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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간 스스로 숨쉬어 온 석굴암의 과학

역사 자료

by 巡禮者 2010. 8. 19. 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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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간 스스로 숨쉬어 온 석굴암의 과학

ㆍ지정번호 : 국보 제24호

ㆍ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ㆍ소재지 : 경북 경주시 진현동 999
ㆍ1995년 12월 세계문화유산 등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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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토함산 기슭에 자리한 석굴암은 서기 751년 신라 경덕왕때 김대성이 창건해 774년 혜공왕 10년에 완공된 순수 인공 석굴입니다.

 


 

지금도 조각하기 힘들다는 화강암으로 제작된 석굴암은 건축, 수리, 기하학, 예술이 종합적으로 어우러진 작품입니다. 일제시대 보수공사를 하기 전까지는 완벽한 모습으로 보존되어왔던 석굴암에는 어떤 과학의 원리가 숨어있을까요?

 

> 참배자의 위치까지 계산된 철저한 대칭과 비율
석굴암은 정사각형과 대각선, 정삼각형과 수선, 원에 내접하는 정 6각형의 사용 등 수학적 기법으로 만들어진 정교한 예술이라고 평해집니다.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사각형인 전실에는 양쪽에 각각 4개의 입상이 서있고 원형으로 만들어진 주실에는 15개의 입상이 본존불상(석가여래좌상)을 둘러싸고 있습니다. 12당척(1당척=29.7㎝)을 기본으로 설계되었는데, 원형인 주실의 반지름도 12당척이며 참배자의 위치는 본존불에서 12당척의 두 배인 24당척 지점으로 이는 본존불을 보는 이상적인 거리입니다.

 


 

또 본존불상의 비율은 정확히 1:2:3:4의 비율로 얼굴 너비가 2.2자(1자=약30㎝), 가슴 폭은 4.4자, 어깨 폭은 6.6자, 양 무릎의 사이의 너비는 8.8자입니다.

 

> 습도조절의 비밀은 자연과학의 원리
석굴임에도 불구하고 1000년의 세월 이상 습기가 차거나 곰팡이 등이 피지 않고 보존된 석굴암. 마치 살아서 스스로 숨을 쉬는 듯했습니다. 습도조절의 가장 큰 비밀은 바로 바닥 밑을 흐르는 지하수입니다. 지하수 때문에 바닥 온도가 벽면의 온도보다 낮게 유지되어 불상 표면에 물방울이 맺히는 결로현상을 막았습니다. 지하배수로에는 자잘한 자갈을 외부로 길게 두텁게 깔아서 자연건조를 시켰습니다.

 

또 주실의 상층부에는 10개의 감실이 있는데 감실을 받치고 있는 돌 사이에 작은 틈이 있어 공기를 순환시킵니다. 출입구의 아치형 천장 위 광창은 햇빛을 잘 받게 하고 햇빛의 들고 남에 따라 대류현상을 일으켜 통풍이 원활히 이루어지게 됩니다.

 


 

하지만 현재는 기계에 의해 냉방과 온방, 습도조절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20세기 들어 일제가 1913년 석굴암의 외벽을 시멘트로 싼 이후부터 석굴암에 서리와 이끼가 끼는 치명적인 문제가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 첨성대, 화강암으로 섬세한 곡선을 빚다

ㆍ지정번호 : 국보 제31호
ㆍ지정연도 : 1962년 12월 20일
ㆍ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839-1

 

경주시 인왕동 내물왕릉 북동쪽 약 300m 부근에 자리한 첨성대는 신라의 첫 여왕인 제27대 선덕여왕(632~646) 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무거운 화강암을 9미터 높이의 세밀한 곡선을 가진 둥근 구조물로 쌓아 만든 첨성대. 50∼870kg에 이르는 무거운 화강암을 둥글게 한 단씩 배치하면서 위로 갈수록 좁아지는 모습입니다. 그 옛날 이 무거운 돌을 어떻게 위로 쌓고 또 세밀한 곡선으로 표현할 수 있었을까요?


 

> 주변에 흙을 같이 쌓는 흙비계 공법
화강암을 한 단 한 단 올릴 때마다 첨성대 내부와 외부에 완만한 경사의 ‘흙 비계’를 쌓는 흙비계 공법을 사용함으로써 축조가 가능했습니다. 외부에 쌓인 흙비계로 무거운 화강암을 지표면에서 작업 공간 위치로 이동시키는 한편 이렇게 안정적인 상태에서 세밀한 곡선으로 다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첨성대가 완성된 후 흙은 제거하여 첨성대 전체 모습이 드러나게 됩니다.

 

1986년 재미과학자에게서 입수한 첨성대 실측 도면으로 흙비계가설이 제기되었는데 현장조사 결과 첨성대 위쪽과 아래쪽의 형태가 약간씩 차이가 난다는 점이 이 가설을 뒷받침합니다. 흙을 쌓아가며 작업하기에 먼저 만들어진 아랫부분은 흙에 가려져 현재 쌓는 단과 비교하면서 작업할 수 없어 아래위 단의 차이가 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첨성대 꼭대기와 가장 아래 제1단 원의 중심 위치 역시 20cm 차이가 납니다. 
 
외부에 쌓은 흙은 첨성대 완성 후 제거 했지만 내부에는 중간 창 바로 아래 제12단까지 여전히 1300여 년 전 쌓은 흙 비계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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