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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과학의 패러독스

科學(Science)

by 巡禮者 2011. 7. 28.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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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과학의 패러독스

2001년 09월 19일

1. 들어가는 말
20세기를 과학기술의 세기라고 부르는데 이견을 가진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양자역학이나 상대성이론과 같은 새로운 물리학, 생물학의 눈부신 발전, 컴퓨터나 비행기와 같은 기술의 개발과 상용화, 새로운 약과 의술의 진보, 그리고 과학기술의 발전에 근거한 농업과 산업생산의 비약적인 발전은 20세기를 다른 세기와 구분하고 있다. 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과학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도 그 전세기와 비해서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원자탄을 비롯한 가공할 군사기술과 환경오염은 20세기 과학 문명의 부작용으로 대표적인 것이다. 1970년대 이후에는 분자생물학과 생명공학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광범위한 비판이 있어 왔다. 20세기를 "극과 극의 시기"(age of extremes)로 특징 지운 역사학자 홉스봄(E. Hobsbawm)은 과학기술과 관련해서도 이런 두 극단이 잘 나타난다고 하면서 20세기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역사를 통틀어서 20세기보다 과학이 더 깊이 침투하고 과학에 더 의존적이었던 시기는 없었다. 반면에, 갈릴레오의 파문 이후에, 과학에 대해 이렇게 불안한 마음을 가졌던 시기도 없었다. 이것이 20세기를 연구하는 역사학자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다 (Hobsbawm 1994, p. 522).

홉스봄은 과학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이, 점차 과학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었고, 과학의 실제적이고 도덕적인 결과가 예측 불가능하고 종종 파국적이었으며, 과학이 개개인의 무력감을 증폭시켰고, 과학이 권위가 추락했다는 사람들의 네 가지 감정에 의해 야기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ibid., p. 530).

이 글은 홉스봄이 언급한 20세기 과학의 패러독스를 조금 더 깊이 분석해 보기 위해 씌어졌다. 20세기 과학의 패러독스를 과학의 진보와 이에 대한 공중(公衆, public)의 불안이라는 두 극단으로 간주하는 홉스봄의 설명은 20세기 과학의 다양한 특수성과 세기말 과학이 경험하는 복잡한 변화를 이해하기에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짧은 글이 20세기 과학의 역사에 대한 종합적인 직관을 제공해 줄 것을 겨냥하고 있지는 않다. 과학사학자들이 20세기 과학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1970년대 중반 이후이며, 이때부터 나온 연구들은 아직 20세기 과학의 중요한 사건과 그 배경에 대한 스냅 사진들을 제공해 주는 상태이기 때문이다. 이 스냅 사진들을 엮어서 연대기 이상의 역사 이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다양한 과학의 내적 발전과 이를 매개한 사회적·문화적·정치 경제적요인들에 대한 역사적 연구가 훨씬 더 축적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런 분명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논문은 20세기 과학의 몇몇 중요한 특성을 개괄함으로써 20세기 과학에 대한 한 가지 '큰 그림'(big picture)을 그리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 이를 위해 나는 과학과 공중(公衆)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과학이 공중과 맺는 이중적인 관계―과학이 공중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만 과학의 지나친 전문화와 세분화로 인해 공중과 무척 유리되어 있다는―는 20세기 과학의 패러독스라는 상자를 열 수 있는 핵심적인 열쇠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나는 먼저 20세기를 통해 과학이 겪은 급격한 변화를 예시한 후에 (2절), 1950년대 이후 과학기술이 야기한 세 가지 논쟁과 이 논쟁이 공중의 과학관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3절), 이것이 20세기 들어와 두드러졌던 과학과 공공영역(public sphere)과의 관계의 변화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검토하고자 한다 (4절). 이 글의 마지막 절에서는 (5절) 21세기 과학의 특성을 전망하면서 새로운 '포스트모던 과학'이 세기말의 과학의 변화를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가에 대해 간단히 서술할 것이다.

2. 20세기 과학의 특수성: 사회의 대대적인 지원
20세기 후반의 과학연구는 국민의 세금에 의해 지원되고 있다. 물론 과학은 기업에 의해서도, 대학에 의해서도, 그리고 몇몇 비영리 재단에 의해서도 지원되고 있지만, 대학 자체의 지원은 그 규모가 크지 않다는 점과 기업에 의해서 지원되는 과학은 대부분 기술혁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연구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순수·기초 과학의 대부분이 국민의 세금에 의해 정부를 통해 지원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부 각 부처의 연구소에서 수행되는 연구는 물론 대학 교수로 재직하는 과학자도 과학재단과 같은 (미국의 경우 National Science Foundation 이나 National Institute of Health) 국립 재단의 연구비에 의존하고 있다. 이렇게 국민의 세금이 기초과학연구의 대부분을 지원한다는 것은 20세기 과학의 가장 큰 특징이다. 20세기를 1년 남긴 시기에 살고 있는 우리는 국가가 과학을 지원하는 것을 당연히 받아들이고, 이에 어떤 이의도 제기하지 않는다. 과학은 문화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며 한 국가의 기술과 경제의 발전을 장기적으로 추진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이런 과학에의 지원이 보편적이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18세기까지 과학은 대부분 개인적인 후원(patronage)에 의해 지원되었고, 과학이 대학과 아카데미에 전문직업으로 자리잡은 19세기에도 과학연구는 (보잘것없는) 대학의 재원과 호사가들의 개인적인 후원에 의해 도움을 받았다. 1870년에 세워져 대영제국의 물리학의 발전을 주도했던 케임브리지 대학의 캐븐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가 데본샤이어(Devonshire) 경의 사재의 지원을 받아서 세워졌다는 사실은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물론 정부가 과학을 지원하는 경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과학이 문화적 상징으로서 큰 가치를 가진 경우나 (예를 들어 프러시아의 위용을 자랑하기 위해 베를린 대학에 세워진 물리학자 헬름홀츠의 실험실) 과학이 사회의 목적에 부합하는 효용을 위한 유용한 지식을 제공해 주었을 때에 (예를 들어 단위나 표준에 대한 연구) 국한되었다.

