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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 “지상에서 부활을 살자”/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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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 “지상에서 부활을 살자”/배광하 신부

부활 제2주일 (요한 20, 19~31) : 제자들에게 사명을 부여하시다
발행일 : 2007-04-15 [제2545호, 6면]

- 볼 수 없어도 믿는 믿음 -

인간의 한계

과학자들은 우주를 ‘소우주’와 ‘대우주’로 나눈다고 합니다. 소우주에 관하여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모든 물질의 기본 단위가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지를 알아내려고 노력한 이래 현대의 과학자들이 분자, 원자, 소립자를 비롯하여 ‘쿼크’와 ‘렙톤’ 까지를 발견합니다.

이 렙톤을 1mm 세우기 위해서는 1초에 10개씩 하루 종일 세운다 하더라도 무려 317만 년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때문에 소우주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어떻게 이 작은 것들이 생겨났으며, 이것들이 어떻게 적당히 어우러져 이 세상을 이루는지 경이로움을 넘어 두려움마저 든다고 합니다.

우리 인간의 몸도 풀 수 없는 신비 덩어리입니다.

대우주인 은하계 역시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넘는 신비입니다. 현재까지 천문학이 발견한 우주의 범위를 ‘초초 은하단’이라고 천문학에서는 부릅니다.

그런데 이 초초 은하단 안에 있는 별의 숫자를 다 헤아리자면 1초에 100개씩 셀 수 있는 컴퓨터로 24시간 쉬지 않고 세어도 약 2조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태초의 인간인 아담과 하와로부터 생존하고 있는 모든 인류가 저마다 별을 수십 억 개씩 갖는다 하여도 다 가질 수 없으며, 또 얼마나 세어야 하는 숫자인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대우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가장 위대한 존재이지만, 또한 가장 미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을 만드신 조물주 하느님께서 계시는 한 우리는 피조물에 불과합니다.

무엇을 보거나 만져봐서 알 수 있는 우주의 신비는 극히 한정되어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경우처럼 보고 만져지는 하느님이 아니시라, 우리는 분명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 모든 형체와 인간의 감각을 뛰어넘는 하느님을 믿고 있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앙은 시작부터 순수한 믿음,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며 투신하는 믿음에서부터 출발하였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것부터가 인간의 오만이며 교만인 것입니다. 때문에 ‘봄’과 ‘만짐’이 아닌, 그분 말씀에 온전한 믿음을 두고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신앙 고백이 나올 수 있어야 합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 28)



의심을 버리고

대화를 나눌 때마다 신비롭고 놀라운 사실은, 그 모든 사람들의 얼굴이 모두 다르다는 것입니다. 한 어머니 밑에서 태어난 쌍둥이마저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얼굴이 다릅니다. 손가락 지문을 보면, 그 작은 면적의 문양이 모두 다르다는 모습에 우리는 분명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믿게 되며, 하느님께서 계시다는 신앙을 고백하게 됩니다.

계시는 하느님께서는 부활 하셔야만 하고, 분명 부활 하셨습니다. 그분께서 부활하시지 않으셨다면, 역사이래 가슴 아프게 숨져간 모든 의인의 죽음은 죽음 자체로 끝나기 때문에 더욱 비참하게 됩니다. 나아가 이유도 영문도 모르고 역사의 희생양으로 죽어간 모든 이들의 죽음 역시 헛된 죽음으로 끝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위해 죽음을 극복하시고 부활 하셔야 합니다. 그리하여 역사 이래 인간이 흘렸던 모든 눈물과 통곡의 절규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음을 희망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은 진정 새 창조이며, 하느님 권능의 모습이지만 인간의 입장에서 볼 때, 존재해 주어야 하는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이 지상에서 흘리게 될 땀과 눈물의 희생이 의미 있게 됩니다. 부활은 참으로 우리 인간을 위한 가장 큰 선물이며, 이 질곡의 세상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인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토마스 사도에게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의 모든 인간에게 끝까지 들려주고자 하는 당신 사랑의 말씀인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

부활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부활에 대한 의심을 떨쳐 버리고, 이 지상에서부터 부활을 살아야 합니다. 부활은 논쟁의 대상이 아닌 믿음의 대상입니다.

한계성을 지닌 인간이 무한하신 하느님의 깊은 신비를 다 깨우칠 수는 없습니다. 죽음의 문화가 넘실대는 세상을 생명이 약동하는 부활의 세상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이 더 시급합니다.

나의 이기심과 아집의 닫힌 무덤을 열고 주님과 함께 생명의 부활로 걸어 나와야 하고 서로에게도 그 생명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평화의 손길을 뻗을 때, 상처로 얼룩져 죽어있는 형제를 용서의 부활로 일으켜 세울 때, 논리적인 부활의 설명보다 더 큰 부활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참 부활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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