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신약 성경의 주인공 ‘예수’ (2)
‘성령’으로 새롭게 깨어난 제자들
죽음 각오하며 ‘예수 부활’ 외쳐
지난 주에 역사적 관점에서 ‘어제의 예수’를 보았다면, 이번 주는 신앙적 관점에서 ‘오늘의 예수’를 조망하려 한다. ‘어제의 예수’는 분명 ‘실패한 예수’였다. 당시 모든 사람이 예수를 비난하고, 심지어 제자들도 모두 도망쳤다. 철저히 소외된, 말 그대로 처절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예수 사건은 십자가 처형으로 막을 내린 것이 아니었다. 마치 다 끝난 줄 알았는데 극적인 반전으로 이어지는 미스테리 영화의 한 장면을 닮았다. 예수의 삶이 실패로 끝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제자들이 갑자기 기존의 태도를 완전히 바꿔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r고 외치기 시작했다. 위험천만한 행동이었다. 언제 어디서 잡혀 갈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처음에는 몸 사리기 바빴던 제자들이 왜 갑자기 죽음을 각오하고, 용기를 냈을까.
뭔가 큰 변화가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분명히 무슨 사건이 있었다. 그 사건은 바로 성령께서 이 세상에 오신 사건이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요즘 말로 바꾸면 대충 이런 말이 될 것이다.
“나는 다시 돌아간다. 그런데 내가 가면 곧바로 협조자가 올 것이니 그분이 내가 전했던 모든 말씀을 깨닫고 너희들이 다른 삶을 살 수 있도록 인도해 줄 것이다. 그 협조자가 곧 온다. 정말 온다. 기다려라. 내 말을 믿어라.”(사도 1, 4~5 참조)
과연 정말 그분이 오셨다. 이후 제자들이 완전히 바뀌었다. 바뀐 제자들이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의 죄 때문에 돌아가시고 묻히셨으며, 성경 말씀대로 사흗날에 되살아나시어, 케파에게, 또 이어서 열두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1코린 15장 참조) 제자들은 겁도 없이, 죽음까지 각오하고“예수께서 부활하셨다”고 선포한다.
여기서 궁금증 하나가 생긴다. 예수 부활사건은 이성적으로는 알 수 없다. 인간 능력의 한계 때문이다. 인간 능력을 뛰어넘는 신비 차원에 있어서는 인간 이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우리는 소나무에 대해 알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알고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우리는 소나무의 크기와 외적 모양에 대해 알고 있다. 식물학자라면 어떤 토양에서 잘 자라는지, 어떤 비료를 주어야 하는지 등 소나무에 대해 더 많은 사실을 알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소나무가 소나무로 있게 하는 그 무엇에 대해 모른다. 소나무 씨앗에는 도대체 ‘어떤 무엇’이 있어서 나중에 소나무가 되게 할까. 우리는 이성적으로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학자들이 예수님에 대해서 역사적인 관점에서 얼마든지 연구를 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선 우리는 이성적으로 파악할 수 없다. 이점에서 제자들은 학문적으로, 이성적으로 예수를 연구한 사람들이 아니다.
그들은 신앙의 눈으로 예수를 바라보았다.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을 확 바꾼 것은 ‘성령’이었다. 이성의 힘이 아니라, 성령의 힘으로 ‘새롭게’ 깨어난 것이다. 성령에 의해 새로운 삶이 열린 것이다. 성령에 의해 암흑에서 빛으로 나온 것이다.
이 점에서 인간은 한계를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그 이상의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은 분명 하느님을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신을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있다. 인간은 성령의 은총으로 궁극적인 것을 생각할 수 있는 영적인 힘, 초월적인 힘이 있다.
그 힘으로(성경 안에 녹아있는 성령의 은총의 빛으로) 다시 한번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의 경천애인의 삶은 십자가에서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한 것이다. 부활 사건을 우리는 믿는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따른다.
나만 그런가? 아니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사분의 일이 넘는 사람들이 예수의 삶을 본받으며 살고 있다. 실패한 삶이라면 누가 그 삶을 본받으려 하겠는가. 적어도 15억 이상의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있는데 과연 예수의 삶은 실패한 것인가.
아니다. 대 성공이다. 예수님의 삶은 크게 성공한 삶이다. 그 삶의 현존, 성공한 예수의 현존이 바로 성경 속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