정부가 과학을 대규모로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였고, 이는 과학자들의 연구활동을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1960년 당시 미국 교수협회의 회장을 역임하던 벤틀리 글래스(Bentley Glass)라는 생물학자는 20년 전이었던 1940년경의 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1940년 당시 전형적인 과학자인 생물학과의 조교수는 그의 연구를 위한 어떤 특별한 재원도 없었다. 연간 100불이 안 되는 돈이 잡품 비용으로 과의 예산에서 나왔을 뿐이었다. 그는 웬만큼 괜찮은 복합 현미경과 해부용 현미경 하나 정도를 가지고 있었고, 모든 배양기를 만들어야 했고, 살균을 압력솥에서 했으며, 도움 없이 동물을 키웠고, 누가 유리기구를 닦아주면 이에 고마워했다. 온도를 조절하는 밀폐용기가 없어서 더운 여름에는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는 먼지투성이의 지하실에서 일을 해야 했다. 과학자의 일의 80%는 일상적인 잡일이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연구를 계속해야 했다 (Glass 1960, p. 598).

20년이 지난 1960년 당시는 어땠는가?
1960년의 교수는 연방정부에 의해 지원되는 두개의 다른 실험실을 꾸리고 있다. 고참 연구원이 거의 독립적으로 하나의 실험실을 관장하고 있으며, 그에게는 조교가 딸려 있다. 다른 연구실에는 두 명의 조교가 있고, 이 조교 이외에도 기기를 닦고 동물을 키우고 배양을 담당하는 파트타임 조교가 또 있다. 연간 연구비는 약 5만 불이고, 여기에 교수의 월급은 물론 포함되지 않는다. 이 연구비중 단 한푼도 대학에서 지급되지 않는다. 모든 실험자들이 해부용 현미경을 하나씩 가지고 있으며, 위상 현미경, 광마이크로 기구, 엑스선 기구, 냉방이 된 방,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인큐베이터, 냉장고, 냉동고, 에어 컨디션, 배양하고 살균하는 방, 동물을 키우는 축사 등 실험에 필요한 모든 것들이 다 준비되어 있다 (ibid).

왜 20년 사이에 이런 엄청난 변화가 있었는가? 여기에는 무엇보다 2차 세계대전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한 전략가가 논평했듯이, 2차 대전은 "레이더에 의해 이겼고, 원자탄에 의해 종지부를 찍었는데" 레이더와 원자탄은 각각 MIT의 방사능 연구소(Radiation Laboratory)와 로스 알라모스의 연구소에서 물리학자나 수학자와 같은 자연과학자들의 연구로 결실을 맺은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Kevles 1977). 2차 대전 동안 과학자들의 연구는 전쟁이라는 특수 상황 속에서 과학이 정부에 의해 거의 무제한으로 지원을 받았을 때 창출해내는 가공할만한 힘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가능했던 연방정부에 의한 과학연구의 지원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도 지속되었다. 소련의 원자탄 개발, 한국전쟁, 냉전의 심화라는 1950-1960년대 상황에서 국방 연구비의 5%가 기초 과학연구에 투자되었고, 이는 물리학을 비롯한 자연과학분야의 급격한 팽창을 가지고 왔다 (Forman 1987). 국방성, 에너지성, NASA 이외에도 과학자들의 연구는 국립과학재단(National Science Foundation, NSF)이나 국립보건연구소(National Institute of Health, NIH)에 의해 지원되었다. 1950년에 설립된 NSF는 2차 대전 중에 전쟁 연구를 감독했던 부시(Vannevar Bush)의 보고서 『과학, 그 무한한 프론티어』(Science, the Endless Frontier, 1945)에 근거한 것이었다. 미국 대통령에게 제출된 이 보고서에서 부시는 정부와 기업에서 필요한 실용적인 기술이 대부분 기초과학의 연구에서 비롯되었음을 강조한 뒤에, 정부의 예산으로 만들어진 재단이 대학의 기초연구를 지원해야 함을 역설했다. 기초연구는 본질적으로 '모르는 영역'(the unknown)에 대한 탐구이기 때문에 단기적인 이익을 노리는 분위기에서는 제대로 수행될 수 없음을 강조한 뒤에, 부시는 이런 연구지원재단의 근본적인 원칙으로 1) 장기간의 연구를 위한 기금을 확보해야 하고, 2) 과학연구의 특수성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 의해 움직여져야 하며, 3) 대학과 같은 외부기관의 연구실을 지원해야 하고, 4) 대학의 연구나 행정에 간섭해서는 안되며, 5) 대통령과 의회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다섯 가지 원칙을 명시했다 (Bush 1945, pp. 26-27).

부시에 따르면, 정부와 사회는 과학을 지원해야 하지만, 이를 담당하는 기관은 과학자들에 의해 운영되어야 하며, 대학에서의 연구에 간섭해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반면 재단과 과학자는 연구의 지원에 대해 사회에 윤리적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대통령과 의회에 행정적인 책임을 지면 되었다. 비전문가나 시민의 참여는 처음부터 배제되었고, 과학연구의 지원은 사회의 목적과 이익에 부합하는 기준이 아니라 과학의 내적 기준에 의해 정해졌던 것이다. 부시와 비슷한 시기에 상원의원 킬고어(Harley Kilgore)도 과학재단을 구상하고 이를 법안으로 상정했는데, 이 법안은 과학자와 정부 부처의 대표는 물론, 8명의 시민 대표가 참여하는 위원회가 재단을 운영하는 것을 상정하고 있었다. 킬고어의 법안에서는 과학 연구의 지원이 사회적·경제적 목표에 더 밀접히 연결되어 있었고, 대중의 참여가 보장된 공개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Wang 1995). 과학자들과 정치인은 이 두 다른 법안을 놓고 몇년간 논쟁을 벌였고, 결국 영향력있는 과학자들이 부시의 안을 지지함으로써 부시의 초안이 조금 수정된 형태로 NSF라는 국립재단으로 실현되게 되었다.

