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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서 최초로 선보인 임대아파트인 개봉동 주공아파트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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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巡禮者 2011. 7. 29. 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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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임대주택 탄생

 

1970년대 초. 광화문에서 차를 타고 서남쪽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면 ‘여기서부터 시흥군입니다’라는 표지판을 볼 수 있었다. 시흥군과 붙어 있는 ‘서울의 끝자락’은 허허벌판이었고 사람들은 이곳을 개봉동이라고 불렀다.

 

지금은 지하철 1호선과 7호선을 비롯해 많은 버스 노선이 지나는 어엿한 서울의 서남권역이지만 1970년까지만 해도 사람이 거의 살지 않는 변두리였다. 바로 이 개봉동에 1972년 5월 9일 아침, 4,000여 명이 넘는 인파가 몰려든다.

 

삭막한 허허벌판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은 이유가 있었다. 이날 이례적인 사건을 모 일간지는 이렇게 전하는데 이 기사를 읽어 보면 왜 사람들이 모여들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날은 개봉동이 생긴 이래 아마 처음일 만큼 붐볐다.(중략) 뺑뺑이 돌리기 추첨기의 알맹이를 3,000개밖에 준비 못 한 대한주택공사 담당이사는 현장에 몰려든 군중을 돌아보고는 ‘큰일 났다’고 비명 같은 환성을 질렀다."

 

서울에서 최초로 선보인 임대아파트인 개봉동 주공아파트는 250가구 입주자를 모집했는데 첫 입주자 신청 날 무려 3,339명이 한꺼번에 몰렸다. 경쟁률은 13대1까지 치솟았다. 오전 8시부터 모여든 사람들로 광장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추첨 알맹이를 미처 받지 못한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통에 우격다짐이 벌어지기도 했다. 인터넷 청약을 통해 아무리 경쟁률이 높아도 조용하게 당첨자가 결정되는 요즘 풍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러나 인터넷 청약이 도입되기 전에는 이런 법석을 거쳐서 아파트 청약 당첨자를 가릴 수밖에 없었다.

 

 

 

1 개봉 60만 단지 전경

 

 

2 개봉 60만 단지 대지 분양 신청 모습

 

 

 

개봉동 주공아파트는 처음부터 인기를 끌지는 못했다. 서울의 주택난을 해결하기 위해 1971년 4월 착공해 5개월 만에 준공했지만 들어오려는 사람이 없었다. 서울시민의 48%가 집 없이 지냈지만 42㎡(13평) 아파트의 분양가 135만 원이 부담스러웠던 탓이다. 상당수 서민들이 몇만 원으로 한 달 생활을 하던 시절이었으니, 이 정도의 금액은 서민뿐 아니라 중산층에게도 큰돈이었다.

 

이 때문에 주택공사가 비슷한 시기에 건립한 한강 시영아파트와 광명아파트 등 분양주택들은 미분양으로 남아 있었다. 개봉아파트는 처음 분양에 실패한 뒤 반년 넘게 논밭 가운데 빈집으로 방치되어 있다 1972년 ‘임대주택’으로 다시 태어난다. 정부는 총 300가구 중 국가유공자 등에 제공하는 50가구를 제외한 250가구의 임대주택의 입주자를 모집하기로 했다.

 

다만 서민들이 들어 올 수 있도록 임대보증금을 가급적 저렴하게 책정했다. 임대보증금 7만 8000원과 매달 6,500원의 임대료를 내면 거주할 수 있었다. 입주자가 저축으로 돈을 모아 분양대금을 마련하면 분양할 수 있게 해 인기가 높았다. 현재 임대주택제도와 달리 당시 임대주택 임대기간은 1~2년에 불과했다. 무주택서민에게 집을 마련할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같은 해 10월, 2차 임대입주자 모집도 성공적이었다. 200가구 모집에 1,200명이 넘는 신청자가 몰려 6대1의 경쟁률을 기록했다. ‘당장 돈을 다 마련하지 않아도 내 집을 가질 수 있다’는 희망으로 사람들은 임대아파트 모집을 기다렸다. 임대아파트가 인기를 끌자 당첨된 사람들 일부는 분양아파트처럼 임대 입주권에 프리미엄(웃돈)을 붙여 전매하기도 했다.

 

개봉 주공아파트가 들어선 개봉동 일대는 ‘개봉60만 단지’라는 거대한 주택건설용지로 조성된 곳이다. 경인국도와 철도가 지나고 안양천이 흐르는 당시 영등포구 개봉동과 시흥군 서면 철산리 일대 201만 3000㎡(61만여 평)를 99만㎡(30만 평)씩 나눠 2개 지구로 개발했다. 인구밀도가 낮은 단독주택지구로 계획돼 단지 내 초등학교 2곳, 중학교 2곳, 시장 5개, 어린이 놀이터 7개, 공원 6곳, 극장 1곳이 함께 들어섰다. 개봉단지에는 개봉주공아파트를 비롯해 철산 광명 등 3개 아파트 단지 2,000가구를 지었다. 3만 5000명이 사는 미니 신도시 규모였다.

 

장마철이면 어김없이 침수되던 저지대를 높게 만들기 위해 흙을 쌓아 3m를 높였다. 성토할 흙이 부족해 인근 산을 무단으로 팠다가 주택공사직원이 특수절도혐의로 고발되는 해프닝도 있었다. ‘개봉 60만 단지’는 서울 서남권인 영등포 부도심이 개발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개봉단지의 현재

 

허허벌판이던 개봉동 일대는 37년이 지난 현재 아파트가 빼곡히 들어선 지역으로 변했다. 개봉동 주공아파트는 재건축해 1,371가구 규모의 개봉 한진타운 아파트로 변신했다. 재건축한 한진타운 아파트도 1999년 입주했으니 벌써 10년이 지났다. 개봉동과 인근 고척동에서는 주택재개발정비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이 사업이 끝나면 최초의 임대아파트의 탄생지였던 개봉동은 다른 모습의 주거단지로 변모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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