 벌이는 등 많은 노력을 쏟았다. 결국 크라이슬러사는 정부의 구제 금융을 얻어내는 데에 성공하여 본격적인 회생 작전에 나설 수 있었다. 우선 아이아코카는 간부들을 과감하게 해고하여 30명이 넘는 기존 부사장 중 단 2명만을 남겼다. 또한 노조를 설득하여 그들의 동의 하에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당시 미국자동차노동조합은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원하는 바를 이루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아이아코카는 노조 위원회에 직접 나아가 그들을 설득하고 또한 경영에 참여할 기회를 줌으로써 가장 껄끄러울 수 있는 정리 해고를 성공적으로 행할 수 있었다. 동시에 자신의 봉급을 단 돈 1달러로 책정하는 솔선수범을 보이기도 했다.

 



당시 크라이슬러사의 차에 대한 이미지는 좋지 않았다. 오랫동안 노인들이 타는 차로 알려져 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전에 생산되었던 아스펜과 볼라레라는 차종은 좋지 않은 품질로 크라이슬러사의 이미지를 크게 손상시켰다. 따라서 크라이슬러의 자동차는 소비자들이 차를 구매할 때 생각조차 하지 않는 차종이 되어가고 있었다. 아이아코카는 고객들에게 자사의 차들을 노출시키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렌트카 회사에 크라이슬러의 자동차를 파격적인 가격에 팔았다. 그리고 그 차들을 임대한 고객들은 차츰 크라이슬러의 자동차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임대차를 통해 나쁜 이미지를 쇄신하고 젊은 시장을 매혹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크라이슬러사는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하여 고객을 유혹하기 시작했다. 당시 업계 최초로 새 차를 산 고객에게 30일 또는 1천6백㎞를 달린 뒤에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즉각 환불해 주기로 하고, 이어 보증기간을 5년 또는 5만마일로 바꾸었다. 아이아코카는 이러한 조처와 함께 신차 개발에 착수한다. 그 첫 번째가 바로 K카였다. K카는 연료 절약형의 자동차로 가벼우면서도 여섯 사람의 가족을 태울 수 있을 만큼 공간이 넓은 차로 첫 해에만 50만대를 파는 기록을 세웠다. 크라이슬러사는 K카의 성공으로 상태가 호전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미니밴의 성공은 회사에 흑자를 가져다주었다. 미니밴은 보통의 스테이션 웨건보다는 크고 밴보다는 작은 것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자동차였다. 이 자동차는 83년 출시부터 지금까지 900만대 이상 팔리는 저력을 과시하여 크라이슬러사의 대표 종목으로 남아있다. K카와 미니밴의 성공의 결과 아이아코카는 정부에서 빌린 자금을 7년이나 앞서 갚아내는 저력을 과시한다.

 



이러한 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아이아코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린다. 그가 훌륭한 판매 기술과 마케팅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의 수많은 성과에 의해 증명되었다. 또한 국회로부터 구제 금융을 얻어낸 것과 성공적인 노조 협상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협상력은 널리 인정을 받았다. 머스탱을 비롯해서 그가 기획한 자동차들의 성공은 자동차 시장을 읽는 그의 뛰어난 통찰력과 능력을 잘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국 적자 누적에 의해 92년 크라이슬러사의 이사회에 의해 회장직에서 불명예 퇴진을 했다. 도대체 무엇이 부족했던 것일까?

 



80년대 크라이슬러사를 위기에서 구해낼 수 있었던 힘은 아이아코카의 카리스마였다. 그는 저돌적인 추진력으로 정리 해고와 구제 금융을 얻어내는 일 그리고 신차 개발을 해 나갔다. 하지만 그의 카리스마는 오히려 독단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주변 사람들로 하여금 두려움을 자아내는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아이아코카의 가장 큰 오점으로 남아있는 안전 문제에 있어 그의 이러한 성격의 문제점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포드사에 있던 시절 그는 머스탱의 후속차로 절약형 차인 핀토의 제작을 추진한다. 당시 그의 모토는 「2000&2000」으로 중량은 2000파운드 이하이면서 동시에 원가 2000달러 이하의 차를 만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량의 절감은 치명적인 안전의 문제를 가져오게 되었다. 당시 기술자들은 이 문제에 대해서 알고 있었지만 누구도 아이아코카에게 보고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2000&2000」은 법률과도 같은 것이었고 그 법칙을 깨뜨릴 가능성이 있는 보고는 용납되지 않는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결국 핀토는 안전의 문제를 그대로 안고 출시되었고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다.

 

 



아이아코카의 재직 후반기에는 무리한 인수 합병과 신차 개발의 소홀로 크라이슬러사의 주가가 31%나 떨어지기도 했다. 이후 그는 자신과는 달리 조용조용한 성격의 로버트 이튼을 후임으로 임명했고 크라이슬러사는 로버트 이튼의 경영 하에 90년대 초의 위기 상황을 잘 극복해낸다. 98년에는 독일의 다임러사와의 합병을 통해 다임러 크라이슬러사로 다시 태어나기도 했다.

       





이제 아이아코카는 자동차 산업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지만 그의 여러 단점에도 불구하고 크라이슬러사를 회생시킨 것은 미국 기업 역사상 가장 주목할만한 변화로 평가되고 있다. 위기에서 필요한 리더상과 위기가 아닌 때에 필요한 리더상이 다르다는 것을 아이아코카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영상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먼나무의 지혜  (0) 2011.10.10
하루는 곧 일생 이다  (0) 2011.10.10
사랑이 가득한 인생을 사는 법   (0) 2011.10.09
두 종류의 가난  (0) 2011.10.09
내 인생을 바꾼 한 마디-장 드 라 브뤼에르  (0) 2011.10.09

관련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