부시의 『과학, 그 무한한 프론티어』는 독자적인 과학자 사회(autonomous scientific community)의 모델에 근거하고 있었고, 또 이런 모델의 타당성을 강화시켜주었다. 1930년대와 40년대를 통해 사회학자인 로버트 머튼(Robert Merton)은 이미 과학자 사회의 가치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로서 보편주의(universalism), 집단주의(communism),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음(disinterestedness), 조직된 회의주의(organized scepticism)의 네 가지 에토스(ethos)를 지적했다. 머튼의 이념은 부시나 코난트(James B. Conant)같은 과학자에 영향을 비쳤을 뿐만 아니라, 1945년 이후 대학교육 개혁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전후 미국의 대학 교육 개혁가들은 객관적이고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과학적 판단이 민주주의가 요구하는 시민의 덕목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를 위해 대학에서 과학적 정신(scientific spirits)을 교육할 것을 강조했다 (Hollinger 1995). 몇몇 철학자들과 사회학자들은 여러 사회문제를 경험적인 과학적 방법으로 해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과학은 사회의 부와 진보를 보장하는 것만이 아니라, 객관성과 보편성의 상징이었다.

단, 이 모든 것은 과학이 사회에서 통용되는 정치적 권력에서 벗어나 있고, 사회에서 유리되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어떤 과학연구가 바람직한가는 과학자 사회의 자율적이고 독자적인 결정에 맡겨두어야지 정치권력의 개입에 의해 결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1930-40년대 소련의 뤼센코주의 유전학의 실패는 정치권력이 과학의 방향에 깊숙이 개입하려 했던 시도가 과학에 얼마나 악영향을 미쳤는가를 잘 보여주는 예로 널리 회자되었다 (Joravsky 1970).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파악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던 돈 프라이스(Don K. Price)의 『과학 계급』(Scientific Estate, 1965)과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1962)가 모두 사회에서 독립적인 이상적인 과학자 사회를 묘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사회에서 지원을 받는 과학이 과학자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운영될 때 과학과 사회 모두에 보탬이 된다는 전후 인식을 반영한 것이었다 (Price 1965; Kuhn 1962).

과학이 본질적으로 실용적이기 때문에 국가가 장기적인 과학연구를 지원해야 한다는 부시의 주장은 냉전을 겪으면서 최근까지 미국 과학정책의 기조로 유지되었지만, 1990년대 이후 뚜렷한 변화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중첩되어 있다. 무엇보다 기초과학연구가 기술혁신을 낳고 기술혁신이 산업의 발전을 낳는다는 어셈블리라인 식의 주장의 타당성이 의심받기 시작했다는 점이 그 중 하나이다. 1970년대 초반부터 기술사학자들과 이에 동조하는 기술자들은 역사를 통해 기술의 발명이나 개량이 과학적 이론이나 발견에 의해 이루어진 경우가 많지 않음을 주장했고, 이런 주장은 경제학자나 정책결정가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홍성욱 1994). 특히 1980년대 후반부터 산업의 발전이 기초과학에의 장기적인 투자가 아니라 전략적으로 중요한 기술에 대한 투자를 중심으로 새롭게 계획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대두되었다 (Branscomb 1993). 여기에 덧붙여서 냉전의 종식과 미국 정부의 재정 적자는 정부 예산의 집행에 대한 국민의 감시를 강화시켰고, 이런 상황은 사회가 지향하는 목적에 잘 부합하지 않는 기초과학연구에의 대규모 투자를 어렵게 만들었다. 게다가 50년 동안 과학의 발전은 눈에 띄는 사회적 개선을 가지고 오기도 했지만, 인종차별, 마약, 공동체의 붕괴, 범죄와 같은 사회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는 점도 부시 식의 낙관주의에 쐐기를 박았다 (Byerly and Pielke 1995).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대다수 사람들은 과학이 수많은 다른 사회문제를 야기했다고 보았다. 다음 절은 과학이 야기한 몇가지 주요 사회문제를 분석하면서, 이것이 과학과 공중의 관계를 어떻게 바꾸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3. 20세기 과학기술과 사회문제: 논쟁 속의 전문가와 공중(公衆)
2차 대전 이후 폭발적으로 팽창한 과학연구는 19세가나 20세기 전반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수많은 사회문제를 낳았다. 과학자나 과학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이런 새로운 사회문제들이 과학의 발전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반대로 과학연구가 이런 문제의 주범이라고 생각한 대부분의 일반인들은 과학기술에 비판의 화살을 겨누었다. 논쟁이 진행되면서 전문가들의 견해는 상반된 형태로 나타났으며, 이는 과학의 권위와 효용에 대한 공중의 혼란을 가중시켰다. 과학은 확실하고 객관적이고 민주적인 것에서 점차 의심스럽고 정치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바뀌었다. 이번 절에서는 군사연구와 핵전략, 환경 오염과 오존층 파괴, 그리고 유전자재조합(recombinant DNA)에 대한 논쟁을 살펴보면서 과학에 대한 공중의 이미지의 변화를 드러내고자 한다.

3.1. 군사 연구와 핵억제
2차 대전이 끝나고 맨 먼저 대두된 문제는 핵무기와 군사 연구에 대한 것이었다. 핵무기의 UN관리가 실패로 끝난 뒤에 미국과 소련은 원자탄 개발 경쟁에 진입했고, 한국전쟁과 중국의 공산화가 미국과 소련을 수소폭탄 연구로 몰아 넣으면서 과학자들은 2차 대전에 동원되었던 것처럼 다시 대규모 군사연구에 동원되었다. 양국은 원자탄보다 수십-수백 배 더 위력적인 수소폭탄을 개발했고, 곧이어 ABM이나 ICBM같은 미사일을 개발했다. 대학의 연구소에는 국방성과 육·해·공군의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2차대전 동안 레이더를 개발했던 MIT의 방사능 연구소는 전자공학연구소로 바뀌었고, 이 연구소가 성공적이자 MIT는 공군에서 지원을 받아 링컨 연구소를 세웠다. MIT에서는 곧이어 기기 연구소(Instrumentation Laboratory), 디지털 컴퓨터 실험실, 국립 자기 실험실 등이 군사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프린스턴대학의 물리학과는 수소폭탄의 제조에 필요한 이론적인 문제를 다루는 매터혼 계획(Matterhorn Project)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며, 존스 홉킨스 대학에서는 응용물리연구실이, 캘리포니아 공과대학은 젯추진연구실(Jet Propulsion Lab)이 육군의 지원으로 설립되었다 (Seidel 1987; Leslie 1993; Dennis 1994). 이런 실험실에서의 군사연구는 자유롭게 열람되는 대신에 비밀문서로 취급되었다. 군사연구에 대한 비판은 1960년대 후반에 월남전 참전과 더불어 광범위하게 제기되었다. 몇몇 대학에선 군사연구를 수행하던 연구소가 성난 학생들의 습격을 받기도 했고, 1969년 3월 4일 MIT의 과학자들은 "과학기술지식의 오용이 인류의 생존에 대한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되고 있다"고 하면서 하루동안 연구 파업(research strike)을 단행했다 (Allen 1970).

