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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용서는 하느님의 잣대로/배광하 신부

복음생각

by 巡禮者 2010. 7. 30.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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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9) 용서는 하느님의 잣대로/배광하 신부
사순 제4주일 (루카 15, 1~3. 11ㄴ~32) : 되찾은 아들의 비유
발행일 : 2007-03-18 [제2541호, 6면]

- 제가 죄를 지었습니다 -

용서에 대하여

‘칼릴 지브란’은 자신의 작품 ‘예언자’에서 이 같은 글을 남겼습니다.

“살해당한 자, 자기의 살해당함에 책임 없지 않으며, 도둑맞은 자, 자기의 도둑맞음에 잘못 없지 않음을, 정의로운 자, 사악한 자의 행위에 전혀 결백할 수 없으며, 정직한 자, 중죄인의 행위 앞에서 완전 결백할 수 없음을.

그렇다. 죄인이란 때로는 피해자의 희생물이다. 그리하여 아직도 때로는 죄인이란 죄 없는 자의 짐을 지고 가는 자인 것을, 그대들은 결코 부정한 자와 정의로운 자를, 사악한 자와 선한 자를 가를 수는 없다.”

우리는 자주 누구누구를 용서할 수 없다고 이야기합니다. 더구나 그 용서할 수 없음이 우리를 가장 괴롭히고, 영적 자유의 걸림돌이 되곤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 속에 살아갑니다. 용서는 절대로 내가 아닌 하느님 아버지께서 하십니다. 우리는 그저 그분의 자비에 우리 자신과 타인의 잘못을 내어 맡길 따름입니다. 분명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상에서 당신을 그토록 끔찍하게 처형하는 자들을 용서하시지 않고 아버지 하느님께 맡기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들은 자기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릅니다”(루카 23, 34).

내가 용서함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용서하심이란 확신이 설 때, 내 자신은 이제껏 가졌던 용서의 칼자루를 감히 주님께 드릴 수 있습니다. 그 같은 겸손이 있을 때, 용서의 위치 변동이 있을 때, 진정 용서가 가능합니다. 그리고 비로소 길고 어두운 미움과 증오, 분노와 복수의 터널을 빠져 나올 수 있습니다.

용서에 대하여 생각할 때, 우리가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함은 첫째, 용서는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둘째, 인간이 인간에 대하여 선과 악에 대한 그 어떤 선을 그어 판단할 수 없음을, 셋째, 세상 그 어떤 죄도 하느님께 용서를 청하고 회개하면 모두 용서받을 수 있어도 ‘용서하지 않는 죄’는 용서 받을 수 없음을, 넷째, 너무도 가슴 터지는 분노를 하느님께 내어 맡기고 진실로 타인의 잘못에 대한 용서를 청할 때, 비로소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할 때 오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은 더욱 크게 가슴에 다가올 것입니다.

용서의 아버지와 큰아들

제 책상 앞에는 독일 베네딕토회 수사님이며 칠보기법의 성 미술 세계적 권위자이신 ‘에기노 바이너트’의 ‘되찾은 아들’ 작품이 있습니다.

바이너트 수사님은 1945년 폭발사고로 오른손을 잃고 왼손 하나로 작업을 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탕자의 비유’로 유명한 그의 작품을 보면 머리가 백발이 되신 아버지께서 상거지가 되어 돌아온 둘째 아들을 기쁘게 맞아 안아 주는 모습 밑에 난쟁이 같은 큰아들이 잔뜩 화가 나서 허리에 손을 얹고 마치 싸움이라도 한판 할 것 같은 자세로 서 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상대적으로 큰아들을 그토록 작게 표현한 것은 큰아들의 작은 마음을 나타내기 위함으로 보입니다. 아버지는 언제든 자녀들이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오기만 하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아버지의 마음이요, 하느님의 마음이라고 오늘 예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끊임없이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는데, 큰아들은, 우리들은 가족을, 이웃을 용서하지 않고 받아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이 심판관이 된 양, 우리들 마음의 잣대로 남을 판단하고 저울질하며 단죄하시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큰아들의 경우를 봅시다.

“그런데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이 오니까,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군요”(루카 15, 30).

큰아들은 아버지에게 대놓고 따집니다. 그는 집에서 아버지의 명을 어기지 않고 종처럼 일만 하였습니다. 참으로 칭찬 받을 만합니다.

그러나 그는 무엇인가 대가를 바라고 그리하였습니다. 그리고 큰아들의 대꾸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습니다. 그처럼 종같이 일하며 집을 떠나본 적이 없는 그가 멀리 떠난 동생의 가산 탕진 내용을 곁에서 본 듯 자세히 알 수 있을까요? 동생이 술로 탕진하였는지, 도박으로 탕진하였는지, 요즘처럼 주식에 투자하여 날렸는지, 큰아들이 어찌 알고 대뜸 창녀들과 어울려 가산을 탕진하였다고 말하는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것은 이미 큰아들 마음에 창녀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눈에는 하느님만이 보이고, 강도의 눈에는 강도만 보이는 법입니다. 결국 큰아들과 같은 눈과 마음의 판단을 지닌 상태로는 남을 관용으로 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죄에 대한 용서를 하느님께 구할 수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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