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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주님 수난 성지주일 마태 26, 14~27, 66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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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0, 주님 수난 성지주일 마태 26, 14~27, 66

발행일 : 2005-03-20 [제2440호]

“매일의 십자가 어떻게 맞을 것인가”

우리 교회에서는 오늘부터 1주일 동안을 우리를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집중적으로 다루면서 우리도 거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다. 그래서 이 주간을 성주간이라 한다.

예수님은 배신한 사도 유다에 의해 예수님을 죽일 기회를 노리던 사람들에게 은전 30개에 인신매매를 당하셔서 종교적으로 가장 큰 죄에 해당하는 하느님을 모독한 죄인이 되고, 정치적으로도 가장 큰 죄에 해당하는 가이사르 황제를 거역하여 스스로 유다인의 왕이 되었다는 역적으로 몰리어 그 당시에 가장 잔인한 사형방법인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는 수모를 당하셨다.



십자가의 의미

본래 십자가는 정복자들이 포로들이나 노예들에게 겁을 주어 도주하거나 범죄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고안해낸 사형 도구였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가장 비참한 죽음의 상징이었고 저주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후에는 그 의미가 전연 반대가 되었으니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 승리의 상징, 영광의 상징, 축복의 상징이 되었다.

그래서 성당의 종탑 위에도 제대 위에도 교우들의 방 벽에도 십자가가 걸려 있고, 신자들의 가슴에는 물론이려니와 심지어는 비신자인 연예인들의 목에도 걸려 액세서리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것도 흔히 볼 수 있다.

성직자들은 강복을 하거나 집이나 물건들을 축복할 때에도 십자가를 긋는다. 우리는 식사 전후에도, 기도 전후에도, 일과 전후에도, 운전 전후에도 심지어는 주부들이 밥을 퍼기 전에도 십자가를 주걱으로 긋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 이후에 십자가의 의미가 달라졌지만 모든 십자가의 의미가 다 달라진 것은 아니다. 같은 날 같은 십자가를 지고 같은 길을 걸어 같은 곳에서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세사람이었지만 이 세사람의 십자가의 의미는 서로 다르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해서 당신의 사명을 완수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시고, 영광스러운 부활과 승천을 하셔서 성부의 오른편에 앉으셔서 마귀를 발판으로 삼고 계시는 데에 비해 예수님의 오른쪽에서 못 박힌 죄수는 겨우 자기 한 사람만을 구하는 데에 그쳤고 예수님의 왼편에 못 박힌 죄수는 자기 자신마저 구하지 못하고 죽음을 앞당겼을 뿐이다.

그렇다면 왜 그런 차이가 생겼을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하여 성부께 대한 순명과 인류에 대한 용서와 사랑이 얼마나 크고 치열하였는가를 증명하신 반면, 오른 쪽의 죄수는 자기 잘못의 대가로 당하게 된 십자가형을 당연한 것으로 순수히 받아들이면서 예수님께 자신을 온전히 위탁하였으나, 왼쪽의 죄수는 자기의 잘못으로 받게 된 십자가형을 거부하면서 무죄한 예수님께까지 조롱을 퍼부으며 죽어갔으니 그의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예수님은 당신의 수난을 만류하는 베드로에게 호되게 야단을 치시고는 당신의 제자들을 향하여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제 목숨을 살리려고 하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얻을 것이다』(마태 16, 24~25)라고 말씀하셨다.

십자가는 고통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람은 누구나 싫든 좋든 고통을 즉 십자가를 져야한다. 예수님은 크고 무거운 나무십자가를 지고 가셨지만 우리에게는 매일 매일 크기와 무게와 색깔이 다른 십자가가 찾아오기 때문에 그것들을 품에 안고 가야만 한다.

그래서 우리가 십자성호를 등에다 긋지 않고 앞에다 긋는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매일 맞이하는 십자가가 어떤 의미의 십자가가 되는가는 순전히 우리의 지향과 자세에 달렸다.

예수님과 같은 지향과 자세로 십자가를 받아들인다면 예수님의 구원사업에 동참하는 것이 될 것이고, 오른쪽의 죄수와 같이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면 남에게는 도움을 못 줄 망정 자신만은 구원할 수 있겠지만 왼쪽의 죄수와 같이 자기의 십자가를 거부하면서 발악을 한다면 그 아까운 십자가가 멸망의 도구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앞으로 우리는 어떠한 지향과 자세로 십자가를 맞을 것인가?



허성신부 <부산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영성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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