핵무기 연구에 적극적인 과학자들도 많았지만 일부 과학자들은 핵무기의 철폐를 처음으로 주장하기도 했다. 1955년 7월 러셀-아인슈타인 메니페스토에이어 52명의 노벨상 수상자들은 독일 마이나우에서 마이나우 선언(Mainau Declaration)을 발표했다. 이들은 여기서 "핵무기의 두려움 때문에 전쟁이 영구히 억제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라고 지적한 후에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는 과학이 인류를 절멸시킬 수 있는 수단을 제공한다는 것을 두려운 마음으로 목격하고 있다. 지금 가능한 무기를 전쟁에서 모두 사용한다면, 지구는 인류가 깡그리 멸망할 정도의 방사능에 오염이 될 것이다. 싸우는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중립국까지도 모두 죽을 것이다. ... 모든 국가는 힘을 최후의 수단으로 삼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모두 멸망할 것이다 (Newman 1961, p. 198에서 인용).

그렇지만 과학자들이 핵무기에 대한 통제를 상실했다는 것 또한 분명했다. 무엇보다 핵전략에 대한 과학자들의 주장은 게임이론의 수학과 "핵억제"(deterrence)라는 새로운 핵전략으로 무장한 전략가들에 의해 비판되고, 대체되었다. 한 전략 전문가는 "핵전쟁 문제의 권위자인 과학자들"이란 표현을 사용한 러셀(Bertrand Russell)의 퍼궈시(Pugwash) 선언을 비판하면서, 핵보복과 같은 문제는 아주 힘들고 체계적인 분석을 거쳐야 하는 문제로서 텔러(Edward Teller)나 한스 베테(Hans Bethe)와 같은 자연과학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Wohlstetter 1962). 과학자와 새롭게 등장한 전략가들의 차이는 랜드 연구소 전략 연구원 허먼 칸(Herman Kahn)의 『핵전쟁』(On Thermonuclear War, 1960)에서 그 싹을 볼 수 있었다. 칸은, 전면 핵전쟁이 일어나면 인류는 멸망할 것이라는 노벨상 수상자들의 마이나우 선언을 '비전문가'의 주장으로 일축하면서, 핵전쟁 후에도 사회가 빠른 속도로 건설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Kahn 1960). 평화주의 과학자와 전략 전문 과학자들 사이의 좁혀질 수 없는 의견의 불일치는 일반인들의 불안을 가중시킨 원인이었다 (Newman 1961).

3.2. 환경오염과 오존층 파괴
1960년대와 1970년대는 환경과 에너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두된 시기였다. 환경오염에 대한 경각심은 레이첼 칼슨(Rachel Carson)의 문제작 『침묵의 봄』(1962)이, 인간이 만든 살충제가 환경을 오염시키고 그 결과가 다시 인간에게 돌아올 수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면서 급속하게 확산되었다. 『침묵의 봄』이 불러일으킨 자연보호운동은 1969년 이후에 급진적인 환경운동으로 변했다. 1960년대 말부터 들불처럼 번진 환경운동은 현대 과학기술이 자연을 대화하고 함께 살아가는 대상으로 보지 않고 정복과 통제의 대상으로만 간주했기 때문에 자원의 고갈은 물론 생산과 소비를 불필요하게 과다하게 만들었음을 비판했다. 이런 환경운동은 마르쿠제(Herbert Marcuse)나 테오도르 로잭(Theodore Roszak)의 급진적 과학관과 결합하면서 운동의 과녁을 근대화와 근대 과학의 합리성 그 자체에 맞추었다. 자연이라는 연구 대상에 대해 관찰자적인 거리를 유지하는 근대 과학의 객관적 방법론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홍성욱 1999, 제 3장).

환경 문제는 1974년에 몰리나(Mario Molina)와 로울란드(F. Sherwood Rowland)라는 두 대기 화학자가 냉장고와 스프레이에서 널리 쓰이던 CFC(chlorofluorocarbons)라는 화학물질이 성층권의 오존층을 엷게 해서 자외선 투과를 증가시킨다는 이론을 내놓으면서 새롭게 전 지구적 문제로 부상했다. 그렇지만 CFC가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이들의 이론을 지지하는 결정적인 실험증거는 성층권까지 비행할 수 있는 유일한 비행기인 NASA의 ER-2기를 사용해서 남극의 오존층에 대한 현장 실험을 수행한 1987-88년이 되어서야 나왔고 (Lambright 1995), 이 증거가 발견되기까지 10여년간 CFC의 주 생산자인 듀퐁은 CFC가 오존층을 엷게하는 주범이라는 과학자들의 주장을 그저 하나의 검증되지 않은 가설로 비웃곤 했다. 1978년, CFC에 대한 규제는 정치적인 방식으로―대체물질이 있었던 스프레이에는 CFC를 금지했지만 대체물질을 찾지 못했던 냉장고의 용매로는 CFC의 사용을 허가한―찾아졌고, 이런 정치적 타협은 CFC와 오존층 파괴에 대한 관심을 급속하게 냉각시켰다 (Brown and Lyon 1992).

