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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8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오늘의 복음

by 巡禮者 2020. 5. 21. 2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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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5월 18일 부활 제6주간 월요일

 

 

제1독서 사도 16,11-15

11 우리는 배를 타고 트로아스를 떠나 사모트라케로 직행하여 이튿날 네아폴리스로 갔다. 12 거기에서 또 필리피로 갔는데, 그곳은 마케도니아 지역에서 첫째가는 도시로 로마 식민시였다.
우리는 그 도시에서 며칠을 보냈는데, 13 안식일에는 유다인들의 기도처가 있다고 생각되는 성문 밖 강가로 나갔다. 그리고 거기에 앉아 그곳에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14 티아티라 시 출신의 자색 옷감 장수로 이미 하느님을 섬기는 이였던 리디아라는 여자도 듣고 있었는데, 바오로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도록 하느님께서 그의 마음을 열어 주셨다. 15 리디아는 온 집안과 함께 세례를 받고 나서, “저를 주님의 신자로 여기시면 저의 집에 오셔서 지내십시오.” 하고 청하며 우리에게 강권하였다.



복음 요한 15,26─16,4ㄱ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27 그리고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나를 증언할 것이다.
16,1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떨어져 나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2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게다가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하느님께 봉사한다고 생각할 때가 온다. 3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짓을 할 것이다. 4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그들의 때가 오면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게 하려는 것이다.”




초등학교 때, 발표력이 정말로 좋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선생님이 질문하면 이 친구가 늘 제일 먼저 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늘 정답이 아닌 오답만 말한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산수 시간에 “누가 앞에 나와서 이 문제를 풀어볼래?”라고 선생님께서 말씀하시면, 이 친구가 여지없이 손을 들고 앞에 나와 문제를 풀었습니다. 물론 맞추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나중에 선생님께서는 “너는 한 번만 더 생각하고 답을 해보면 어떨까?”라고 이야기하셨고, 우리도 “너는 그만 가만히 있어.”라고 말했습니다.

아무튼, 이 친구에 대한 기억은 틀려도 부끄러워하지 않는 뻔뻔함을 가지고 있지만, 공부는 잘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 이 친구가 명문 대학에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틀리고 실패했을 때가 뇌가 성장하는 최고의 순간이라고 뇌 과학자들은 말합니다. 문제가 어렵다는 느낌이 들어야 뇌가 성장한다는 것입니다. 앞서 소개했던 제 친구 역시 틀리면서 뇌가 성장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대다수 사람은 어떻습니까? 틀리는 것을 주저하고 부끄러워합니다. 즉, 이를 실패로 여기고 이 실패를 두려워하지요. 그러나 틀리고 실패하는 체험은 자신을 성장시키는 역할을 담당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제자들을 환난에 대비시키십니다. 그 힘이 바로 보호자이며 진리의 영인 성령에게서 나온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이 성령을 받은 사람은 주님에게서 떨어져 나가지 않으며 박해를 비롯한 모든 시련을 극복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박해하는 자는 자기들이 잘못하는지를 모릅니다. 오히려 하느님께 봉사하고 있다고 착각했습니다. 당시의 종교자들의 모습이 그러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착각을 인내로 극복하는 사람에게만 하느님의 궁극적인 보상이 주어진다고 하시지요. 실제로 제자들은 하늘 나라의 영광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반대를 받는 것이 실패가 아니며, 반대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뜻을 철저하게 따르게 될 때 더 큰 선물을, 진정으로 성공이라고 할 수 있는 길에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틀리고 실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맞는 것이고 진정한 성공이었습니다. 이를 우리는 부활의 영광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주님 안에서 세상의 실패보다 주님 안에서의 성공을 꿈꿀 수 있습니다.



누구나 자기 인생이라는 이야기에서는 주인공이다(존 바스).

십자가의 죽음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무조건 옳은 판단을 할 수 없습니다.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께 ‘노인’이라고 말하면 별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늙은이’라고 말하면 어떻게 될까요? 아마 예의 없는 사람이라고 난리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노인’은 한자이고, 늙은이는 순우리말입니다. 왜 순우리말이 막말 취급을 받는 것일까요?

계집이라는 말도 순우리말이지만, 여성을 향해 ‘계집’이라고 하면 여성 비하를 한다고 비판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15세기에 출간된 ‘두시언해’를 보면 ‘老妻(노처)’를 늙은 처녀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순우리말은 과거부터 써왔던 말입니다.

아내를 향해 ‘마누라’라고 지칭하는 것도 아내를 우습게 보는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한말 흥선대원군은 명성황후를 향해 마누라라고 호칭했습니다. 며느리인데도 말입니다. 당시 마누라는 지체 높은 사람의 부인을 높여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었던 것입니다.

시간에 따라, 또 장소에 따라 옳고 틀림이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그런데 우리는 자신에게만 맞춰서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무조건 옳은 절대로 틀리지 않는 판단을 할 수 있는 우리가 아닙니다. 그런 판단은 오직 하느님만이 가능하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오늘은 광주 민주화 항쟁 40주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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