1985년 영국의 과학자가 남극의 오존 구멍을 발견하고 NASA가 이 오존 구멍의 존재를 인공위성 사진으로 확인한 것은 오존층 파괴에 대한 전지구적 관심을 다시 상기시켰지만, CFC가 남극 오존 구멍의 원인인지, 또 남극의 구멍이 전 성층권의 오존층의 희박화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 사이에 이견이 존재했다. 1987년 5월에 열린 미 상원의 청문회에서 증인으로 나온 여섯 명의 과학자들 중에 오직 두 명만이 CFC가 오존층의 급격한 파괴를 가져온다는 이론이 참이라고 생각한다고 답했고, 다른 네 명은 모르겠다고 했다. NASA의 오존 연구를 주도했던 왓슨(Robert T. Watson)조차 남극에서 발견된 오존 구멍의 전지구적 중요성에 대해서 확신할 수 없다고 답할 정도로 과학자들 사이의 합의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같은 청문회에 제출된 화학산업연합의 보고서는 자체 연구에 기초해서 지구의 오존층이 엷어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다 (Weiss 1993). CFC 생산의 규제에 대한 첫 국제적 합의인 몬트리얼 조약(Montreal Protocol, 1998년 3월 인준)은 결정적인 과학적 증거가 찾아지기 전인 1987년 9월에 외교적인 타협을 통해 찾아졌다. 1970년대와 80년대를 통해 볼 수 있었던 과학자들 사이의 이견과 심지어는 오존층의 파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차이는 과학에 대한 일반인들의 의심을 가중시킨 원인이었다.

3.3. 유전자재조합(Recombinant DNA) 논쟁
1970년대 초엽, 분자생물학자들은 DNA에서 원하는 유전자를 잘라 다른 DNA에 붙이고 대장균(E. Coli)을 사용해서 이 DNA를 수백 배 복제할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다. 그러나 유전 공학의 새 장을 연 이 유전자재조합법은 잡종 바이러스나 항생제에 면역을 가진 신종 박테리아를 만들 위험도 있었다. 1973년 뉴햄프셔에서 열린 고든 학회(Gordon Conference)에 모인 과학자들은 새로운 유전자재조합의 발견이 가져올지 모르는 위험에 대해 우려를 표하는 편지를 써서 국립과학아카데미(National Academy of Science)에 보냈고, 두번째 편지를 『사이언스』(Science)지에 출판했다. 미국 국립아카데미는 이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스탠포드대학의 생물학자인 폴 버그(Paul Berg)를 위원장으로 하는 위원회를 만들었고, 버그 위원회는 1974년 잠정적인 위험을 충분히 알 수 없는 유전자재조합 연구를 과학자 스스로 금지하길 요구하는 모라토리움을 발효시켰다. 다음해인 1975년 캘리포니아에서 열린 국제 회의(Asilomar Conference)에서 과학자들은 생물학적 위험(biohazard)에 대한 기준을 토론했으며, 다양한 수위의 유전자재조합 연구가 허용될 수 있는 기준에 대한 합의를 도출했다 (Krimsky 1982, pp. 39-153).

유전자재조합을 발견한 과학자들이 이 방법의 잠정적인 문제와 피해에 대해서 생각하고, 위험한 연구를 금지하자고 스스로 결정한 일은 역사상 유래가 없던 일이었다. 여기에는 1960년대 후반부에 서구사회를 휩쓴 반전운동과 과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한몫을 했다 (Krimsky 1992, p. 223). 그렇지만 과학자들의 문제제기는 다분히 방어적인 것이었다. 즉 과학에 대해 무지하고 비판적인 사람들이 유전자재조합 방법을 비난하기 전에 이에 대한 지침을 만들어서 대중의 신뢰를 얻어보자는 의도가 강했던 것이다. 버그 위원회의 보고서는 유전자재조합의 문제를 도덕적·사회적 문제가 아니라 기술적인 해결이 가능한 건강의 문제(health problem)로 규정하고 있으며, 이 문제가 과학자 사회에 의해 해결될 수 있음을 분명히 하고 있었다. 1975년 학회는 일반인은 물론 환경학자도 배제한 채로 초청받은 140여 명의 분자생물학자만을 대상으로 열렸으며, 이후 NIH의 유전자재조합 지침을 초안하는 과정도 이 학회에 참석했던 과학자들의 의견을 수렴해서 이루어졌다. 게다가 1970년대 후반에 유전자재조합법의 실용성이 분명해지고 바이오테크 회사와 제약회사의 이해관계가 특허와 연구비의 지원이라는 형태로 개입되면서, 분자생물학자들의 다수는 NIH의 지침을 완화하거나 철폐하라는 단일한 목소리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NIH의 지침은 1978년 현저하게 약화되고, 1980년에 거의 무력화되었다 (Wright 1992).

물론 유전자재조합에 모든 과학자가 찬성을 한 것은 아니었다. 분자 생물학의 선구자로서 노벨상을 수상한 샤가프(Erwin Chargaff)는 인간이나 동물의 몸에 사는 대장균을 숙주로 쓰는 것을 허락한 NIH의 지침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가 여기에 반대한 이유는 변형된 대장균이 인간의 몸에 들어갔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어떤 특정한 세포 속에서는 잘 작동하는 호르몬의 유전자가 창자에 들어갔을 때 암을 유발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연이 분리시켰던 진핵세포와 원핵세포의 게놈을 섞는 것이 현명한 일일까? 최악인 것은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 우리는 이런 괴상한 형태의 생명체를 더함으로써, 앞으로 수세대 동안의 생명계에 불확실성의 베일을 드리우고 있다. 우리는 몇몇 과학자들의 야심과 호기심을 만족하기 위해서 수백 만년간 지켜지던 진화의 지혜에 역행할 권리가 있는 것일까? (Chargaff 1976)

하버드대학 교수이자 노벨 의학상 수상자인 조지 월드(George Wald)도 NIH의 지침이 "계속 나아가야 할 것인가 아니면 멈춰야 할 것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 대신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 것인가"를 묻고 이에 답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Wald 1976). 저명한 생물학자인 신사이머(Robert Sinsheimer)도 "질문의 자유에 제한을 가한다는 것은 그것을 업으로 하는 과학자들에겐 무척 힘든 것이지만, 현대과학은 (그냥 두기에는) 너무 강력해 졌다"고 하면서, 유전자재조합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주장했다 (Kevles 1982, p. 34에서 인용).

논쟁은 과학자 사회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지구의 친구들>(Friends of the Earth)같은 환경단체들과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과 같은 과학운동단체도 유전자재조합과 NIH의 지침에 대해 반대했다. 이들은 과학자들의 지침이 숫자로 나타내 질 수 없는 위험들―통제불능의 새로운 생명체가 우연히 누출되는 사고, 유전자 조작이 진화나 유전자 풀(gene pool)의 다양성에 미치는 영향, 의료의 변화 등―을 모두 포함해서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유전자재조합에 대한 지적·경제적 투자가 더 커지기 전에 이것의 이익과 손해를 따져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Simring 1976). (실제로 1976년은 유전자재조합에 대한 자본투자가 막 시작된 해였다. 초기 유전공학을 선도했던 Genetech사가 이 해에 설립되었으며, 6개의 다국적 제약회사가 유전공학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도 1976년이었다. (Wright 1986, p. 325를 참조).

이런 비판에 대해 유전자재조합을 찬성하는 과학자들의 대응은 다음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어떤 과학자는 대중의 공포가 "사실과 픽션을 구분하지 못한" 데서 기인한 근거 없는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했고 (Cohen 1976; Turney 1998, ch. 9), 다른 과학자는 유전자재조합에 따르는 위험보다 훨씬 더 큰 이득을 얻을 가능성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Dyson 1976). 또 다른 과학자는 생물학에 대한 비판이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과학의 사실을 일반 대중이 이해하지 못해서 생긴 문제이기 때문에, 대중에 대한 과학교육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기도 했다 (Singer 1976). DNA 구조의 공동 발견자인 제임스 왓슨은 NIH의 지침을 "중세이래 유례가 없는 과학의 방향에 대한 통제"(Watson 1977, p. 14)라고 비난했으며, 1979년에는 "유전자재조합이 불러일으킬 질병은 UFO나 마녀와 같은 범주에 속한다"고 하면서 "실제 일을 해야 할 사람들이 엄청난 종이와 시간을 더 이상 낭비하게 하지 말고 유전자재조합에 부가된 모든 규제를 당장 철폐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 (Watson 1979).

보통 사람들에게 유전자재조합이 문제가 된 것은 과학자가 서로 다른 유기체의 DNA를 조합해서 자연에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생명체를 만들어 냈다는 데에 있었다. 자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생명체의 위험을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민주적인 사회 속에서 과학자들의 연구에는 아무런 한계가 없는가? 이런 연구를 수행하는 회사의 사적 이익과 잘못된 연구가 사회에 미칠 수 있는 공공적 손해 사이에서 어느 쪽을 선택해야 하는가? (Szanto 1993) NIH의 지침은 물론 연구의 자유를 주장하던 과학자들은 이런 문제에 별 관심이 없거나 이를 '픽션'으로 취급했고, 이에 만족하지 못한 시민들은 유전자재조합에 대한 지역적인 규제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976년 MIT와 하버드대학이 위치한 매사추세스의 케임브리지(Cambridge)시는 위험한 레벨(P3, P4)의 유전자재조합 실험을 금지시키는 모라토리움을 심의·통과시켰다. 케임브리지시의 모라토리움은 불과 몇개월 동안 유효했을 뿐이지만, 과학연구의 방향에 시민들의 의견이 개입될 수 있고 이를 시민 권력이 투표로 정할 수 있음을 보여주었던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Culliton 1976).

3.4. 논쟁과 상반된 가치 체계
이번 절에서 살펴본 현대 과학과 관련된 세 가지 논쟁은 모두 과학자들의 (작가로 더 유명한 레이첼 칼슨도 생물학을 공부했던 과학자였다) 문제제기가 촉발한 것이었다. 그리고 논쟁이 진행되면서 전문가들 사이에 의견이 갈리거나 (Mazur 1973), 또는 전문가들과 일반 공중(public) 사이에 첨예한 대립을 보였다는 것도 이 세 논쟁의 공통점이다. 논쟁을 살펴보면 과학적이거나 기술적인 구체적인 내용보다는, 서로 상이한 가치체계가 과학기술을 매개해서 충돌한 경우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다 (Nelkin 1995). 과학자들은 과학의 궁극적인 진보와 과학이 가져올 이득을 믿고 있었으며, '사실'을 '픽션'에서 구분하고 근거 없는 공포를 제거하면 대부분의 논쟁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들은 과학의 연구에 간섭하려고 하는 정치인과 대중의 시도는 미신이나 무지에서 기인한다고 생각했다. 반면 과학에 비판적이었던 사람들은 과학이 자연이라는 에코시스템이나 사회의 목적과 (예를 들어 삶의 질을 높이는 것) 조화롭게 발전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위해서는 사회의 구성원이 과학의 방향을 조절(regulate)하는 것도 가능한 일이라고 보았다 (Szanto 1993).

과학자들은 과학연구에 해보다 득이 많음을 보여야 했고, 비판자들은 유전자조합이나 원자력발전과 같은 현대 과학기술이 없이도 우리의 삶의 질이 유지될 수 있음을 보여야 했다. 이 두 논점을 비교해 보았을 때 유리한 측은 과학기술자였다. 유전자재조합이 사회에 어떤 이득을 가져다줄지 불투명했지만, 2차대전 이후 제도화된 과학에의 지원은 "모든 순수과학 연구는 장기적으로 실용적이다"는 전제에 근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기초과학연구가 언제, 어떤 실용적인 결과를 낳을지는 근본적으로 불확실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문제는 이 장기적이고 불확실한 과학연구가 공중의 세금에 의해 지원됨에도 불구하고, 공중이 이것을 전혀 통제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게다가 2차대전 이후 나타난 새로운 사회 문제와 과학이 이런 문제에 대한 논쟁에서 명백한 해결책을 제공해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과학의 사회·문화적 권위(socio-cultural authority)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4. 20세기 과학과 공중(public)의 관계: 어긋난 기대
과학의 권위가 약화된 데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과학사가들의 연구에 의하면 서구사회에서 과학(자연철학)은 17세기부터 공공영역(public sphere)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였다. 17세기와 18세기 이탈리아와 네델란드에서 의학교육과 해부는 공중의 참석 하에 이루어지는 공개행사였다. 과학과 공중과의 밀접한 관계는 18세기 계몽사조시기의 프랑스의 살롱과 스코틀랜드 계몽사조기에 에딘버러에 세워진 다양한 학회와 모임에서 과학과 의학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에서도 드러난다 (Rupp 1995). 과학혁명기에 출범한 실험과학의 전통은, 교회나 국가와는 분리되어 있는 또 다른 공간―실험과학자와 그 실험의 청중이 만나서 자유롭게 토론, 비판하고 의견을 교환하는―을 만들어 냄으로써 서구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성립에 중요한 전통을 창조했다 (Jacob 1995). 18세기 독일 의사들 사이의 논쟁에 대한 최근 연구는, 독일의 의사와 자연철학자들이 토론과 논쟁의 전통을 통해 자연철학을 공공영역을 구성하는 비판적 언술의 가장 좋은 모델로 격상시켰음을 보이고 있다 (Broman 1998). 이런 연구들은 적어도 19세기까지 과학이 공중의 삶과 지식에서 분리되어 있기는커녕 이에 밀접한 영향을 미치는 공중과학(public science)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또 과학이 국가권력을 감시하고 비판적인 언술을 생성해내던 공공영역(public sphere)의 주요 구성요소였음을 보이고 있다.

20세기 중반까지 과학과 공중의 관계에 생긴 변화를 깊이 있게 보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역사적 연구가 필요하지만, 나는 잠정적으로 이를 두 가지 상호연관된 경향으로 묘사하려 한다. 이 두 가지 경향이란, 1) 과학의 전문화가 공중을 참여자에서 수동적인 관찰자로 격하시켰다는 것과, 2) 20세기 중반까지는 공중에게서 유리된 과학자 사회가 이상적인 공공영역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강했지만, 1960년대 이후 과학자 사회와 과학지식의 문화적·정치적 권위가 추락했다는 것이다.

첫번째 경향에 대해선 자세한 설명이 불필요할 것이다. 물리과학은 19세기 중반에 이미 대학교육을 받은 일반 지식인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으며, 이것은 20세기 중반 이후의 생물학도 마찬가지였다. 과학자들은, 과학의 전문화와 세분화가 과학의 내용을 공중이 접근하기 힘든 것으로 만들었고, 과학의 내용에 대한 무지와 거대해져버린 과학의 힘이 개개인의 무력감을 증폭시켰으며, 과학의 영향력이 증가함으로써 일상 생활 속에서 과학의 결과를 접할 기회가 늘어났다는 복합적인 요소 때문에 공중의 과학에 대한 반감이 급격히 증폭되었다고 분석했다 (Davis 1976). 미국이나 영국의 과학자들이 1970년대 중반 이후 '과학에 대한 공중의 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라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고, 공중이 얼마나 과학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설문지를 돌리고 통계조사를 하기 시작한 것도 이런 맥락에서였다. 1980년대 이후에는 영국 왕립협회에서 이를 전담하는 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미국 국립과학아카데미에서도 비슷한 보고서가 쏟아져 나왔다 (Wynne 1995). 최근에는 <과학에 대한 공중의 이해>(Public Understanding of Science)라는 학술지까지 만들어 졌다.

그렇지만 위와 같은 분석을 극단적으로 밀고 가면, 과학에 대한 공중의 비판은 전부 과학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반과학'(anti-science)이라고 간주하게 되는 위험이 있다. 20세기 후반에 '반과학'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사람들의 담론에 등장하게 된 것이 치과의사들이 충치를 예방하는 방법으로 도입하려고 시도했던 수도물의 불소화(fluoridation)에 주민들이 반대한 사건을 겪으면서였음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Mausner and Mausner 1955). 194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이어진 이 논쟁에 관여했던 과학자들과 이를 분석한 사회과학자들은 과학적으로 그 효용이 입증된 불소화를 주민투표로 거부한 것은 과학에 대한 근거 없는 두려움의 발로였을 뿐만 아니라 직접 민주주의의 한계라고까지 말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최근 연구는 이 논쟁에서도 전문가들 사이의 심각한 의견 대립이 존재했으며, 수도물 불소화에 대한 공중의 반대는 미량의 불소의 축적이 가져올 수 있는 검증되지 않은 위험, 불소에 거부반응을 보일 수 있는 사람들에 대한 고려, 중앙 정부의 강제적 조치에 대한 반감이라는 가치체계의 대립에서 연유한 것이지 미신과 같은 반과학주의 때문이 아니었음을 보이고 있다 (Martin 1989). 또한 최근의 사례 연구는 과학의 내용에 대한 무지가 과학의 방향이나 과학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미숙한 판단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보여주고 있다 (Wynne 1992; Wynne 1995).

두번째 논점은 조금 설명이 필요하다. 18세기 이후 자연과학과 과학의 지식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유민주주의의 철학적·문화적 토대를 제공해 왔다. 이미 지적했듯이 과학은 자유로운 토론·비판·논쟁·불화가 무질서와 무정부주의를 낳는 것이 아니라 민주주의를 위한 토대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예증해주었던 지식이었다. 1660년 영국의 왕정복고 이후 왕립협회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번창한 실험철학이 지식의 권위로서 자리를 잡을 수 있었던 한 가지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Shapin and Schaffer 1985). 또 뉴튼 과학은 원자들이 모여서 이룬 자연에 조화가 있을 수 있음을 보임으로써, 원자화되고 개인적인 인간이 모여서 상호작용하면서 이룬 사회에 조화와 규칙이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19세기에 들어서는 통계학이 무질서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과 사회 속에 통계적 질서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것 이외에도 과학자 사회는 사회구성원의 행동에 대한 규범이 될 객관적 지식과 진리의 모델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고, 과학 지식은 정부나 다른 공공기관이 사회구성원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 내는 합리적 정책의 타당성에 대한 기준을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20세기 후반기에 나타난 과학과 관련된 가장 중요한 변화 중 하나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메타포·모델·지침으로서의 자연과학의 권위가 현저하게 추락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과학은 공중에서 분리되어 '사유화'(privatization)되었다 (Ezrahi 1990).

과학의 사유화에는 다음과 같은 복합적인 원인이 영향을 미쳤다. 먼저 과학이 전문 과학자에게만 열려있는 독자적인 공공영역을 만들면서, 과학 연구나 발전 방향에 대한 공중의 참여를 정치권력의 간섭보다도 더 심각한 문제로 생각하게 되었고, 이를 피하기 위해 연방정부에 로비를 해서 법안을 통과시키는 경우도 생기게 되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또 과학연구가 방사능이나 환경오염과 같은 수많은 사회문제를 만들어냈지만, 이런 문제의 해결은 과학적 근거보다는 정치적·외교적 타협에 의한 것이 많았음도 또 다른 이유가 될 수 있다. 대중 앞에서 과학자들은 과학지식의 절대적 객관성과 확실성을 주장하지만 실제 논쟁에서는 항상 전문가들 사이에 좁혀지기 힘든 의견대립이 보여왔다는 것도 과학의 권위를 추락시킨 요인이었다. 1970년대 이후 특히 분자생물학이 기업과 자본의 이해를 거의 전적으로 반영했다는 것도 과학의 사유화를 촉진시킨 원인이다.

20세기 동안 과학이 생산력과 결합함으로써 가지는 힘은 어느 때보다도 더 막강해 졌지만, 과학의 권위는 예전 같지 않다. 과학의 권위를 회복하는 길은 과학이 유일하고 절대적으로 객관적이고 보편적이라는 것을 주장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단절된 과학과 공중과의 관계를 다시 꿰어 맞추고, 공중이 원하는 과학연구가 무엇인가에 대해 더 귀를 기울이고, 자신을 지원하는 사회에 대해 더 책임(accountability)을 지는 과학을 만드는 데 있을 것이다.

5. 결론: 세기말 '포스트모던 과학'과 21세기 과학의 지평
과학자 사회에 베를린 장벽의 붕괴만큼이나 큰 충격을 주었던 사건은 미국 연방정부가 지원하던 초전도가속기(Superconducting Supercollider, SSC)의 예산지원이 의회에서 취소된 사건(1993년)이었다. 이는 입자물리학과 같은 거대과학(big science)의 기초연구가, 소련이나 유럽에 대해 미국의 헤게모니를 유지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하며 기술이나 산업에의 파급효과가 크다는 '주장'만으로는 지원을 받기에 어려워진 1990년대의 상황을 반영하고 있다. 초전도가속기의 취소를 두고 흔히 거대과학(big science)이 종언을 고했다고 하지만, 생물학 분야에서는 사회구성원에 그 효용을 인상적으로 설득시킨 휴먼게놈계획(Human Genome Project)이 10년 가까이 지원을 받으면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면, 거대과학 자체가 종언을 고했다기보다 냉전 특수로 성장했던 과학의 거품이 빠진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연구비의 삭감 속에서 살아남는 과학연구는 어떤 것인가? NSF의 의장을 지낸 레인(Neal Lane)은 1996년 미국과학진흥협회에서의 연설에서 "오늘날의 과학은 납세자와 그들이 선출한 의원이 과학의 가치와 기여에 대해 확신을 가질 때에만 한해서 지원된다"고 하면서 과학기술자 사회의 지도자들이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공중이나 시민과 어울리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Lane 1996).

1980년대 이후 일부 과학사학자나 과학철학자들, 그리고 소수의 과학자들은 현대과학이 그 엄청난 힘에 비해서 사회적 책임을 끌어안기에 적극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지적해 왔다. 여기에 대해 몇몇 과학자들은, 과학은 가치 중립적이고 그 연구의 결과를 예측하기 힘들다던가 (Shils 1987), 책임을 물어야 하는 것은 기술이지 과학이 아니다는 식으로 이를 회피해오곤 했다 (Bunge 1988). 그렇지만 냉전의 종식과 연구비의 삭감, 과학연구의 효용에 대한 공중과 정책결정자들의 의심은 이러한 소극적인 변호가 더 이상 통하기 어려운 상황을 만들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의 전문분야를 잘 알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전문가만이 아니라 자신의 일에 대해 책임을 지기 때문에 신뢰할 수 있는 과학기술자를 원하며 (Barber 1987), 최근 과학자들이 부쩍 책임(responsibility)이나 신뢰(trust)에 대해 자주 언급하는 것은 과학이 이렇게 변화된 상황에 새롭게 적응하고 있는 신호라고 볼 수 있다 (Forman 1997, p. 195).

1990년대 들어 드러나는 과학과 공중과의 관계는 과학에 대한 무조건적인 지원의 시기가 종언을 고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다. 부시의 『과학, 그 무한한 프론티어』는 과학과 사회의 관계에 대한 불변하는 진리를 담고 있다기보다는 세계대전 후의 특수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논의가 21세기에는 과학이 종말을 고할 것이라던지, 또는 과학에 대한 지원이 사라질 것이라는 주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20세기의 흐름을 돌이켜 보았을 때 분명한 것은 21세기의 과학과 공중과의 관계는 20세기 후반부의 그것과는 확연히 달라지리라는 것이다. 21세기 과학연구의 정당성은 진리나 장기적 효용과 같은 막연한 가치가 아니라 과학자사회 밖의 다양한 사회적·문화적 원천에서의 자극을 통해 찾아질 것이고, 이렇게 찾아진 정당성은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서 지속적으로 체크되고 주시될 것이다. 다른 사회·문화적 가치와 더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과학연구에 더 많은 지원이 이루어질 것이며, 과학연구 역시 다른 사회·문화 현상들처럼 훨씬 더 급속하게 바뀌는 상황에 놓이게 되고 이에 적응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유연성을 요구받게 될 것이다 (Kinsella 1996). 국제적 협력과 다른 전공분야 사이의 상호작용이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 가장 중요한 메커니즘으로 자리잡을 것도 분명하다 (Hicks and Katz 1996).

그리고 이런 변화들이 계속되면 어느 시점에는 과학 연구가 자연에 대한 냉담한 관찰자적인 시각을 탈피하고 자연 속에서 참여자로서 자연을 전체적으로 바라보며, 과학자 스스로 자신의 실천이 과학적 진리를 조개를 줍듯이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자연을 만들어 내는 것임을 자각하면서, 과학이라는 자신의 노동의 결과에 대해 조금 더 깊은 차원의 책임감을 느낄 수 있을지 모른다. 이것이 공중이 바라는 포스트모던 과학의 모습에 다름 아니다 (Toulmin 1981; Forman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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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욱 캐나다 토론토대학 과학기술사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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